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박민준: 불안의 재인과 잠시 잊으라는 환상의 카니발

심현섭

박민준: 불안의 재인과 잠시 잊으라는 환상의 카니발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신현림의 시, <나의싸움> 중에서



<브레넘 Bravenum>, 2018, Oil on canvas, 162x12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판테온 Panteon(Pantheon)>, 2016-2017, Oil on canvas, 210x291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라포르 서커스Rapport Circus≫는 서커스에 등장하는 동물과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화려한 색과 극사실주의 기법의 그림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세간의 평대로 박민준의 그림을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면 마술적인 것은 극단적으로 사실적, 쉽게 말해 진짜 같아야 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마술은 사실을 증명하려는 방법의 성공적 수행에 의해 완성된다. 미술에서 그것은 착시이며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방법이 극사실적인 섬세한 묘사다. 

서커스는 곡예사, 어릿광대, 잘 훈련받은 짐승, 줄 타는 사람 등이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장이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장면들을 위해 그들은 훈련하고 위장하고 속여 관객에게 현실을 망각하게 하거나 아예 현실처럼 여기게 한다. 이 점에서 서커스는 마술의 세계이다. 서커스라는 가면의 세계, 비현실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그리기로 작정한 박민준이 극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진짜처럼 위장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박민준의 치밀하고 섬세한 그림은 상상의 세계를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는 하나의 장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테온>(2016-2017)이나 <브레넘>(2018)에서 박민준이 내놓은 이미지들은 현실과 상상이 섞인 대상의 혼재로 인해 관람자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고전풍의 사실주의적인 그림은 그 황당한 조합으로 일견 사실처럼 보이다가 금세 조작의 느낌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우리는 박민준의 이미지가 지시하는 것이 애당초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 즉 인간의 삶 자체이지 않았나 질문하게 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박민준은 서커스라는 마술의 세계의 재현이나 이를 통한 현실의 인식이 아니라, 서커스라는 매개를 통해 그 현실을 재현하고 관객과 소통하려 하지 않았나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차이는 예술작품의 근원을 찾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다. 박민준의 작업이 인간의 삶의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박민준의 작품은 인간의 삶을 서커스와 같은 것으로 인식한 작가의 사유가 선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인식과 사유가 언제, 어디에서 생성되었는가를 풀어헤치는 일은 작가의 삶과 연관해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의 근원으로서 모티프가 인간과 삶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시각과 태도에 있음을 아는 일은 박민준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 중요하다. 우선은 인간관계의 친밀도를 가리키는 라포르(Rapport)와 서커스가 합쳐진 전시명 ≪라포르 서커스≫롤 통해 이 전시가 허위와 가식으로 이루어진 인간세상의 관계에 관한, 나아가 그것이 빚은 서커스 같은 세상의 실상을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이 작품은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어떤 “미적가치”를 획득해야 한다고 말한 박민준에게 어울리는 추론이다.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사회적 시각, 시대의식 같은 미적가치 말이다.     

그렇다면 박민준이 인식한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일명‘서커스 그림’에서 허공을 바라보는 등장인물의 초점 잃은 눈동자,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서거나 폭 좁은 기둥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들, 땅을 밝고 있지만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가느다란 동물 굽을 가진 사람. 이들 모두는 불안에 떠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화려한 색으로 치장하고 종교나 자유를 상징하는 깃대를 들고 있지만 불안하기만 한 인간들. 거대한 근육을 가지고 동물들을 타고 위세를 떨지만 결국 그물망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는 유한자로서 인간들. 끝이 뾰족한 구에 선 채 붉은 천에 휩싸여 선과 종교와 과학의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의 얼굴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박민준이 보기에 인간의 현실은 좌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을 포기하지 못한 채 종교와 문명에서 답을 구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모순과 불안으로 창궐하다. 고전적인 외양보다는 내면에 드리운 이러한 불안의 속성이야말로 박민준의 그림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단초일 것이다.


<라푸-추락 Rapu-Fall>, 2018, Oil on canvas, 100.5x72.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라푸-파파 Rapu-Papa>, 2018, Oil on canvas, 53x4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박민준의 현실인식은 자신이 쓴 소설 『라포르 서커스』 속 주인공 라푸의 이름이 제목에 달린 그림들에서 좀 더 직접적이다. 편의상 이 그림들을 ‘라푸 그림’이라고 한다. <라푸-추락>(2018), <라푸-파파>(2018)에서 보듯 라푸 그림에서는 극단적으로 섬세한 필치로 밀어붙인 세밀화와 달리 색과 선이 뭉개져있다. 서커스 그림의 극사실화기법이 불안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인간 현실, 즉 외면을 묘사했다면 라푸 그림은 내면에 해당하는 불안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예감을 보여준다. 불안이라는 외적 현상은 선명한 색과 섬세한 필치를 바탕으로 그나마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반면, 불안의 원인과 같은 내적 요인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는 상대적으로 어렵다. 불가지의 영역으로 실체가 불분명한데다 그 원인이 다층적이기 때문이다. 표현할 대상이 은폐적일 때 작가의 선과 색은 변화한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대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쪽은 추상으로 나아가고, 한 쪽은 형태를 뭉그러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둘의 차이는 변형의 정도라기보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질감에 있다. 관람자는 이 감각을 통해 작가의 노동의 과정을 상상한다. 반면 추상작품에서 관객은 코드와 상징을 발견하는데 급급하여, 작가의 노동을 느끼기는 힘들다. 형태가 뭉그러진 그림은 시각을 통해 다가오는 질감과 촉감으로 인해 작가의 노동을 별다른 매개 없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이러한 감상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각의 차이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림에 투여한 물리적인 노동력의 양 또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림 그리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다'고 토로하고, '예술이란 단지 개념이나 아름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닌 미적인 가치와 육체적 노동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박민준인데다, 아직 세밀하게 묘사한 형상이 남아있는 그의 ‘라푸 그림’이라면 더욱 더 그렇지 않을까. 

박민준의 ‘라푸 그림’은 다층적인 인간의 불안 요인을 묘사하기 위해 코드화 대신 색과 선의 뭉그러짐과 그로 인한 형태의 변이를 택한다. 이와 함께 아직 남은 섬세한 형상과 다소 거친 붓질의 흔적, 캔버스를 꽉 채운 배경색에서 관람자의 감각은 작가의 노동을 느낀다. 이로써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불안은 관람자에게 그대로 전이한다. 욕망과 집념으로 뭉친 사람은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지만 그는 구름 위에 존재한다. 가느다란 형체로 뛰어오른 라포의 마지막 춤은 형상의 축소로 사라지기 직전의 위태함을 내포한다. 거울에 비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은 불안의 요인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자신의 희미한 형상을 뒤로하고 줄을 타는 곡예사는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이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두 개의 자아, 그 중 어느 한 쪽도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하고 외줄을 타며 살아가는 불안한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라푸의 상 Statue of Rapu>, 2018, Urethane resin, gold leaf, colored wood.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박민준의 조각은 인간의 불안 심리를 더 선명하게 전달한다. 재료가 주는 질감과 촉감의 직접성은 그림에서 색과 선의 변형이 이루려했던 표현의 극대화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인간의 내적 갈등을 살과 뼈로 드러낸 강렬한 육체의 굴곡에서 인간의 고통은 적나라하다. 첨단에 선 인간의 발끝은 위태로워 서커스 같은 인생을 대변한다. 발끝으로 중심을 잡고 서려는 작은 인간의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은 초극적 혹은 긍정적인 균형이라기보다는 불안과 초조, 버텨야하는 삶의 고단함에 가깝다. 급기야 천정에 매달린 채, 원숭이에 의해 눈이 가려져 허공을 더듬는 검은 조각은 미궁의 삶에 빠진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게 한다. 그림에 둘러싸인 조각들은 의도적인 장치인 조명에 의해 긴 그림자를 벽에 드리우는데 이는 전시장의 기류를 불안으로 휩싸며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은 예술가의 사유에서 나오고, 작품은 그 사유를 담는 그릇이다. 박민준은 카라바지오의 그림 <도마의 의심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1602)을 보고 색감과 광선이 주는 드라마틱함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눈앞의 현실을 손가락으로 파헤쳐 확인하려는 도마의 탐구를 봤을지 모른다. 내가 보기에 박민준은 삶의 현실을 파악하고,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의 말을 빌리면 “현실과 상상의 중간단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예술은 박민준의 말대로 “균형을 잡는 과정”(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을 “표현”(어서 꺼지라구!)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이 살아가고 또 살아내야 하는 삶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불안을 아주 제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민준의 작업은 불안의 재인이자, 잠시 잊으라는 환상의 유혹이거나 축제carnival이겠다. 
(미술평단 136, 봄호, 2020.5.)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