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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베란다에 가설된 축소된 자연

박영택

아파트 베란다 풍경



인왕산 밑에 위치한 동네에 살았던 겸재 정선이 그 자신의 후반 생애의 생활 모습을 그린 이른바 자화경(自畵景)인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를 즐겨 꺼내 본다. 오른쪽 하단의 귀퉁이에 자그마하게 위치한 꼽패집의 모서리방에서 도포 차림의 겸재가 서재에서, 자신의 서책이 쌓인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수목이 골마다 우거진 뒷산이 펼쳐져 있고 앞마당에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 등 기타 잡수들이 서 있으며, 한여름의 무성한 기운을 듬뿍 드러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엉을 얹은 토담이 둘러쳐져 자연스레 만든 후원, 초가지붕의 일각문(一各門), 덩굴이 우거지고 잎새들이 묽고 엷은 먹의 자잘한 점으로 성글게 찍혀져 있다. 개결한 선비의 조촐한 생활 분위기가 물씬거리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열린 방문 속의 선비가 되어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체험에 황홀하게 빠진다. 사실 저런 환경에서 은거하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작가의 작업실을 다녔는데 근자에 와서 도심에서 훌쩍 벗어난 곳에 자리한 그들의 작업실 공간이 무척 부러워지고 있다.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나 역시 산세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 있는 집, 마당이 있고 과실수 몇 그루와 괴석을 부려놓을 수 있는 마당이 있는 공간이 간절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공간은 요원해서 나는 기껏해야 아파트 베란다에 오죽과 홍매화, 그리고 몇 개의 제주도 돌과 옹기를 부려놓고 자주 바라볼 뿐이다. 사실 베란다 정원이나 화단이라 부를 만한 것도 못 되는 누추한 곳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좁고 제한된 공간이 <인곡유거도> 속의 환경을 대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과 사방의 기이한 경관 그리고 밤낮과 아침, 저녁 각기 달라지는 풍광 등을 바로 곁에 두고 그 임원(林園)에서 교양을 갖추며 달리 세상에 구하는 것 없이 한평생을 마치고자 희구하였다.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은 출세에 있지 않고 취미와 여유를 구가하는 데 있다는 소망을 품었는데 그 소망을 구현하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집과 자연경관의 축소판인 정원이었다. 운치를 지닌 선비가 거처하는 곳은 일종의 고아함과 속됨을 벗어난 아취를 느끼게 되는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선인은 뒤로는 산언덕을 등지고 앞으로는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정자 한 채를 얽어 짓거나 누(樓)에 거처하기를 좋아했다. 자연경관을 종일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비로소 흉금을 맑게 씻고, 정신을 유쾌하게 하고자 열망한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배후에는 자연에 가까이 가려는 자연주의적 심성이 도저히 자리 잡고 있다.


유교적 인생관은 사람의 사회적 의무 및 공인으로서의 봉사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은자적 삶의 근원성 또한 인정하였고 그를 통해 균형 잡힌 삶, 현실과 이상의 조화로운 공존을 지탱시키고자 한 것이다. 군자나 신선의 길에 가까운 삶이란 좋은 산수에 은둔하여 사는 것인데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경우 산수화로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니 산수화란 군자를 꿈꾸는 선비에게 어떤 삶의 공간에서 어떻게 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벼락처럼 안기는 그림이다. 나로서는 바로 이 지점이 산수화의 핵심적 기능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결국 현실적, 세속적 삶의 의무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끊임없이 긴장을 부여하면서 스스로의 삶의 자정 역할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자연을 즐기고 풍류와 은둔적 삶을 지향하는 선비들의 거주지는 그래서 항상 자연과 함께하고 있으며 동시에 열려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는 요즈음, 나는 마루에서 좌식 책상에 앉아 일하다가 수시로 저 베란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가당치도 않게, 마치 겸재가 모서리 방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흉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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