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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지붕 없는 미술관, 소통하는 예술 시안미술관 변숙희

윤태석


시안미술관 전경

체신청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진급할 때는 물론 직무의 특성상 전근을 많이 다니셨다. 따라서 변숙희는 입학한 곳에서 졸업해본 기억이 없다. 전보 칠 때의 모스부호(Morse Code) 찍는 소리, 가볍고 경쾌한 타자 소리는 아버지가 일하던 우체국 안을 늘 정감 있게 해주었고 누군가에 소식을 전한다는 기쁨에 야릇한 흥분까지 더해, 듣는 이에게는 늘 향수를 끄집어내 주곤 했다. 우표 위에다 연신 찍어대던 둥근 나무도장의 둔탁한 소리, 우표며 편지봉투와 맞바꾼 후 힘없이 던져지던 분유 깡통 속의 동전 소리, 손님이 드나들 때마다 양쪽으로 열리며 끼익 끼익 거리던 출입문은 늘 정겨운 것들로 어린 숙희에게는 제각각이 교실 뒷벽 환경정리판에 각각의 존재감을 뽐내던 친구들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우표가 새로 나오면 맨 먼저 집으로 가져와 자식들 앞에서 열심히 설명을 해주시곤 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있었고 역사적인 인물, 동식물,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있어 다름 아닌 작은 교과서 같았다. “우표는 내가 본 첫 번째 그림이었고 열심히 설명하던 아버지는 훌륭한 도슨트였어요” 변 관장의 회고다. 그뿐만 아니라 우표를 모으며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고민하게 되었고, 나중 일이지만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언젠가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모은 우표로 박물관도 설립하는, 두 분에 대한 부채의식까지 더해 막연한 꿈을 꾸어본 적도 있다.

체신청장으로 이미 30여 년 전에 정년을 맞이하신 아버지는 육십 넘은 딸에게 지금도 “우리 어메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도 배 위에 니를 올려놓고 그래 좋아 하셨데이” 말씀하신다. 왜 안 그랬겠는가? 늙은 장남에게서 느지막하게 얻은 손녀였으니…. 친구든 누구든 친해질 만하면 아버지는 전근을 가셨다. 부산전화국으로 가셨을 무렵, 해운대가 바로 보이던 곳에 집이 있었는데 근처에 외국인이 많이 살았다. 변숙희의 몸에 밴 배려심은 그때 배운 것이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던 그녀는 학교방송국 일을 했다. 그때 잠시 대구의 모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의 PD가 지금의 남편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졸업 후 본격적으로 방송 일을 하게 되어 클래식 음악, 어린이방송, 교양프로그램 등을 맡게 되었다. 그때 지방에는 TV국이 없어 라디오국이 선곡도 할 만큼 다양한 역할을 해야 했다.



변숙희 관장

대구 CBS에 있던 남편이 변숙희가 근무하고 있는 대구 KBS로 오게 되면서 그녀는 퇴사를 결정했고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시간이 많았던 변숙희는 대구 시내 모 백화점에 제법 매출이 좋은 명품 매장 몇 곳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모시고 살던 시부모님을 한 분씩 떠나보낼 무렵, 남편이 9시 뉴스 진행을 맡으면서 코디네이터 역할까지 하였다.

문화부 기자를 오래 했던 남편은 평소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다. 변숙희 또한 노후에 예쁜 전원주택에서 컬렉션한 그림이나 감상하며 음악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넓은 잔디밭을 거닐며 지내려했었다. 처음에는 팔공산 자락의 1,000여 평 복숭아밭에 미술관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고심 끝에 일단 폐교를 임대하기로 했다. 반쪽은 남편 친구가 카메라박물관을 하고 변숙희 부부는 미술관을 해보기로 했다.

두어 달 동안 주말만 되면 두 가족은 소풍처럼 부푼 마음으로 폐교를 보러 돌아다녔다. 한번은 목조건물의 폐교 한 곳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찜 해놓고 왔더니 오갈 곳 없던 노숙자들에 의해 화재로 소실된 적도 있었다. 적지 않은 갈등과 고민 끝에 지금의 폐교를 선택하고 리모델링을 하였다. 예산이 얼마가 들든 비워주게 되면 공사했던 부분은 기부채납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공공자산 임대에 관한 법은 그랬다. 어쩔수 없이 전시장 요건은 갖추어야 했기에 공사는 계속됐고 예상보다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었다.

설상가상, 박물관을 같이하기로 했던 친구는 부도를 내고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기에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건물은 손을 댈 만큼 댔고 미술관을 위해 다른 일도 상당 부분 정리한 후였다.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일방통로였다. 이에 더해 임대한 폐교 수리와 교육청의 제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궁여지책 끝에 학교를 포함해 7,000여 평이나 되는 부지를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운동장 한가운데에 수도 없이 박혀 빛나던 밤하늘의 별들은 변숙희에게 낭만의 대상이 아니었다. 퇴근 후면 지친 몸으로 달려와 못과 망치를 손수 들곤 하던 남편은 점점 힘들어 망연자실해 있던 아내의 어깨를 감싸주곤 했다. 그것이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전시의 지역적 한계, 생각 이상으로 많이 드는 운영비 등은 그저 주저앉고 싶게 했다.


자랑스런박물관인상 시상식, 2012
왼쪽부터 노준의 토탈미술관장, 박미정 환기미술관장, 변숙희 관장, 박선주 영은미술관장


어느 날 하버드대에서 박사논문을 쓴다는 한 대학원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순간 변숙희는 자신도 모르게 “최악의 환경을 최대의 장점으로 활용할 거다”라는 답을 말하고 말았다. 그렇다. 그것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일정한 전시수준은 유지했고, 홍보를 위해 주목할만한 공연과 이슈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언론에 제공했다. 지역사회와 문화예술계에는 미술관의 역할과 필요성을 끊임없이 알렸
다.

당시만 해도 미술관에 대한 이해는 낮고, 외지인에는 폐쇄적이라 입주 자체를 크게 반대했던 마을주민들에게 개관 직후부터는 공생을 위해 ‘마을미술프로젝트’와 ‘문화마을 조성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등 주민과 소통하고 지역발전을 창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으며, 끊임없이 설득했고 미술관으로 초대해 갖은 정성을 다 들였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마을 전체가 지붕 없는 미술관이고 마을 주민들은 기획자이며 도슨트가 되었다. 마을부녀회가 중심이 되어 사회적 기업이 만들어졌고 미술관의 담을 없애 주민과 하나가 되었으며 생동하는 예술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술의 사회 환원이며 상생의 소통으로 미술관이 지역에서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되었다. 변숙희 관장 부부에게 미술관은 아직도 어려운 대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헤쳐나갈 우군이 있어 
분명히 두려움은 사라졌다. 스트레스로 생긴 그녀의 암도 지금은 소통하는 예술, 지붕과 담이 없는 미술관에서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어 ‘푸르다’의 ‘cyan’과 ‘아름다움을 편안하게 본다’의 ‘視安’처럼 말이다


- 변숙희(1955- ) 영남대 국문학 전공. 홍익대 미술사과정 미술행정 및 시각예술 수료. (사)경상북도박물관협의회장, (사)한국사립미술관협회 부회장, (사)한국박물관협회 이사,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 해양수산부포항지방해양항만청박물관 운영위원, 미래경북전략위원회 위원, 경북문화융성사업단 위원, 경북 예술인포럼 미술분과위원,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특별기획전시 ‘민중의 삶 그 파노라마’ 기획단장(200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심사 및 운영위원(2008-10),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2010), 자랑스런 박물관인상(2012) 수상. 국립등대박물관 감성체험학습 심의위원, 경상북도 건축물미술작품심의위원(2012-13). 문화의 달 추진자문위원(2015), 경상북도문화상심사(2015) 및 중구 쥬얼리타운 운영위원 등 역임. 현 시안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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