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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무대미술가 이병복씨의 이별 굿

정중헌

올해 팔순의 무대미술가 이병복씨는 요즘 손길이 바쁘면서도 마음 한편이 저리다. 자신이 이끌어온 극단 자유극장이 올해 창단 40주년을 맞아 그간 작업해온 무대의상과 장치, 인형과 가면들을 모아 기념전을 준비 중인데 전시가 끝나면 자식처럼 아껴온 분신들을 떠나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전시 주제도 ‘이병복 없다’이다. 7년 전에 그는 옷이 움직이고 소품이 주인공이 된 무대를 만들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없애려 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전시장으로 꾸미고 있는 경기도 금곡의 무의자(無依子)박물관으로 찾아가자 그는 고려장(高麗葬) 얘기부터 꺼냈다. 40년간 작업해온 무대미술 작품이 수천 점에 달하는데 더 이상 보관할 길이 막막해 고려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간 이곳 저곳에 나눠 보관한 작품 상당수가 썩거나 유실됐다며 지금 남아 있는 작품도 혼자 관리할 여력이 없어 이별 굿을 해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갤러리뿐 아니라 여러 채의 한옥 공간을 빼곡히 채울 전시작품들은 그 자체가 한국 무대미술 역사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크고 품목도 다양하다. 손수 바느질해 지었다는 실물 크기 10배의 삼배 제의(祭儀)와 대형 차일, 국제 무대에서 수상한 종이옷 등 귀한 자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노예술가는 개인이 껴안기는 역부족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렇다고 마땅히 기증할 곳도 없고, 또 기증해도 관리가 쉽지 않은 자료라는 것이다.


외국에는 연극관계 자료나 무대미술품을 소장한 박물관이 있고, 선배들의 연극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추모공간이 있다. 그런데 연극사 100년이 되어가는 한국에는 역사를 증거할 곳이 없다. 연극계 일부에서 연극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당국은 본체만체 하고 있다.


오죽하면 예술원 회원인 무대미술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는 퍼포먼스를 벌이려고 할까. 우리 예술계는 그간 양적인 팽창은 이뤘지만 구석구석 빈 곳이 너무 많다. 특히 평생을 예술에 헌신해온 원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정부가 말로는 예술육성을 외치면서 이들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린 값진 결실들은 팽개치다시피 하고 있다.


이병복씨는 1966년 연출가 김정옥씨와 함께 자유극장을 창단해 40년을 쉼 없이 색깔 있는 연극작업을 해왔다. 공연환경이 열악하던 60년대에 명동에 카페 테아트르 소극장을 연 것도 그였다. 차 마시며 살롱극을 보던 그 추억의 명소 일부가 이번 전시회장에 재현된다.


또한 그는 전통극의 현대적 수용과 한국적인 정서의 세계화에 주력해왔다. 불모나 다름없던 무대미술을 개척해 장치 위주의 정적인 무대를 전환이 빠르고 소품들이 움직이는 기동성 있는 무대로 전환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이씨는 서양화가인 남편 권옥연씨와 옛것의 수집과 보전에 열정을 쏟아왔다. 새마을운동으로 사라지던 고가(古家)를 옮겨 선인들의 민속사를 볼 수 있게 꾸민 곳이 무의자박물관이다. 그러나 이 역시 노예술가 부부가 관리하기에는 한계점에 다다랐으나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극장의 이병복·김정옥 콤비는 전후(戰後) 척박한 이 땅에 예술의 싹을 심어 꽃을 피워낸 주역들이다. 그들 세대의 40년 노고가 오늘의 한국문화를 이만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그런데 이씨처럼 작품을 고려장하고 자신의 존재마저 지우고자 하는 예술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출처-2006.5.9 조선일보 [태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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