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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용감했던 파격' 그를 가져서 행복했다

오광수


백남준은 이미 수학기부터 국제인 내지는 세계인으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일본 도쿄대학 미학부에서 음악미학을 수학한 후 독일로 진출하였고, 60년대 이후는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명성은 독일 체류 중 서서히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예술계에 알려졌고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부동(不動)의 것이 되었다. 초기의 백남준은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는 해프닝 등 주로 음악을 통한 퍼포먼스로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비디오의 실험을 거치면서 점차 비디오 작가로서의 자기세계를 확고히 다졌다.

비디오 예술이 하나의 장르로 등장하는 데 미친 백남준의 영향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비디오 아트는 그 혼자만의 창안은 아니라 해도 그것을 현대예술의 가장 독보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린 점에서는 단연 제 1인자로서의 명성을 누리기에 충분하다.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은 몇 개의 시대로 그 변화를 점검할 수 있다. 초기에는 화상(畵像)을 일그러뜨리는 영상의 조작에 치중했다면 중기에는 비디오 조각 또는 비디오 설치라고 할 수 있는 입체구조물에로 나아갔고 나중에는 영상·입체·평면을 아우르는 종합의 경지에 이르렀다. 실지로 그는 비디오뿐만 아니라, 회화·판화에도 적지 않은 양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백남준 하면 누구나 비디오 예술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의 활동 범주는 종합의 예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폭넓은 것이었으며, 종국에는 예술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제시하는 선구자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오늘날 영상의 예술이 누리는 다양한 범주는 그에게 빚진 바 적지 않다.


그의 예술 중심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예술관념을 타파하는 데 있었다. 그는 요제프 보이스와도 친밀한 관계를 지녔으며 ‘플럭서스 그룹’의 주요 멤버로서의 활동도 간과할 수 없다. 보이스와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해 한국의 무속(巫俗)과 한바탕 굿을 할 계획이었으나 갑작스런 보이스의 죽음으로 이 계획은 백남준의 보이스에 바치는 진혼(鎭魂)의 퍼포먼스가 되었다.


백남준은 국제인 또는 세계인으로서의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또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강하게 소유한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회귀(回歸)로서의 한국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세계인의 모델을 보여준 예로써 백남준을 따를 만한 이가 없다. 우리가 백남준을 갖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조선일보 2006.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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