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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와 현대 수묵화운동

오광수

(이 원고는 지난 2005년 6월 이화여대 박물관 창립 70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시간을 넘어선 울림- 잔통과 현대>전을 기해 열린 심포지엄 <한국 근, 현대미술에서의 전통의 문제>에서 발표되었던 것을 수정 보완 것이다)

1.
단색화와 현대수묵화운동은 장르와 작가와 연령층을 달리한 운동이다. 단색화는 서양화분야에서 주로 50년대 이후 모더니즘을 지향하던 일군의 중진, 중견작가들에 의해 추진되었다면, 수묵화운동은 한국화분야에서 몇몇 중견작가를 제외하면 주로 신진작가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두 운동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는다면 단색화와 수묵화가 다같이 절제된 색채에 의한 표현이란 점과 그것이 단순한 색채의 개념을 떠나 우리 고유한 정서의 문제 내지는 정신의 항상성에 귀속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2.
단색화 또는 백색화라는 명칭이 보편적인 사용범주를 넓혀가던 시기가 70년대 후반 경이며 그 가장 구체적인 발신은 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전시는 동경화랑과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에 의해 기획된 전시로 어느 특정한 경향을 집중적으로 보여줄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이 전시를 전후로 해서 한국작가들의 전시가 산발적으로 동경의 여러 화랑에서 열리긴 했으나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어느 특정한 관심이 부각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한국화단의 사정은 밖으로 향했던 실험의 열기가 다소 가라않고 자기정비를 서둘고 있을 무렵에 해당된다.

AG(한국아방갸르드협회)그룹이 74년 서울비엔날레를 열고는 자동해체되고 곧 이어 에콜 드 서울이 등장되고 있을 시기이다. AG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밖으로 향했던 미술의 실험들이 정비되고 안으로 향한 자기심화의 양상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자가 확산의 논리에 서 있었다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환원의 논리를 표방했다고 할 수 있다.

에콜 드 서울은 일정한 멤버로 구성되는 일반적 단체가 아니라 매년 작가들을 초대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물론, 몇몇 중심체가 있어 이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긴 하나 종래의 타성적인 그룹형식을 지양하려는 의도를 들어내었다. 단색화 또는 백색화라는 경향의 작가들만을 의도적으로 초대한 것인지 아니면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공감대가 작용한 것인지는 알길 없으나 에콜 드 서울에 초대된 대부분의 작가들이 단색주조를 이루고 있었음은 사실이었다.

AG그룹이 강한 엘리트의식을 들어내었듯이 에콜 드 서울의 작가들도 자신들이 한 시대의 의식과 한 시대의 미술을 이끌어나간다는 자부심을 표방하고 있었다. 하나의 중심이 생기면 많은 주변이 형성되듯이 이 때도 에콜 드 서울을 중심으로 한 단색화가 일종의 보편적인 미의식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에 적지 않은 일본인 미술인들의 서울 출입이 자자들고 있었다.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고 양국간의 문화교류에 대한 관심이 부상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인 화상이나 논객들에게 단색화가 대상이 될 수 있었지 않았는가 본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단색화는 우리내부에서보다는 일본이란 타자에 의해 발견되고 고무된 느낌이 없지 않다. 다섯 개의 흰색전이 열린 이후 80년대 중반 경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가장 줄기차게 열리었던 것이 단색화를 중심으로 한 전시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77년 동경 센트랄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권영우, 김구림, 김용익, 김진석, 박서보, 박장년, 서승원, 심문섭, 윤형근, 이강소, 이동엽, 이상남, 이승조, 진옥선, 최병소, 김기린, 김창열, 곽인식, 이우환) 전과 81년의 <한국현대미술 70년대 후반의 한 양상>전은 그 대표적인 전시다. 이들 전시에는 몇몇 예외적인 작가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단색경향의 작가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 전시를 일본에 기획 또는 유치하는 데 앞장섰던 나카하라 유스케는 그 내역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이웃 나라이면서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현대미술의 동향을 소개한다는 것이기도 하나 근 수 년이래 한국의 일군의 미술가들의 작업이 유럽, 미국, 일본 등을 포함한 현대미술의 전개와 대조하여 극히 흥미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 동기의 근본이다.'(1)

단색화는 70년대 국제적인 기류로서의 개념예술 또는 미니멀리즘과 일정한 정신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내면성을 추구해갈려는 정신적 자각현상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국제적인 한 시대 정신의 견인상태로서의 보편성지향과 아울러 우리 고유의 정서의 추구란 두 측면을 아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70년대의 미술은 개념예술 또는 미니멀리즘으로 대변되는 사유의 예술로 특징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손의 상실>이란 그리지 않는 사유의 진행에서 파생된 관념이다. 단색으로 메우기, 그린 것의 지우기 같은 현상은 미니멀리즘의 일반적 현상으로 한국의 단색화에서도 그 공통성은 발견된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단색화는 미니멀리즘의 한국적 변주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서적 내연성을 추구해갈려는 점에서 한국의 단색화는 특정한 외양을 갖추게 되는 데 단색파 또는 백색파로 호칭되는 특정한 유파개념을 지니는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희색>전을 기획한 나카하라 유스케는 그 서문에서 “색채에 대한 관심의 한 표명으로서의 반 색채주의가 아니라 그들이 회화에 대한 관심을 색채이외의 것에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표명한 바 있다. 그러니까 다섯 개의 희색이란 기실 색채가 아니란 의미다. 색채가 아닐 경우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일은 이를 두고 내재적 모노크롬이라고 명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저네들의 모노크롬이 물질로서의 색채, 또는 질감으로서의 색채개념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단색화 함으로써 일종의 관념적인 단색으로 환원됐다면, 우리작가들의 경우, 그것은 애초부터 물질성을 떠난 내재적 모노크롬이다. 바꾸어 말해서 색채가 그들에게 있어 물질화된 공간을 의미한다면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정신적 공간을 의미한다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2) 필자는 이 같은 독특한 한국미술에 나타나는 현상을 “구조로서의 평면(평면주의)과 정서로서의 모노톤(단색주위)”이라고 표명하면서 “이 구조와 정서에서 똑같이 검출되는 것이 다름 아닌 비물질”(3)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또한 이를 서구의 비물질적 경향과 대비해서 설명한 바 있다. '전후의 서구 미술에서도 비물질화 현상은 몇몇 뛰어난 작가들에서 발견될 뿐 아니라 일련의 미니멀리스트나 컨셉추얼 아티스트들 가운데서도 검출된다. 그러나, 이들의 비물질화 현상이 70년대 한국미술에 나타난 비물질화 현상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차원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물질을 통해 비물질화의 단계에 이르는 몇몇 예를 들어보자. 김기린은 캔버스 바탕에 일정한 모노크롬을 시술하는 데 그 과정이 수십 번에 이르면서 안료가 지녔던 본래의 물질성이 서서히 탈락되면서 부유하는 중성의 공간에 도달하고 있다. 최병소는 같은 방법이긴 하나 전혀 다른 결과에 도달하고 있다. 그는 검게 칠한 신문지 위를 수십 번에 걸친 연필선의 반복으로 종내는 신문지인지 신문지가 아닌지 알아볼 수 없을 단계에까지 이르면서 신문지란 고유한 물질성을 초극하고 독특한 중성의 공간에 이르고 있다. 그런가하면 심문섭은 무지의 캔버스의 한 모퉁이를 페이퍼로 계속 문질러가면서 캔버스가 지닌 물질성을 지워나가는 독특한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동엽은 화면에 그려진 이미지를 서서히 안으로 소멸시켜감으로써 바탕과 그린다는 관계를 무화시켜 버리는 독특한 중성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이 같은 방법은 허황의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의 화면에는 무언가 그려진 것 같으면서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희부연 것이 남아난다.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이 중성의 공간은 물질이면서 물질을 탈각시켜갈려는 의지를 동반한 것이다. 캔버스의 천이 천으로서 다시 그려짐으로서 바탕과 그리기를 일체화 시켜 가는 박장년이나 신성희의 방법은 평면에 대한 자각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이 되었다. 약간 방법은 다르지만 김창렬의 물방울 역시 바탕 속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독특한 구조화에서 역시 비물질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서보는 단색의 바탕 위에 반복되는 선획으로 신체와 화면과의 거리를 지워나감으로서 역시 미묘한 중성의 공간에 도달되고 있는 또 다른 방법을 들어내고 있다. 평면의 구조화에 따른 비물질적 속성의 자각은 정상화, 김홍석, 윤명로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작품에 나타나는 요소는 비단 비물질적 속성만이 아니라 표현의 거부, 행위의 순수성의 제고, 평면구조에 대한 환원의식 같은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다. 어쩌면 이러한 여러 속성들이 비물질화에 이르는 내재적 차원으로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단색화가 80년대로 이어지면서 또 다른 발전의 맥락을 형성하는데 다름 아닌 한지의 발견과 그것의 적극적인 조형화이다. 한지의 발견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매재의 발견인가, 아니면 또 다른 내연을 지니는 것인가. 한지가 현대작가들에게 관심을 일으킨 것은 82년 <종이의 조형, 한국과 일본>전(국립현대미술관)이 구체적인 촉매가 되었다. 같은 무렵 미니멀리즘이 퇴조하고 다시 그린다는 자각의식이 대두되고 있을 무렵이다. 한지의 발견은 그리기의 바탕으로서 먼저 수용되었고 이어 한지가 지닌 고유한 정서의 내면을 발견해 가는 순으로 진행되었다. 한 동안 <워커 온 페이퍼>전이란 기획전들이 있었는데 페이퍼란 다름 아닌 한지를 지칭한 것이었다. 한지 위에 그린다는 행위가 점차 한지가 지닌 고유한 속성을 되돌려주자는 환원의식을 유발시켰는데 그것은 곧 우리고유한 정서가 한지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의 또 다른 발견으로 연계되었다. 한국인들은 한지로 에워 쌓인 공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일상으로 대하는 한지는 단순한 사물이기보다는 일종의 신체성으로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작품이란 매체에 왔을 땐 단순한 바탕으로서의 지지체가 아니라 표면으로서의 자립성을 지님으로써 우리 고유의 정감에 바로 유감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 한지가 지닌 질료가 안료의 비물질화를 지향한 일련의 작업과 미묘하게 겹치면서 사용도가 빈번해졌다. 캔버스 위에 한지를 바르고 이 위에 색채를 가하는가 하면 한지를 캔버스 대용으로 원용하기도 하였다. 한지의 섬유질을 조형의 적극적인 표현의 질료로서 적응시킨 경우나 한지를 만드는 원액을 고스란히 조형화의 직접적인 단계로 끌어들이기도 하였다. 정창섭은 그 대표적인 예다.한지작가협회가 출범한 것도 이 무렵이다. 협회에 속한 작가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 밖의 작가들에서도 한지의 사용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3.
수묵화운동은 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현대수묵화>전이 촉매가 되면서 주로 80년대 전반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형식상으론 90년대 초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긴 하지만 그 열기는 대체로 80년대 전반에 집중된다고 할 수 있다. 수묵화운동은 70년대 중반 경부터 문화일반에 고양되고 있었던 우리 것에 대한 재발견이란 시대적 요청과도 일정한 연계를 가진 것이자 서양화의 모더니즘경향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한국적 정서의 조형적 접근이란 사안과도 맥락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수묵화운동은 홍대란 특정한 미술대학 출신들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특수성을 먼저 짚어볼 수 있다. 물론 수묵을 구사한 작가 층이 적지 않지만 운동권에 속했던 것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곤 홍대 출신 일색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한국화영역의 전체 미술가들에 호응을 받지 못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수묵화운동의 특징은 몇몇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릴레이식의 지속적인 전시기획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처럼 지속적이요 연계적인 기획전이 이어졌다는 것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수한 것이었다. 그 주요한 전시만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81년 <수묵의 4인전>(김호석, 송수남, 신산옥, 이철량) 동산방
81년 <동양화 4인전>(김송열, 박윤서, 신산옥, 이철량) 아랍미술관
82년 <일곱작가의 수묵전>(김식, 박윤서, 박인현, 신산옥, 신정주, 이철량, 홍순주) 그로리치
82년 <묵 그리고 점과 선>(이양우, 이윤호, 주우진, 홍석창, 백인현, 송수남 등 56명) 관훈미술관
82년 <오늘의 수묵전>(김식, 박윤서, 박인현, 성종학, 송수남, 신산옥, 이윤호, 이철량, 홍석창, 홍용선) 송원화랑
83년 <수묵의 표정을 찾아서>(홍순주, 김영리, 박윤서, 이윤호, 김식, 신산옥, 이철량, 박인현) 관훈미술관
83년 <수묵의 형상전>(김식, 김영리, 김호석, 박윤서, 박인현, 송수남, 신산옥, 안성금, 이선우, 이양우, 이윤호, 이철량, 임효, 홍석창) 관훈미술관
84년 <한국현대수묵전>(문봉선, 강행원, 박윤서, 박인현, 송수남, 신산옥, 안성금, 이양우, 이철량, 홍석창, 홍용선) 미술회관
85년 <현대수묵의 방향전>(강선학, 김미순, 김미희, 박인현, 송수남, 신산옥, 윤선미, 이민한, 이양우, 이철량, 함진홍, 홍석창, 홍용선) 사인화랑
86년 <아홉 사람의 먹그림>(김미순, 박인현, 성선옥, 송수남, 신산옥, 이양우, 이철량, 홍석창, 홍용선) 후화랑
86년 <지묵의 조형전>(강미선, 김미순, 박인현, 성선옥, 송수남, 신산옥, 윤여환, 이경수, 이철량, 홍석창, 홍용선) 관훈미술관
이상은 주로 80년대 전반에 걸친 기획전의 내역이다.

수묵화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은 긍정과 부정의 양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대체로 한국화영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고무적으로 받아들이는가하면 운동권 밖 일부에서는 퍽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수묵화운동이란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견해 역시 그 중의 하나다. 하나의 매재를 두고 운동이란 특정한 조형이념을 부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것이다. 수묵화운동이 가능하다면 유채화운동도 가능하고 수채화운동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수묵화란 매재에 의해 분류되는 한 장르이기 때문에 이에 특정한 사조로서의 운동에 적용한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매재 개념에 특정한 사조나 경향의 추진으로서 운동이란 말이 사용된다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견해에는 그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묵화운동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는 것은 수묵화를 단순한 매재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수묵화가 일반 다른 매재와 동격으로 볼 것이 아니라 특수한 영역으로 보아야한다는 전제가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수묵이 매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다. 물과 먹으로 이루어지는 안료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를 일반적 안료의 보편적 층위에 놓고 보지 않을려는 데서 특수한 사정이 생겨나고 이 사정에 동의하는 한에서 수묵화운동이란 말의 근거가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니까, 수묵화운동이란 어떤 이들에게는 어불성설의 잘못된 개념으로 비치는가 하면, 어떤 이들에겐 독특한 인식의 바탕에서 그 성립이 가능하다.

수묵화운동의 중심작가들에 의한 수묵의 인식을 점검해보자. “오늘날 수묵에 대한 집중된 관심이란 결국 수묵화에 대한 새로운 신뢰감의 회복과 동양적 사유 구조에 대한 자존심의 확립이라는 오늘의 젊은 작가들의 자기성찰로부터 연유되어졌다. 그것은 수묵이 단순한 지난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현대정신을 충분히 수용해줄 수 있는 지금도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생명력이라고 믿는 때문이다...........이러한 작업과정의 반복을 통하여 수묵의 현대적 실존의 가능성과 그 새로운 정신성의 수용이 점쳐질 수 있다면 우리의 줄기찬 의욕들은 아직은 젊고 값진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해본다”(4) 이들의 표명에도 수묵이 단순한 질료개념 너머의 세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 다른 수묵기획전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한한 실험과 수묵에 대한 지향적인 창조정신을 가지고 살아 숨쉬는 현대의 정신을 포용하면서 수용할 수 있는 작업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필연성에 도달케 된다. 실상 이러한 실험의지는 수묵에 있어 그리 간단한 문제로 보여짖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수묵이 그 자체로서 회화의 시작이고 완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묵의 정신적 세계관을 우주로 통해서 더욱 발전 확대되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현대수묵은 실현되어져야할 것이다.(5) 이 대목에서도 수묵화운동이 정신적인 자각현상과 연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묵화 운동에 참여한 멤버의 한 사람인 홍용선의 현대 수묵롸의 가능성은 이 운동이 갖는 절실성과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해주고 있다. ”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엇 수묵이란 단순한 과거의 소박한 향수주의나 매재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이미 우리의 시대정신이자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서 존제해 왔음을 확인하게 되며 바로 그러한 수묵정신의 역사적 생명력이 오늘 우리의 삶의 지평을 현대적 폄차 속에서도 무한히 가능케 해 준다는 사실에 우리는 고무되고 있다. ............ 수묵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나 상징성, 그리고 그 자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신비한 자율성이나 생명력, 이른바 환원과 확장의 장 속에서 우리들의 의도하는 것은 바로 <수묵과 현대><수묵과 전통><수묵과 정신><수묵과 삶>이라는 <오늘>의 명제에 다름아니다.............“(6)
단색화와 마찬가지로 수묵화에 있어서도 먼저 직면하는 것은 수묵이란 안료의 일반적 매재 개념을 넘어 정서의 문제와 깊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 잠깐 서정주의 시 한편을 소개하겠다. <열대 엿 살 짜리 소년이 작약 꽃을 한아름 자전차 뒤에다 실어 끌고 이조의 낡은 먹 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연계 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옥색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의 창을 열고 꽃장수 일루 와요 불러도 통 못 알아듣고 꽃 사려 꽃 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 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 꽃 앞자리에 넹큼 올라타선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가오.>(서정주 <한양호일>전문) 이 시는 상당히 회화적인 요소를 내보이지만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조의 낡은 먹 기와집이란 대목이다. 이조의 낡은 이란 대목은 시간에 의해 걸러진 것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검은 기와집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먹빛이 검은 색과는 정서적으로 다르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시간을 경과하면서 바래진 것이란 의미가 들어있다. 생경한 색료가 시간을 통해 걸러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안료의 개념으로 취급할 수 없는 정서의 세계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묵이 단순한 매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수묵화운동이란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수묵이 갖는 총체적 의미는 오랜 문화의 한 결정체란 사실에 있다. 문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문방의 핵심에 수묵이 존재했다는 것은 수묵이 사상과 의식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따라서 수묵화운동은 수묵이 지니는 질료적 표현의 잠재태와 그것의 현대적 운용의 가능성을 넘어 먼저 우리의 정신사적 실체를 다시 추구해 가는 노고에 다름아니라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 운동을 통해 한국화영역이 전에 없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외형적인 성과를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화의 중심이 수묵이란 인식을 더욱 확고히 했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수묵이 갖는 정신성, 그 오랜 내재성이 단 기간에 펼쳐진 운동의 형식으로 제대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고 대부분 신진 작가 층으로 이루어진 운동의 구성원이 수묵을 에워싼 깊은 내재성에 접근하기엔 애초에 한계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그럼에도 개별적으로 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조형적 성숙을 기한 작가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 성과라면 성과로 치부될 수 있을 것이다.



4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시점에 활발히 전개된 단색파와 80년대 초두에서 약 10년간의 시간을 두고 펼쳐진 수묵화운동은 다같이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동시에 비물질성에 이르는 정서의 공감대를 발견한 것이다. 우리의 근대미술이 시작된 이래 우리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운동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또 한편 우리 미술 속에 유전되고 있는 특징적인 요소로서의 물질의 탈각현상이 이 두 운동에서 뚜렷하게 들어 났다는 점이다. 이는 오랜 이식문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과 그 방법을 추구하려는 자각운동으로 한국문화의 정체성 확립이란 보다 보편적인 지평을 열었다는 점과 우리 속에 내재한 독특한 정서의 단면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야 하지 않을까 본다.


(1) 나카하라 유스케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 미술수첩 1977, 9
(2) 이일 <현대미술의 시각> 미진사, 1988년 210페이지
(3)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의 미의식> 재원출판, 1995년, 64페이지
(4) <수묵의 현상전> 카다로그 1983
(5) 한국현대수묵전> 카다로그 1984
(6) 홍용선 <현대수묵화의 가능성> 현대수묵의 향방전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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