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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억이라 부르고 물감으로 쓴다

김정현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가?”, 우리 박물관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미술품도 도서도 아닌, 다양다수(多樣多數)의 미술자료이다. 따라서 위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짧은 시간 동안 자주 이루어지며, 제외한 것들에 대해 아쉬움이 언제나 가득하다. 선택이 미뤄지면 몇 달 안에 사무실에 발 디딜 공간이 없어진다. 실상 이런 업무처럼,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과거의 기억은 이 선택의 기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의 충격적인 경험에서 생성된 기억은 평생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선택의 순간마다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경험이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오롯이 개인적일 수 있을까.

  독일에서 문화학 연구를 진행한 얀 아스만은 기억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도구사용법과 같이 일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모방적 기억, 집과 마을 등 인간이 자신을 투영한 사물의 기억, 한 시대가 당대의 과거에 대하여 보유하는 소통적 기억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 세계를 전승하여 집단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문화적 기억. 총체적이고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역사는 상대적으로 고정된 개념이다. 이에 비해, 오늘날 기억은 단편적이고 주관적이지만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창작자와 연구자들에 의해 계속 호출되고 있다. 기억에 관한 개념 중 문화적 기억은 축제, 의식, 이미지 등 문화적 요소를 통해 기억이 집단에 각인된다는 작동 방식 규명으로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혀준다.


슈 자웨이, <정보국의 폐허> 스틸컷, 2015, 싱글채널비디오 13:30, 사진제공 : 슈 자웨이 스튜디오

  대만 출신 슈 자웨이(HSU Chiawei)의 <정보국의 폐허>는 문화적 기억을 소재로 한 창작 방식의 일면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힌두교 문화권에 널리 알려진 원숭이 장군 하누만 인형극이 공연되는 것을 비춘다. 천천히 움직이던 화면은 가면을 쓴 마을사람들과 군인들로 전환된다. 이어 스튜디오로 화면이 바뀌면서 내레이터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마지막에는 텅 빈 스튜디오에서 상영되는 영상만을 내보낸다. 이후 작가는 설명을 통해 가면을 쓴 사람들은 전 정보국 요원들, 내레이터는 정보국 책임자로 일했던 인물, 그리고 촬영된 장소가 특정 유적지라는 사실을 관람객에게 알린다. 숱한 역경을 헤치고 원만한 결말을 맞는 하누만과 정보국 요원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작가는 정보국 요원들의 우울한 상황과 심정을 관람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많은 동아시아 국가가 식민지, 근대화, 군사정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기억을 공유하기에 공감이 어렵지 않다. 작품의 중심인 서사 외에 다층적 의미를 지닌 소재 및 연출방식은 여러 해석을 파생해내는데, 이는 관람객이 상상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국내외의 동상과 기념행사 등을 둘러싼 논쟁을 색다르게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6·25전쟁 70주년 기념 ‘낯선 전쟁’(6.25-9.20)은 최근 고조되고 있는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으로 인해 더욱 주목할만하다. 전쟁과 그에 따른 사회현상을 재구성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여 새로운 문화적 요소로서 동시대 다양한 문맥과 연동해 우리 기억에 기존과 다른 의미를 덧대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개막이 연기되어, 온라인 공개가 먼저 이루어진 상태다. 많은 사람이 온·오프라인상에서 방문해 유의미한 논의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녕만, <실향민, 경기도 파주>, 1993.1.23

  아스만은 사회 변화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부정적인 것은 차가운 기억으로, 긍정적인 것은 뜨거운 기억으로 문화적 기억을 구분한다. 차가운 기억은 과거를 절대적인 가치로 상정하고 회귀만을 고집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곳곳에 내재한 문화적 기억을 응시하고, 그중 변화를 가져오는 뜨거운 기억을 조명하는 것이지 않을까? 여기서 함께 떠올리고 싶은 작품이 있다. 단단하게 감긴 눈과 입술, 철책을 움켜쥔 두 손, 그리고 화면 왼편의 여백으로 인물의 절제된 감정을 표현한 김녕만의 <실향민, 경기도 파주>다. 이 작품은 익명의 실향민이라는 피사체를 통해 전쟁과 분단이란 육중한 역사를 소환한다. 동시에 포착된 인물 표정과 움직임은 실패한 과거에 대한 성찰인 후회와 간절히 바라는 미래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뜨거운 기억’으로서 변화를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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