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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부엉이는 왜 밤에 우는가?

윤진섭




며칠 전, 제주문화재단이 주최한 학술세미나에 발제자로 참가했다. 이 세미나는 작고한 미술평론가 방근택(1929-92) 선생의 서거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마침 작년에 중견 미술사학자 양은희 박사가 『방근택 평전』을 펴냈는데, 내친김에 세미나까지 조직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발제자는 필자를 포함, 방근택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성과를 지닌 박파랑, 임창섭, 양은희 등 모두 네 명이었다.

고(故) 방근택은 1950년대 말에 한국미술계를 강타한 전위미술 운동인 ‘비정형 회화(앵포르멜)’의 이론적 기수였다. 부산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미술평론가가 되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양은희 박사가 쓴 『방근택 평전』에 소상히 나와 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방근택은 1950년 9월 육군종합학교 사관후보생 7기로 군에 입대, 1952년에 광주육군보병학교 통신학 교관으로 부임한다.
이때 방근택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인연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화가 박서보(1931- )와의 만남이었다. 1955년, ROTC 간부후보생 교육을 위해 마침 이 학교에 입교한 홍익대 미대 출신의 박서보와 이수헌을 교관 신분으로 만난 것이다. 비록 철학을 전공했지만 방근택은 당시 그림에 깊은 관심이 있어 광주 시내에 있는 미국공보원(USIS)에서 개인전을 연 적도 있었다. 그는 군대생활을 하는 틈틈이 미국공보원 도서관에서 빌린 미술 관련 책자를 섭렵하여 상당한 이론적 지식을 쌓았다. 그러니 이들 사이에 미술에 대한 대화가 오간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56년, 육군 대위로 제대한 방근택은 이듬해 초여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처남이 운영하는 범한영화사에 취직, 대본 번역과 필름 수입 통관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방근택의 회고에 의하면, 애초부터 미술평론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문예 관계의 학자나 비평가’가 돼 볼까 하고 명동에서 이어령을 만나는 등 진로 모색을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때 마침 안국동에서 이봉상미술연구소를 운영하던 박서보를 수소문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박서보는 방근택이 연합신문에 글을 쓰도록 주선했다. 이때 나온 방근택의 첫 글이 『조르주 루오의 생애와 예술』(1958년 2월)이란 15매짜리 원고였다. 그렇게 해서 다시 이어진 박서보와의 인연은 방근택이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과 친교를 맺고 ‘현대’전의 전평을 쓰는 등, 비정형 회화운동에 이론적으로 깊숙이 관여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사실 방근택은 비정형 회화운동이 시들해지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까지 이론적 중추로서 맹렬히 필봉을 휘둘렀다. 1963년에는 최순우, 이경성, 유근준, 석도륜, 김환기, 김영주, 김병기 등과 함께 한국미술평론인회 출범에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평단 활동에도 열성을 보였다. 특히 비정형 회화운동의 초기에 해당하는 “1958년부터 1959년까지 2년 동안에만 42개의 미술평을 신문 지상에 발표”(양은희, 방근택 평전)할 정도로 거의 독보적인 성과를 올렸다.
그런 방근택에게 불운이 닥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민족기록화전 필화사건(1967)과 반공법 위반 사건(1969)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후자는 미술평론가로서 방근택의 활동을 극히 제한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평문 집필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미술 관계 서적의 대필 번역을 하거나 문학지에 미술칼럼을 쓰는 등 미술 현장과는 동떨어진 굴욕적인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예리한 필봉을 통해 한 시대 미술의 지평을 개척한 방근택의 신산했던 삶을 오늘에 이르러 다시 조명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초창기 비정형 회화운동의 주역들이 거의 다 세상을 뜬 지금, 몇 명 남지 않은 원로들은 ‘단색화의 대가’가 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명예와 부(富), 장수(長壽) 등 축복의 삼박자 햇빛이 따뜻이 이들을 비추고 있는데, 우리 모두 한 번쯤은 그늘진 응달에도 눈길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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