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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김병기의 사라토가 시절: 제자 퀜틴 모즐리와 <메타모포즈>

양은희

한국사의 굴곡 속에서도 평양, 도쿄, 서울, 상파울루, 뉴욕, 로스엔젤레스 등 여러 도시를 거쳐 가며 현대예술의 정신을 지킨 김병기가 지난 3월 1일 사망했다. 1930년대 도쿄에서 유럽 현대미술을 공부했고 북한을 탈출하여 공산주의 비판에 앞장섰으며 1950-60년대 힘든 시기에도 창작과 미술비평을 통해 현대미술을 옹호했던 작가이다.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 커미셔너로 참석했다가 김환기처럼 미국으로 갔고 이후 1980년대 중반 한국에 재등장하기까지 뉴욕주 사라토가 스프링스(Saratoga Springs)에서 살며 냉전 시대 한국 출신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업을 고민했던 작가를 추모해본다.

필자는 2003년 10월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전시 ‘At the Crossroad’(2003.10.30-11.29)에 참가한 김병기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이중섭이 내 친구입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네며 역사 속 인물을 소환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날 그와 그 주변의 뉴욕 작가들을 보며 이들이 왜 여기 왔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2012-13년경 뉴욕 이주 작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고 김병기의 사라토가 시절 가까이 지낸 김옥지 작가, 그리고 사라토가에서 김병기에게 미술을 배웠던 제자 퀜틴 모즐리(Quentin MOSELEY)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김병기, 메타모포즈, 1965. 소장: 퀜틴 모즐리 ⓒ사진 양은희


1965년 가을 김병기는 스키드모어대학(Skidmore College)의 음악과 교수로 있던 처제 부부의 도움으로 사라토가 스프링스에 정착한 후 미술 교습, 건축이나 의학 관련 드로잉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때 같은 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있던 에드윈 모즐리(Edwin M. MOSELEY)와 친하게 지내는데 아마도 동년배 지식인들이어서 대화가 잘 통했던 것 같다. 모즐리 교수는 필립 거스통(Philip GUSTON) 등 예술가와 어울리곤 했기에 새로 이주한 김병기에게도 호감을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희망과 달리 영문학 전공을 거부한 아들 퀜틴의 미술 교육을 김병기에게 맡긴다.

대학을 중퇴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퀜틴은 미술을 배우고 싶었는데 그의 재능을 확인하고 싶던 부친의 요청으로 김병기는 두 달 정도 그를 가르친다. 퀜틴의 기억에 따르면 김병기의 작업실에 가면 소의 해골 드로잉 등과 그림, 그리고 막사발 같은 도자기들이 있었고 1800년 이후 미술사, 특히 인상파와 폴 세잔에 대해 많이 가르쳤다고 한다. 둘은 버스를 타고 뉴욕 맨해튼의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본 후 한국 식당에 들러 김병기의 한국친구들과 같이 저녁을 먹기도 했다.

이후 퀜틴은 시러큐스미술대학에 진학했고 1974년부터 메릴랜드미술대학(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에서 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한다. 대학 재학 중에도 방학 때 집에 오면 인근 김병기의 집을 찾았고 그가 내놓은 한국 소주를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퀜틴은 김병기를 ‘나에게 술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고 했다. 이 둘의 관계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김병기가 한국을 오가면서 소원해졌다.



작품 뒷면의 김병기 서명 ⓒ사진 양은희


퀜틴은 1978년 부친이 갑자기 사망하자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부친이 소장하던 김병기의 <Metamorphose(탈피)>(1965)를 얻게 된다. 이 그림은 괴로웠던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듯 ‘탈피’라는 제목 아래 갈색 톤 사이로 거친 자국들을 보여준다. 필자는 2013년 로스엔젤레스에 있던 김병기와 통화하며 이 그림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드라마틱한 일’이라며 자신의 기억력이 더 사라지기 전에 필자와 만나고 싶다고 했으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시공간이 교차하지 못했다.


- 양은희(1965- ) 뉴욕시립대 미술사 박사. 현대미술의 전지구화 현상, 비엔날레 등 연구.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키메이커, 2017), 『뉴욕, 아트 앤 더 시티』(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 2010) 지음. 『개념미술』(2007),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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