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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② 새로운 소식만이 깰 수 있는 의구심 : 요리스 라만의 작업을 중심으로

전종현



2021 ②
새로운 소식만이 깰 수 있는 의구심 : 요리스 라만의 작업을 중심으로 




전종현 |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어떤 전시에 대한 기억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정신을 강렬히 사로잡을 때가 있다. 지난 2018년 국제갤러리에서의 한 전시가 그랬다. 5월 10일부터 6월 17일까지 열렸던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요리스 라만Joris Laarman의 개인전인 《요리스 라만 랩: Gradients》는 갑작스레 몰려온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다.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기자 간담회에 참석해 마주한 그의 작업은 첫눈에도 미래적이었다. 특히 전시된 작품 중 상당수가 2014년 작업이라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14년, 《월간 디자인》 2월호 특집으로 3D 프린팅을 준비하며 근 몇 년간 출현했던 3D 프린팅 작업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할 때가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무척 힘들다고 알고 있던 금속 프린팅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요리스 라만의 능력에 탄복한 것이다. 요리스 라만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움은 3D 프린팅만이 아니었다. 건축 분야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파라메트릭 디자인과 제너레이티브 디자인 메소드가 그의 다양한 의자 디자인 프로세스에 활용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굉장히 최신의 기술과 미감을 가진 동시대적, 혹은 미래지향적 창작자의 작품들이 굉장히 좋은 타이밍에 서울에서 선보였던 격이었고, 그날 이후 요리스 라만에 대한 관심은 늘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글을 계속 쓸 때마다 요리스 라만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신기하게도 2018년 서울에서의 전시회 이후 그의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디자인붐》, 《디진》 등 디자인과 건축을 다루는 글로벌 온라인 미디어에서 한 번쯤 다룰 만도 한데, 이상할 정도의 침묵이었다. 특히 그가 열정적으로 진행하던 암스테르담 운하의 교량 프로젝트는 굉장한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기에 더욱 기묘했다. 하지만 2019년 말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팬데믹으로 모두의 일상이 바뀌었고, 모든 관심은 팬데믹 상황에 대한 조치와 포스트 팬데믹에 대한 준비로 이동했다. 이를테면, 기괴할 정도로 다양하게 고안되는 팬데믹용 기능성 디자인이라든지, 오랜 기간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던 주거 공간의 재발견이라든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생기는 갖가지 문제들과 그에 수반하는 하드웨어, 즉 가구와 인테리어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들 말이다. 그러다 비평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3D 프린팅 업계의 소식을 건축, 디자인, 예술, 공예의 범위에서 찾아보다가 마침내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2018년 요리스 라만이 호기롭게 말하던 세계 최초의 금속 3D 프린팅 교량이 2021년 여름 드디어 운하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3년 동안의 놀라운 성취가 기대되어 요리스 라만의 공식 홈페이지를 접속했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다. 포트폴리오에 2017년 이후 새롭게 시도된 작업이 단 한 점도 없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 레드라이트 구역에 설치한 〈MX3D 브릿지〉가 유일하고도 최신의 소식이었다. 서울에서의 전시회를 통해 그에 대한 빛나는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던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매년 열성적으로 커리어를 쌓던 그가 아니던가. 동시에 이런 생각도 스멀거렸다. 내가 요리스 라만에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역사적인 작업으로 남은 〈본 체어Bone Chair〉의 주인공이자 미적으로 섬세하며 논리가 단단한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작업을 하는 젊은 거장이라는 껍데기 말고 그의 작업에 대해 세심하게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공부를 하기 위해, 그리고 그와 연락이 닿아 그동안의 침묵을 알고 싶어 비평의 소재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옛적에 보낸 메일은 답장이 없었고, 구글에서의 검색 결과 또한 생각 외로 너무도 빈약했다. 어쩌면 나는 2018년 그 빛나는 인상으로 계속 그를 오독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디지털 공예의 선구자, 자연의 섭리를 끌어와 자기 작업의 논리로 쓰는 탐구자로 각인된 그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강해졌다. 실제 리서치를 계속하며 조금씩 내 머릿속의 이미지와 충돌하는 부분이 생기곤 했고, 작업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파고들수록 모르던 사실이 나오며 놀라움과 새로움, 그리고 의구심과 당혹감이 내 뇌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에 요리스 라만이라는 창작자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루어볼 가치가 있다고 확신이 들어, 이렇게 글의 시작을 풀어본다.





요리스 라만은 1979년 네덜란드의 시골 마을인 보르퀼로에서 태어났다. 당시 더치 디자인의 조류를 만들고 있던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Design Academy Eindhoven에서 수학했다. 그는 2003년 졸업 논문으로 「기능성의 재창안Reinventing Functionality」을 제출했는데, 그 안에 포함되었던 프로젝트 중 하나가 〈로코코 라디에이터Rococo radiator〉였다. 라디에이터의 복사 기능을 최대화하기 위해 장식적인 컬이 도움이 된다는 점을 깨닫고 기능성과 장식성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대척점의 편견을 넘긴 로코코 라디에이터로 그는 2004년 영국의 라이프스타일 잡지 《월페이퍼*》가 선정하는 ‘올해의 젊은 디자이너’상을 받으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2004년 필름메이커이자 파트너인 아니타 스타르Anita Star와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요리스 라만 랩을 설립했고, 2006년 선보인 〈본 체어〉, 〈본 셰이즈Bone Chaise〉는 2008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디자인 건축 분야 수석 큐레이터인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가 기획한 전시 《디자인과 유연한 정신Design and the Elastic Mind》에 초대되며 큰 화제를 모았고, 특히 〈본 체어〉는 MoMA에 영구 소장되면서 이후 디지털 시대의 디자인을 이끌 국제적인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큰 디딤대가 된다. 안토넬리가 라만을 일컬어 ‘혁신적인 역량과 아르누보로 회기 되는 유기적 전통을 반영한 획기적인 디자이너’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후 〈본 퍼니처Bone Furniture〉 시리즈를 계속 발표했고, 2011년에는 애틀랜타에 있는 ‘하이 뮤지엄High Museum of Art’에서 의뢰한 키네틱 커미션 워크인 〈디지털 매터Digital Matter〉(2011)를 설치한 후 같은 해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에서 선정하는 ‘2011 월스트리트 이노베이션 어워드The Wall Street Innovation Award’의 디자인 부문 수상자가 되어 트로피까지 디자인하며 인지도가 계속 우상향하게 된다. 


 


요리스 라만


여기서 머물지 않은 라만은 2014년 〈마이크로구조체Microstructures〉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제너레이티브 디자인과 3D 프린터를 접목한 작업 세계를 밝혔다. 동시에 메이커 무브먼트와 관련된 〈메이커체어스Makerchairs〉와 〈비츠 앤 파츠Bits & Parts〉, 아주 복잡한 자연 세계의 법칙을 컴퓨팅 알고리즘으로 풀어낸 〈보텍스Vortex〉, 그리고 다축 금속 프린팅 기술(Multi Axis Metal Printing)을 갖춘 3D 프린터 MX3D를 만들고 그 최초 생산물로 휴먼 스케일을 넘는 크기의 금속 출력 메시 구조물인 〈드래곤 벤치Dragon Bench〉를 발표하며 독립 10년 만에 업계에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확립하게 된다. 이후 MX3D를 활용해 〈버터플라이 스크린Butterfly Screen〉(2016), 〈그래디언트 스크린Gradient Screen〉(2017)을 만들면서 동시에 건축적 규모로 금속 3D 프린팅의 범위를 키운 암스테르담 운하 교량 프로젝트(MX3D 브릿지)를 진행하며 2018년 최종 출력에 성공한다. 같은 기간 네덜란드 ‘흐로닝어르 뮤지엄Groninger Museum’에서 기획한 《요리스 라만 랩: 디지털 시대의 디자인》은 2015년 11월부터 2018년 9월까지 흐로닝어르 뮤지엄, ‘큐퍼-휴잇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뮤지엄Cooper Hewitt, Smithsonian Design Museum’, 하이 뮤지엄, ‘휴스턴 뮤지엄Museum of Fine Arts’, 네 곳의 뮤지엄을 순회하면서 그 네임밸류는 최고치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2018년 이후 소식이 끊겼다가 작년에야 다리를 운하에 설치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아직도 그의 공식 홈페이지나 인스타그램에는 새로운 작업에 대한 소식이 올라오지 않는 기묘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이제 그의 작업 중 주목해야 할 중요한 예시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려 한다. 첫 번째로 꼽는 작업은 〈로코코 라디에이터〉다. “라디에이터는 크기가 클수록 공간을 훈훈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 둔탁한 모양새가 크기를 제한한다. 로코코 스타일의 컬을 사용하면 라디에이터는 기능뿐 아니라 장식물로서 그 면적에 제한받지 않는다. 얼마든지 크기를 크게, 혹은 작게 할 수 있는 실용적인 라디에이터가 되는 것이다.” 현대 디자인이 시작된 이래 항상 대척점에 서 있던 기능과 장식이 실은 대립 관계를 청산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며 공예적인 감성과 현대적인 디자인의 결합을 꾀한 〈로코코 라디에이터〉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인 브랜드인 드로흐Droog가 알루미늄으로 만든 전기 버전으로 〈히트웨이브Heatwave〉란 이름 아래 출시됐고, 이후 2007년 네덜란드 난방 회사인 야하클라이머트시스템즈Jaga Climate Systems가 실제 생산에 도입하며 중앙난방용으로 제작하기 위해서 손으로 만든 점토 모델링과 3D 스캔을 통한 결함 조정을 통한 디지털 제작 과정의 무한 반복으로 최종 생산 버전을 완성했다. 


 


히트웨이브


두 번째로는 단연 〈본 퍼니처〉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라만은 2004년 네덜란드에서 방영된 독일의 과학자인 클라우스 마테크Claus Mattheck 교수에 대한 다큐멘터리 〈나무처럼 짓기Building like a Tree〉를 보고 디지털 시대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마테크 교수는 1998년 저술한 책 『자연의 디자인: 나무로부터의 배움(Design in Nature: Learning From Trees)』를 통해 디자인계에서도 관심을 받던 인물이었는데, 힘이 필요한 곳에 재료를 추가하는 나무의 능력을 모방해 구조에 약점이 있으면 빨간색으로 표시되고 이것을 제거하려면 소재를 추가해야 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이 소프트웨어는 당시 GM의 유럽 부문을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사인 오펠Adam Opem AG에서 1998년 효율적인 엔진 마운트를 만들 목적으로 마테크 교수와 협업한 게 시초였다. 구조의 장력이 균등하게 나뉘면 자연이 만드는 최적화된 결과처럼 더 이상 약점이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여기에 독일의 엔지니어인 로타어 하르츠하임Lothar Harzheim이 주창한 뼈가 자라는 방식을 모방하는 기능까지 더했다. 나무와 달리 뼈는 힘이 필요하지 않은 물질을 제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설계 프로그램을 통하면 3D 모델링 후 설계의 특정 지점에 응력의 적용을 시뮬레이션하여 단단해야 하는 부분은 굵게,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얇게, 혹은 아예 제거하여 최소 크기와 재료가 들어가는 유기적인 형태의 엔진 마운트를 만들 수 있었다. 라만은 오펠에 연락해 이 소프트웨어를 가구 제작에 쓰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고, 최소 물질을 사용해 최대 강도를 만드는 자연 진화의 방식을 매우 정확하게 모방하여 완전히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여는 데 성공한다. 


 


본 체어


뉴욕의 대표적인 컬렉터블 디자인 갤러리인 프리드먼 벤다Friedman Benda와 드로흐의 부탁으로 총 12점을 만든 알루미늄 재질의 본 체어는 3D 프린터로 세라믹 몰드를 제작하고, 각 몰드를 하나로 조합한 후 알루미늄을 부어 이음새가 존재하지 않는 매끄러운 일체형으로 캐스팅하였다. 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디자인에 적용한 덕분에 그 형태는 매우 유기적이면서도 생명체의 근본에 닿아있는 듯했고, 구조적으로 안정성을 답보했다. MoMA를 비롯해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에 영구 소장된 이 의자는 지난 2019년 12월 12일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6번째 에디션이 62만 달러에 낙찰될 정도로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같은 해 시도한 〈본 셰이즈〉는 상체와 하체를 모두 의자에 올려놓고 쉬는 ‘셰이즈 롱’의 형태로 만든 의자로, 안락함을 위해 알고리즘의 기능을 적극 활용하고 수공예로 실리콘 몰드를 제작한 후 자외선 차단 합성 레진을 캐스팅해 마치 얼음처럼 반투명한 형태를 구현했다. 이 작업의 프로토타입은 파리 퐁피두 센터와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 영구소장품으로 낙점됐다. 또한, 이듬해 발표한 〈암체어Armchair〉는 3D 프린터로 91개의 정교한 금속 몰드를 출력한 후 중국의 본차이나에서 영감받아, 이탈리아의 유명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의 대리석 가루와 레진을 합성해 마지 우윳빛 도자기와 같은 느낌의 아름다운 유기체 의자다.


 


본 셰이즈


 


암체어


2010년 이후 그의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은 〈마이크로구조체〉 연작이다. 총 세 가지 의자로 구성된 마이크로구조체는 발달한 3D 프린팅 기술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만드는 디자인 메소드에 제너레이티브 디자인을 처음으로 접목해 컴퓨터와 인간의 긴밀한 합작을 도모했다. 여기에서는 입체적으로 구현되는 ‘셀cell’ 패턴의 그래디언트가 시각적으로, 구조적으로 중요한데, 첫 번째 의자인 〈소프트 그래디언트 체어Soft Gradient Chair〉는 뜨거운 열에 녹는 열가소성 폴리우레탄(thermoplastic polyurethane)을 3D 프린터로 출력해 구조적 강도의 강성이 중요한 곳에는 솔리드 셀이 뭉쳐있고, 부드러움과 편안함이 필요한 곳에는 셀이 퍼져있도록 했다. 셀의 그래디언트, 즉 밀도의 차이로 의자의 기능과 안락함을 동일한 재료와 인쇄 기법으로 구현해낸 독특한 의자였다. 이는 요리스 라만 작품 중 두 번째로 MoMA의 영구 소장품이 되었다. 두 번째 의자인 〈알루미늄 그래디언트 체어Aluminum Gradient Chair〉는 대형 3D 프린터에 알루미늄 가루를 넣고 직접 소결해 3D 프린터로 파트를 나눠 출력한 후 조립해 용접한 결과다. 소프트 그래디언트 체어와 비슷하게 구조적 강성이 필요한 곳은 셀이 뭉쳐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셀이 적어 재료의 감소와 밝기가 높아져 하나의 오묘한 조각품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본 체어와 더불어 가장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갖는 의자로.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의 영구 소장품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소프트 그래디언트 체어


 


알루미늄 그래디언트 체어


마지막 의자는 바로 〈어댑테이션 체어Adaptation Chair〉로 바닥에서 시작한 기다란 셀이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가 의자의 다리 부분을 형성하고 그 다리는 다시 좌판을 지지하기 위한 일종의 구조물이 되는 식으로 증식하고 적응한다. 여기에 쓰인 재료가 독특한데 바로 폴리아미드다. 폴리아미드는 금속을 대체하는 플라스틱으로 불리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중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이는 재료로 특히 자동차 엔진, 공조, 연료 부품 등에서 금속 대신 인기가 많은 특수 플라스틱이다. 어댑테이션 체어는 이 폴리아미드를 재료로 삼아 3D 프린팅을 한 후 파트별로 조립하고, 구리를 전기도금해 아름다움과 강성에 포인트를 주었다. 〈메이커체어스Makerchairs〉 또한 그의 이미지를 기술과 공예를 섭렵하는 디지털 시대의 창작자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파라메트릭 디자인을 활용해 정교하게 디자인한 의자는 모두 3D 프린터로 출력하거나, 혹은 CNC 밀링 머신으로 나무를 깎아 조립할 수 있는 부분의 합으로 기능한다. 3D 프린터 출력물은 주로 조립의 형태를 띠고, 나무는 접착제를 이용해 정교하게 하나씩 틀을 맞춰가는 방법을 택하는 데 여기에는 일단 오차 없는 명징한 디자인과 함께 손작업으로 의자를 구현하는 장인정신이 요구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디지털 기술로 생산한 결과를 수공예를 통해 완성하며 디지털과 공예의 상생, 공생의 가치를 높이며 21세기 공예가 가야 할 하나의 길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어댑테이션 체어


 


메이커체어스


하지만 같은 해 라만에게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은 바로 다축 금속 프린팅이 가능한 MX3D 프린터를 만든 일이다. 자동차 공장에서 사용하던 산업용 로봇 팔에 용접 기계를 결합한 MX3D 프린터는 금속을 조금씩 융해하며 바로 허공에서 용접을 통해 빈 공간에 금속으로 유를 창조하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육면체의 좁은 공간에서 탈출한 노즐은 말 그대로 축에 얽매임 없이 다양한 각도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그 종류도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 청동, 구리 등 다양했다. 전문가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렸고, 개발 도중 화재 사고도 날 정도로 미래가 불투명했지만 결국 완성한 MX3D는 단돈 2만 유로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경제성이 탁월하고 그 적용 범위도 휴먼 스케일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금속 3D 프린팅 분야의 새 장을 연 기계로 인식된다. 이 MX3D 프린터의 발명으로 요리스 라만 랩은 자회사 격인 MX3D를 만들어 옛 조선소 건물로 이전하게 된다. 이후 2017년에 만든 〈그래디언트 스크린Gradient Screen〉은 아주 괄목할 정도로 제너레이티브 디자인과 첨단 3D 금속 프린팅 기술이 맞물려서 정교한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이 방법론은 그대로 〈MX3D 브릿지〉에 쓰이게 된다. 〈MX3D 브릿지〉는 원래 암스테르담의 관광 명소인 레드라이트 지역의 운하에 실시간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당국의 환경오염 우려로 인해 기각되었고, 이후 엔지지어링, 설계, 재엔지니어링, 재설계, 허가, 안전 조치, 운하 벽 보수, 재설계, 프로그래밍, 기금 모금, 시험 인쇄, 재설계 및 재프로그래밍 등 복잡한 절차를 걸친 후 로봇팔 4개로 총 6개월 동안 인쇄를 하였고 사용된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의 길이는 1100km, 그 무게는 4.5t에 달했다. 작년 7월 19일 정식으로 설치된 운하에는 영국의 AI 관련 국립 연구소인 앨런 튜링 인스티튜트가 중심이 되어 다리 곳곳에 장착한 센서의 데이터를 집합해 클라우드에 디지털 트윈을 생성하고, 다른 다리로 교체할 때까지 2년 동안 다리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모을 계획이라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래디언트 스크린


 


MX3D 브릿지


대략적인 그의 포트폴리오 설명을 마쳤으니 개인적인 의구심들을 풀어볼까 한다. 지금 한국에서나, 세계에서나 요리스 라만에 대한 평가는 무척 호의적이고, 그 이유도 거진 동일하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에 굉장히 충실하면서도, 그 디자인 메소드는 자연의 섭리를 닮아있기에 논리적으로 매우 매력적이며, 더불어 공예적인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21세기 공예과의 공존을 꾀하는 선각자이자 디지털 공예의 선구자로 꼽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의 인터뷰 자료와 작업 세계의 변천을 보면서, 앞서 말한 자연의 섭리를 자신의 창작 원천으로 쓰고 있다는 평가와, 공예와의 공존을 꾀하며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는 평가가 조금씩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일단 〈본 체어〉로 시작해 그의 전매특허가 된 유기적 디자인은 자연의 섭리에 대한 탐구심의 결과가 아니라는 게 내 입장이다. 이미 2011년 국제갤러리에서 아시아 최초 전시회를 연 바 있는 요리스 라만은 방한 때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자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형태들에 매혹되긴 하지만 자연이라는 소재를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불가능했던 것에 대한 도전에 가깝다. 지금 우리 주변의 디자인 상품들은 일률적으로 찍어내기에 편리한 모양이지만 앞으로 5∼10년 후엔 새로운 기술 덕분에 더 다양한 형태와 언어를 가진 디자인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내 디자인엔 아름다움과 실용성, 과학적 지식이 공존한다. 유기적 형태의 디자인이지만 기본적으로 논리와 이성에 기반을 둔 작업이다”란 답변을 보면, 그에게 있어 자연이란 처음 시작할 때의 미믹의 대상으로서 그 보편적인 논리와 이성의 중심이 되었지만, 이후 자연 과학의 보편적인 법칙들을 찾아 이를 적용해 형태를 만들어냈고, 이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논리와 이성, 즉 알고리즘을 파라메트릭 디자인, 제너레이티브 디자인 등 여러 디자인 메소드를 통해 적합한 폼으로 구현하는 과정에 돌입한 지 오래다. 2014년 〈마이크로구조체〉 시리즈에서부터 그런 방향성은 명징하게 나타난다. 더는 요리스 라만을 바이오 미믹에 기초한 유기적 형태 제조자로 보기에는 그의 전체 커리어에서 방법론의 발전이 명확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라만을 두고 디지털 시대의 공예를 이끄는 선두주자로 보는 것은 꽤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작업 전반에서 공예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맞지만, 정확히 그가 핵심으로 꼽는 자질은 바로 ‘장인 정신’이다. 공예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둘은 굉장한 차이다. 주로 3D 프린팅을 활용해 작업하는 그에게 자신의 작업이 미학적이고 완성도가 높아지려면 사람의 손을 활용한 후처리가 생명이다. 아주 복잡한 형태를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설정하고, 이를 3D 프린터로 실물화한 결과물을 우리가 감탄하는 매끄럽고 윤기나는 상태로 격상시키려면 각고의 세심한 노력과 긴 시간이 필수다. 그가 말하는 장인 정신이란 이런 후처리를 완벽하게 하는 집중력과 이를 버텨내는 인고의 시간이지, 공예에서 말하는 장인 정신과는 괴리가 있다. 곧,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에서 완벽한 생산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퀄리티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작업의 노동과 시간이란 리소스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굳힌 것은 아이러니하게 2014년 이후의 그의 행적 때문이다. MX3D 프린터의 탄생 이후, 그의 모든 집중은 다축 금속 3D 프린터를 이용해 휴먼 스케일을 넘는 작업에 집중해왔다. 스크린 작업도 그렇고, 교량 작업도 그 연장선이다. 이미 옛날부터 3D 프린터로 집을 짓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요리스 라만은 시대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의자에 집중했을 뿐이지, 디자이너이기보다 발명가에 가깝고, 건축과 기타 산업군으로 뻗어 나가는 유용성의 가치에 집중하고 있는 인물이다. 요즈음 공예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로컬리티에 기반해 기존에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재료와 형태, 그리고 공예가 특유의 훈련된 손으로 만드는 높은 퀄리티의 유일성이라는 점을 감안해볼 때, 디지털 공예라고 불리던 그의 작업과 연결되는 지점은 공예가 아니라 장인 정신이며, 이를 디지털 시대에 절박함을 느끼는 공예 쪽에서 오독한 것은 혹시 아닐까. 2014년 이후 작업에서 그전에 집중하던 가구 작업이 전혀 보이지 않고 스크린과 교량 등 건축적 접근이 계속되는 것을 과연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 


 


스페이스 익스체인저


지금도 그의 과거 작업을 호출하는 전시는 많지만, 그는 정작 다른 곳에 창작의 기운을 쏟는 듯하다. 실제 2020년 11월 5일부터 12월 12일까지 그의 전속 갤러리인 프리드먼 벤다에서 열린 그룹전 《What Would Have Been》의 온라인 도록을 보면 라만의 2020년 신작을 찾을 수 있다. 〈스페이스 익스체인저Space Exchanger〉라는 이름의 작업은 청동을 재료로 3D 프린팅했는데, 스크린 작업에서 조형적으로 진화한 하나의 조각물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여기서 공예를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중과 인내로서의 ‘장인 정신’을 투입한 매끄러운 예술 작품으로 판단이 계속 기울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요리스 라만에게서 다양한 신작 소식이 들려올 것 같다. 일단 7년을 끌어온 모뉴멘탈한 교량 작업이 작년 여름에 끝났고, 이제 다축 금속 3D 프린터의 능력을 확실하게 검증받았으니 그동안 구현하지 못했던 다양한 작업에 대한 펀딩이 시작됐으리라. 얼른 어떤 소식이라도 들려와 아직 설익은 내 의구심에 대한 해답을 풀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의 정체기와 빠른 몰락을 바라기엔 요리스 라만이 지금까지 보여준 작업의 놀라움과 짜릿함이 아직도 사뭇 그리우니 말이다. 




필자: 전종현 harry.jun.writer@gmail.com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학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프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다. «조선일보» «디에디트» «LUXURY» 등 다양한 매체에 디자인, 건축, 공간, 라이프스타일 관련 글을 기고하며 현재 «비애티튜드»의 편집장이다.



이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1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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