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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① 강요배 작가론_4.3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이나연

2020 ①
강요배 작가론_4.3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2020년은 전 인류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코로나 19라는 역병이 세계화된 지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쉴 새 없이 일어나던 일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거나 실패하는 혼란의 시절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이들은 아마 은둔자, 애초 세계화의 물리적 움직임에서 떨어져 있는 이들이었다. 어쩌면 타고난 선견지명으로 속세의 위험을 피해 한적하고 한갓진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던 한 작가에게 2020년은 뜻밖에 풍요로우면서도 가장 주목받는 해이기도 했다. 

2020년 하반기에 은둔의 화가 강요배에게 연달아 두 번의 경사가 있었다. 9월에 출간한 <풍경의 깊이>라는 책이 큰 화제를 몰면서 한 달 만에 4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11월 4일에는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다. 이인성 미술상은 대구 출신의 서양화가 이인성의 작품세계를 기리고자 1999년에 대구시가 제정한 상이다. 조덕현, 공성훈, 최민화 등 굵직한 화가들이 이 상을 거쳐 갔다. 강요배는 꾸준한 회화작업으로 시대와 역사에 충실하면서도 밀도 있는 작품세계를 구현한다는 점을 인정받아 2020년의 수상자가 됐다. 이인성은 1950년 사망했다. 그 2년 후 1952년에 강요배가 태어난다. 이인성 작가가 사망한 1950년 11월 4일은,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두 달 정도 지난 시점이라 세상이 뒤숭숭한 시점이었다. 인민군이 빠져나가 세상이 오리무중인 상황이었다. 강요배가 태어날 즈음의 제주도 여전히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는 4.3사건이 한창이었다. ‘4.3사건 진상조사단’은 이 일을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 무고한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공식 규정한다. 3만여 명에 달하는 도민들이 죽어가는 참혹한 상황에서 학살의 피해자가 될까 모두 숨죽이며 지내는 와중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특이했다. 동명이인이 있다면 확인과정 없이 동명인을 모두 학살하는 어지러운 상황, 아버지는 동명이인이 없을 법한 이름을 지었다. 4.3의 한가운데에 있던 제주에서 1952년 4월 18일 강요배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  



강요배, 흘러가네, 2015, 캔버스에 아크릴, 97x162cm



그림을 그리는 아이_유년기 
제주시 삼양에서 강요배는 거배아시로 불렸다. 아시는 제주도 사투리로 동생을 뜻한다. 거배아시란 강거배의 동생이란 뜻이다. 강거배란 인물은 타고난 재능이 많아 동네에서 유명했다. 달리기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다. 워낙 유명하니 호칭은 자연스레 강거배가 기준이 됐다. 아버지는 거배어른, 강요배는 거배아시가 된 연유다. 그림을 잘 그리는 형을 따라 거배아시도 그림을 그렸다. 영화잡지에서 이미지를 오려내서 스크랩하고, 화첩을 만들어 그 이미지들을 따라 그렸다. 학교를 다녀오면 크레파스와 종이를 두고 노는 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느낌은 밖에 가서 놀면서 살짝 뛰더라도 높이 뛰는 느낌이 들고 마음이 확 밝아지게 만들어줬다. 강요배는 이 밝은 느낌이 ‘너희들은 모르는 걸 난 가지고 있다’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창작의 재미를 일찌감치 깨우친, 그림에 취해서 다작을 하는 어린이였다. 

2016년에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렸던 회고전 <시간 속을 부는 바람>에는 강요배의 유년기 그림들이 소개됐다. 강요배의 어머니는 이 화가의 유년기 크레파스화들을 잘 보관해 두었다. 드문 일이다. 이 그림들이 보관된 과정에 대해 작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일부 옮겨본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첫 번째로 전 그림이 가지고 있는 호소력을 봐요. 아들이 그렸더라도 개발새발 그렸으면 치우겠지만, 딱 봐도 신기하고 그냥 버릴 게 아니라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싶거든요. 어머니의 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림이 호소력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거든요. 제 그림은 8살 때부터 완성도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하다 마는 것은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무엇이든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어설프지만 그때 제 그림에 완성도는 있었죠. 그런 그림은 엄마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던 거죠. 무관심하면 그러지 않으셨겠지만, 나름대로 그림에 메시지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8살 때부터 이미 진지한 자세로 임했던 그림들은 『풍경의 깊이』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이 책 속에 실린 <산꽃 자태>라는 글은 형에 대한 기억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강거배라는 예술인생을 이끈 큰 스승같은 존재에 작은 모란 그림 하나를 바칠 수 있어서 좋았다는 화가 강요배의 겸손함과 인간미가 가장 잘 드러난 글이다. 1)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나는 형님에게 드린 것이 없다. 나는 그로부터 한 번도 부림을 당한 적이 없다. 그로부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부탁을 받은 적도 없다. 오로지 세심한 존중심과 온기를 받았을 뿐. 그의 눈길은 깊고도 그윽하여 나의 그림을 그에게 내밀 수가 없었다. 형님 생의 마지막에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던 모란 그림을 한 폭 그렸다. 어린 날 그로부터 배운 필치로. 그는 그 그림을 선택했다.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나는 존경하는 눈빛 앞에 비로소 한 폭의 그림을 드릴 수 있었음에 행복해한다.” 2)  


강요배, 마파람I, 1992, 캔버스에 아크릴, 72.7x116.8cm


학창시절_육지대학과 첫 개인전 
형에게서 배운 그림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된 강요배는 제주를 떠났다. 72학번이던 강요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하계동 교사를 사용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이 때는 서울대학교 홈페이지에 따르면 유보적 상태의 미술대학으로 분류되는 시기(1972. 9-1976. 2)다. 연건동에 있던 교사는 1972년 9월, 정부의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하계동에 있던 교양과정부 교사에 마련된 임시교사로 이전했다. 1971년 4월 관악산에서 기공식을 가진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임시적 조치였다. 교사를 이전하자마자, 1월 유신발표에 따른 전면휴교령으로 학생들은 교사 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3)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강요배는 대구에서 온 배용균, 부산에서 온 박재동과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는 셋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많았다. 이즈음의 강요배는 카뮈나 카프카의 초상이나 자화상을 그렸다. 서양문학, 특히 실존주의에 심취한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무슨 주의라기보다는 그때가 히피 시대였어요. 다들 장발에 청바지에 통기타, 팝송, 비틀즈, 킹 크림슨, 레오나르도 코헨 같은 게 추앙받던 시대였죠. 그때 우리 셋(강요배, 배용균, 박재동)은 좀 특이했어요. 우린 노자 장자를 들여다 봤었죠. 반야경 같은 거 보고요. 당대 유행을 따라가면서도 약간 다른 쪽으로 간 거죠. 그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몰려다니며 유행 따라 사는 것은 추구하지 않았죠.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는 차원에서 그랬었죠.”

그렇다면 소설가의 초상은 어떤 연유에서 그려졌던 걸까. 작가의 생각은 이렇다. “그건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요. 컨템포러리, 즉 동시대성을 약간 얕본 거죠. 디아크로닉한 것, 통시적인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때 시각이 지금까지 일관적으로 온 것 같습니다.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비용도 안 드는 방법이거든요. 노자보다 더 멀리까지 통시적으로 놓고, 인간 보편성을 회화에서, 예술에서 고민해 보는 것. 그건 지금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각>은 강요배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약 한 달 동안 준비한 작품으로 연 첫 번째 개인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제주의 대호다방에서 1976년 첫 개인전을 열면서 동명의 제목으로 서문도 직접 썼다. 4)  작은 작품 20-30점을 다방에 거는 건 청년 강요배에게 어려운 과제는 아니었다. 당시 제주미술계는 화랑이라는 게 없이 화가들은 으레 대호다방에서 전시를 하고, 그게 뉴스거리가 돼서 기자들이 와서 보고 가곤 했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99퍼센트가 문화에 관심이 없고, 시내에 1퍼센트 정도가 다방 중심으로 모여서 문화를 즐기던 시절”로, 제주인구의 대부분은 농사를 짓던 시절이다. 묘사, 재현이 중심이 되던 시대 분위기에서 추상적인 것을 표현한 시도가 있었다. 이 젊은 화가의 첫 개인전이 당시 꽤 참신하게 보이긴 했던 모양이다. 신문평이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이 개인전이 열린 다음 해 1977년, 강광, 강요배, 고영석, 김용환, 백광익, 오석훈, 정광섭이 모여 ‘관점동인’이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한다. 창립전은 역시 대호다방에서 열렸고, 비구상 계열 작품이 주를 이뤘다. 구상화, 특히 풍경화를 주로 그리던 당시 제주미술계에선 최초로 현대미술의 방법론을 제시한 단체로 간주된다. 제주 지역 현대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할 수도 있다. 관점동인은 꾸준히 정기전을 열며 활동을 이어갔고, 1997년 35회 정기전을 끝으로 20년의 활동을 접는다.  


동백꽃 지다
 

현실과 발언 동인, 동백꽃 지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강요배는 1979년부터 창문여고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함께 졸업한 박재동은 중경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미술평론가 성완경이 찾아와 당시 태동기였던 현실과 발언이라는 동인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1981년에 강요배가 이청운과 함께 현실과 발언의 새로운 회원이 된다. 그 이듬해엔 박재동도 가입한다. 술 한 잔과 함께 현실과 발언에 막내로 참여한 강요배는 당시 ‘현실,’ ‘과,’ ‘발언’이라는 동인의 취지에 공감하게 된 배경을 밝힌다.   

“제가 원래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냥 화가일 뿐이었는데, 취지에 공감해 하게 된 거죠. 현실과 발언은 리얼리티(reality)는 무엇이며 어터런스(utterance)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요. 그 출발점은 현실은 무엇이고, 발언은 어떤 방식이 정확한가에 대한 것이죠. 현실과 발언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겁니다. 보통 ‘현실을 발언’한다는 데 많이들 초점을 맞추는 데, 사실은 ‘현실’과 ‘발언’이 어떤 것인지 토론해 보자는 것이죠. 마치 현실과 발언이 시대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미술사학자들이 몰아붙이는 게 골치 아파요. 프로파간다니 뭐니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거죠. 그리고 현실과 발언이 한 십 년간 활동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현실과 발언이 활동한 것은 4-5년에 불과해요. 굉장히 뛰어난 멤버들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젊음의 한때 지나가는 거더라고요. 82년에 시작했으니까 제가 29살에 들어가서, 34살에 끝났죠. 마지막엔 제가 회장을 하는데, 다들 제 말은 안 들었어요. 다들 형인데 모이지도 않고요. 85년에 민중미술협의회로 더 큰 조직으로 만들기 전인데요. 현실과 발언을 더 해보자고 호소를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동인은 오래 못 간다는 걸 알았죠. 슬슬 분화되더니 해체했죠. 이제 다들 각 영역에서 잘하고 있죠. 전두환 독재 시작할 때쯤 시작해서, 전두환 독재 끝날 때쯤 해산했죠.” 

현실과 발언 활동이 흐지부지해질 즈음인 1985년, 강요배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7년간 근무하던 선생님직을 버리고 출판사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한 일이다. 강요배는 시종일관 출판형식으로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 관심을 행동으로 옮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출판사가 3년 만에 폐업을 하고 만다. 1988년 무렵이고, 이 때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면서 소설가 현기영의 <바람 다는 섬> 삽화를 그리게 됐다. 1930년대 초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을 다룬 이 글에 대한 삽화를 그리는 1년간 강요배는 제주역사는 물론 그 역사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음 관심사가 자연스레 제주4.3으로 옮겨져 간 이유다. 삽화 작업이 마무리되던 1989년 즈음, 강요배는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큰 수술을 했고,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실제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9살 즈음의 강요배는 그렇게 스스로 죽기 전에 위대한 과업을 실행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4.3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그림책 형식으로 출판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경기도 덕은리의 농가를 빌려 작업에만 매진했다. 너무나 무겁고 큰 주제를 다루는 데는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애초 3년에 100점 정도 해보려 했던 계획은 50여 점으로 마무리가 됐다. 신기하게도 약해진 몸으로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진행하다 보니 몸에 힘이 생기더란다. 몸은 약해졌는데, 알 수 없는 대상이, 혼령들이 작가를 지지하는 느낌이 들어 외롭지 않고 강해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3년 만인 1992년 41살에 발표한 이 작품들이 <동백꽃 지다>다. 계획대로 동명의 그림책과 함께 원화 전시 <강요배 역사그림-제주민중항쟁사>를 학고재 화랑에서 열었다. 사실상 <동백꽃 지다>라는 책제목으로 더 유명한 <강요배 역사그림-제주민중항쟁사>전이 강요배가 본격적인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한 첫 번째 개인전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그 전의 작업들은 모두 습작이고, 여기가 진짜 작업이 시작된” 지점이다. 서울전시를 마치고 제민일보의 주최로 세종갤러리에서 제주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가 작품도 작가도 제주로 돌아오는 계기였을까. 화집 <동백꽃 지다>에 쓴 작가의 글 마지막엔 이런 문장이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걷어내는 일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나 천하에 가득할 것이다. 절망을 딛고 올라서는 곳에, 새봄의 꽃처럼 생이 있는 게 아닐까?” 절망은 언제나 희망을 품고 있다.  



강요배, 쓰러진 사람, 2000, 종이에 목탄, 52x77cm


다시 제주로, 다시 처음부터 
1992년 7월, <동백꽃 지다>의 성공과 함께 강요배는 돌연 제주로 영구 귀향한다. 처음에 제주로 와서 한 10년은 제주 여기저기를 탐험하고 공부하는 데 보냈다. 옹포리에서 1년, 외도에서 1년, 하귀에서 7년 정도를 보냈다. 자연을 탐험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제주의 역사부터 지질까지를 모두 탐험하는 전천후 제주공부였다. 

“4.3이 어느 영역에서 어느 골짜기에서 일어났는지 알려면 지도를 봐야 해요. 그래서 1:25,000짜리 가로 2m 정도 되는 큰 지도를 사서 김정호처럼 표시하면서 다닌 나만의 지도가 있어요. 그 지도를 가지고 자연을 한번 다시 보자 해서 10년 동안 제주 전역을 답사합니다. 오름이라는 오름을 모르는 데가 없어요. 1호는 <오름나그네>를 쓴 김종철 선생이라고 있는데, 그분의 지식을 제가 다 흡수했죠. 그 다음엔 친구들이랑 다녔어요. 그러고 나니 다닐 필요가 없더라고요. 이렇고 저렇고 하는 걸 다 이해하게 됐어요. 그러고 나니까 밖에 공부는 그만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파도가 치면 어떤 형상으로 치는지, 처음 제주에 왔을 땐 잘 몰랐거든요.” 

 <고원의 달밤>이라는 작품은 이 시기의 탐험이 남긴 걸작이다. 한라산에서 본 별과 달을 화폭에 담고 싶어서, 야간 산행을 기획한 노력의 결과다. 한라산 윗세오름 앞에 선작지왓이라는 곳에서 은하수가 한라산을 잡아당기는 걸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요배는 그걸 실제로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술연구 명분으로 특별히 양해를 구해서 다른 이들은 모두 하산하는 시간에 등산을 했다. 새벽 1시와 2시 무렵 밤하늘을 보면서 직접 별들을 찍어 현장스케치를 했다. 최종 유화는 나중에 작업실에서 정리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생기가 남다른 건 이런 발품에서 연유한다. 이렇게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그림을 그리는 일은 북한 여행을 하면서도 이어진다. 


강요배, 해금강, 1998, 종이에 목탄과 파스텔, 39x108cm 전시도록스캔

강요배, 중향성, 2019, 캔버스에 아크릴, 197x333.3cm



금강산과 DMZ 
1998년 11월 18일, 분단 반세기 만에 남한에서 북한으로 관광을 하는 금강호가 출발했다. 동해항에서 북한 장전항까지 불과 2시간 50분 만에 가닿은 북한에서 금강산 투어를 하는 목적을 가진 배의 출항이었다. 5) 조선 후기엔 정선(鄭敾)부터 20세기엔 변관식(卞寬植)에 이르기까지 금강산은 화가들의 단골소재였다. 18일의 첫 출항 이후 한국의 많은 화가들이 이 명산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를 열었다. 그중에서도 강요배의 금강산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전시는 가장 처음으로 기록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식적으로 금강산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같은 해 8월에 이미 사전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단순 관광이 아닌 전시를 염두에 둔 그림 여행이었다. 미술평론가 이태호와 함께 떠난 강요배의 첫 금강산 기행은 학고재 우찬규 사장의 기획으로 시작됐다. 북한지역을 여행하는 7박 8일의 일정 중 4일간은 금강산 답사였다. 그때 쓴 이태호의 답사기와 여행 중의 사진과 스케치를 바탕으로 8개월간 작업한 강요배의 캔버스 작품이 1999년 아트스페이스 서울에서 선보였다. 전시를 마친 이듬해인 2000년 강요배는 DMZ(비무장지대, Demilitarized zone)를 방문해 스케치를 남긴다.  

금강산 여행 첫째 날은 <구룡폭>을 스케치한 날이다. 둘째 날, 강요배는 내금강이 보이는 정양사에 올라 <정양사망 내금강경>이라는 스케치를 남겼다. 셋째 날, 해금강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허가받아 <해금강>과 <해금강문>이라는 스케치를 남길 수 있었다. 2019년 화백은 지난 기억을 되새김하며 <구룡폭3>과 <중향성> 캔버스 작업을 새로 제작한다. 구룡폭은 강원도 금강산 온정리 서쪽 8km 지점, 옥류 계곡의 최상류에 있는 폭포다. 금강산에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크고 낙하한 물은 구룡연을 이룬다. 높이는 최고 50미터에 달한다. 그 웅장하고 기운 센 폭포의 기운이 현장스케치에도 작품에도 잘 묘사돼 있다. 직각으로 꺾인 암벽을 타고 낙하하는 폭포는 구룡연으로 빨려들 듯 떨어진다. 이 장면은 <겸재정선화첩>에 실린 21점의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구룡폭도>에 묘사돼 있기도 하다. 강요배의 신작 아크릴화는 겸재의 <구룡폭도>와 구도가 비슷해 또 함께 두고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2000년에 강요배는 시인 고은, 소설가 공지영, 김귀곤 생태학 교수, 승효상 건축가, 안병욱 한국사 교수, 유홍준 미술사학자, 이종석 남북관계 연구위원과 중앙일보 김준범, 안성식 기자와 함께 DMZ 답사길에 떠난다. 중앙일보가 남북 정상회담과 6.25 50주년을 앞두고 문화계 인사와 기자로 '휴전선 답사단'을 꾸려 6박 7일 일정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중앙일보는 이 답사로 남북한 화해와 공존의 의미를 찾아가며 특별연재를 진행했다. 공지영은 DMZ에 부는 거친 바람에 깨지는 유리창에 대해 쓰고, 고은은 그곳에서 살아온 날과 다가올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그곳에서 스러져간 넋을 기렸다.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이 맞닿은 곳, 휴전선을 두고 각각 2㎞씩 물러난 한계선 철책으로 산악과 초지, 습지로 남아있는 이곳에 대해 다른 답사자들은 쓰기만 했다. 강요배는 쓰고 그렸다. 대성산과 펀치볼, 향로봉, 건봉산, 백마고지같은 격전지들이 파스텔과 사인펜, 콘테로 남겨졌다. 비무장지대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 가장 예민하게 경계태세로 무장해야 하는 곳에서 강요배의 드로잉은 평화로움과 긴장감을 넘나든다. 

2007년 강요배는 금강산을 재방문한다. 만폭동 일대를 다니며 봉래풍악의 글자를 모사하기도 하고, 금강대를 그리기도 했다. 금강대는 금강산 표훈사 북쪽 만폭동 안에 있는 높은 기둥 모양의 석대다. 한글 가사 문학의 시조인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금강대 맨 위층에, 선학이 새끼 치니’라고 노래했던 곳이다. 선학이 새끼를 칠 만큼 금강대는 장대한 바위 석벽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곳이라서 사람의 발길은 일절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겸재는 그러한 금강대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그려낸다. 강요배의 금강대의 특징을 목탄으로 거칠게 기록했다.



강요배, 백마고지, 2000, 종이에 콘테, 26x38cm

강요배, 대성산 마현분지, 2000



귀덕에서의 정착, 코끼리를 끌어내고 새긴다
지금의 귀덕, 귀덕화사로 유명한 작업실에 자리를 잡은 게 2002년의 일이다. 귀덕의 한가로운 작업실에서 세상을 보겠다는 강요배의 의지는 그가 말하는 모든 말의 행간에서 언제나 드러난다. 

“결국 자기 존중, 셀프 리스펙트가 중요해요. 무엇이든 땅이든 돌이든 나무든 고양이든 나무든 자기 옆에 있는 것과 따스한 관계를 갖는 것이 완벽한 우주의 중심이 되는 일입니다. 애인이면 더 좋겠죠. 따스한 관계만이 사막이든 얼음골이든 꽉 차게 만드는 것이 통시적으로 우주의 기본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죠. 자기를 존중하는 것은 내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예수도 그렇고 소크라테스부터 모든 지혜로운 이들이 하는 말이 이거예요. 너 자신을 사랑해라. 네 안에 천국이 있다. 자기를 존중해라. 가만히 있는 자리에서 이걸 수행하면 되는 겁니다. 이걸 인정받고 말고는 메가시티에서 하는 일이고요. 시장에서의 일이죠. 자기를 인정하는 건 다른 시각에 있기때문에 사막에 있어도 가득 차는 일입니다. <어린 왕자> 같은 우화에서도 하는 말이죠. 뭐하러 병들어가면서 우루루 몰려들어 도시에 있습니까.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 다들 사기를 치잖아요. 그러면 뭐하러 공부를 합니까. 공부를 할수록 이기적으로 변한 사람들은 자기를 놓친 사람들이죠.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맘 편히 별 보고 달 보고 천년을 생각하고 크게 들여다보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위치, 그런 조건이 있다면 어디든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귀덕에서 찾은 강요배의 작업론과 작업들은 내내 흥미롭고, 이 작업들의 정수는 <상을 찾아서>전에서 볼 수 있었다.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이에게 코끼리를 설명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코가 2미터는 되고, 귀가 장정의 등짝보다 크고, 다리는 늙은 가로수 둥치 같다고 했을까? 지금처럼 사진으로 코끼리를 볼 수 없던 시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괴생물체를 그림으로 설명해야 했던 데서 한자어 ‘코끼리 상’의 어원을 찾는다. ‘상’이란 글자는 형상, 인상, 추상, 표상, 대상, 상징 등 다양한 단어들과 결합해 변주되며 코끼리 외의 상들을 표현해 왔다. 인상은 상을 각인하는 일, 추상은 상을 끌어내는 일, 심상은 상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강요배식 미술사전에 따르면 그렇다. “어?”하고 인상을 받아, “아하!”하고 깨달은 상을, “야~!”라는 감탄이 나올 때까지 끌어당긴다. 화가는 이렇게 깨달은 상을 관객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야 한다. 타인에게 작가가 포착한 상이 전해지고, 그 상이 또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감응이 오래도록 새겨질 정도의 완성을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붓을 움직인다. 그 표현과정에는 붓 대신 돌과 빗자루, 칡뿌리가 동원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일에는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정공법만이 유일한 길이다.

강요배는 2018년에 학고재갤러리에 <상을 찾아서>라는 전시를 연다. 강요배에게 인상, 추상, 심상은 미술사에서 정의하는 바와 조금씩 닮기도 다르기도 하다. 인상주의란 찰나의 인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인상 이후에 상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정확하게 새기는 일이다. 추상이란 사실 세상 모든 사물을 보는 방식이다. 사물을 제각각의 시선으로 보는 이상, 모든 사물은 추상화된다. 머릿속에서 1차로 추상화된 상을 화면에 옮기는 과정은 코끼리를 좀 더 정확히 끌어내고, 그림을 명료화하는 일이다. 구상이 눈으로 보는 정확한 상을 표현하는 일이고, 추상은 구상을 벗어난 애매한 형상들이라는 막연한 이해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 전시가 중요하죠. 추상을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거든요. 어떤 패턴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어떤 기능을 따라가는 거죠. 어떤 결과물(양식화된 패턴)을 따라가기보단 원리적인 것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추상이 양식화된 개념, 아주 표피적으로 몬드리안과 칸딘스키를 두고 말하는데, 우리가 상형문자를 거론하지 않고 추상을 말할 수 없다. 마치 컬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 안 되는 것이죠. 아메리카는 진즉에 그곳에 도도하게 있었는데. 추상을 유연하게 생각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추상을 하나의 패턴으로 이해하는 건 벽지를 하나 만든 것 밖에 안 돼요. 처음엔 내가 제주도 출신이라고 하지만 제주를 잘 몰랐거든요. 제주의 식생이나 지질을 몰랐어요. 그때야 공부하는 범위가 내 고향인 삼양 언저리랑 제주시밖에 없었으니까요. 학교를 다니다 보면 제주를 답사할 기회가 없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주를 다 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41살에 돌아와 보니까 제주도가 이렇게 심오한가 싶어지는 거죠. 파도는 어떻게 치며 봄과 가을에 톳은 어떤 색깔을 가지며 이런 것들이요. 제가 자연과학에 취미가 있거든요. 가만히 보니 ‘자연은 너의 마음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웃에서부터 인으로, 제일 어려운 것이 너의 마음이다, 라는 결론이죠. 주관적 심상이 더 중요하다 하는 결론에 다다른 이후에는 많이 안 다녔어요. 진정 나는 뭘 하고 싶은가, 음악적으로 내 속으로 외돌개의 파도를 빌려오는 거죠. 제가 10m 넘게 치솟아 오르는 파도를 봤거든요. 제주도 자연에게 저는 허가를 받았어요. 마음대로 응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이젠 도구일 뿐이에요. 어떤 곡을 연주할 것인가만 남은 거죠.” 

서양미술사에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싶고,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싶다. 아직도 그의 신작들은 새롭고, 앞으로 나올 작업들도 새로울 것이다. 매초 변하는 바람과 빛, 비, 파도처럼 강요배의 그림이야말로 반복을 거듭할 새가 없다. 평론가 최석태는 강요배의 이 경지에 대해 ‘모험’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땅에서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몸으로 익히고 있는 미학에 근거한 모험”이라는 것이다. 지구 위에서 가장 연교차가 큰 우리의 기후조건과 팍팍한 사회환경 속에서 위태로운 삶을 겸허히 살아가는 미학을 온몸에 익혀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강요배에게 화가가 되는 일이란, 평생에 걸쳐 작업을 하는 일이란 모험이 아니라 순리에 가까워 보인다.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란 겸손한 발언을 차치하고서라도, 화가가 되는 과정에 그 어떤 불편함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겐 태어나면서부터 인상을 잡아내고 화면에 새기는 일은 자연스럽고도 쉬운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좋은 손은 깊은 시각을 만나 세상이 만들어내지 못했던 화면을 선물했다. 그 새로운 시선을 담은 <상을 찾아서>전을 마친 뒤엔 릴레이로 구작도 한 번 더 소개했다. <상을 찾아서> 이후에 열린 <Memento-동백>전은 제주 4.3을 그린 이전 작품들을 소개했다. 공식적으로 그의 데뷔작들이고, <상을 찾아서>와 <Memento-동백>을 합하면 학고재에서 가진 강요배의 회고전이 된 셈이다. 

이제 강요배는 또 새로운 모험을 준비한다. 놀랍게도 회화가 아닌 영상 언어를 실험중이다.“최근에 이 바람소리를 담고 싶어요. 회화에서 천천히 영상으로 옮겨져 가고 싶어요. 영상의 영역을 넓히고 싶거든요. 카메라를 가지고 겸손하게 오브젝트에 접근하라. 생소리를 놓치지 마라. 이런 로우한 것을 보여주려고요. 소리를 넘어서 춤을 추는거죠. 회화-(하이픈)-댄싱이 되는 거죠. 모든 게 연결돼 있는 거죠. 물리학자들도 이걸 ‘파’라고 말하죠. 이것들이 템포가 또 있어요. 시간의 정지는 무죠.”

내년 11월에 열릴 대구미술관에서 열릴 개인전에 소개하게 되는 이 영상작업은 잠시만 봐도 강요배의 시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유년기의 크레파스화부터 청년기와 장년기를 지나, 이제 원로작가로 불릴 즈음의 나이에 접어든 강요배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는 고유한 관점을 가지고 새로운 형식실험을 하는 데 게으름이 없다. 그리고 시대를 타지 않는 관점에서 나온 작품은 시대를 넘어서도 유효성을 가지고 고전이 될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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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요배에게 직접 들은 형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를 기록해둔다. 여기선 세심한 존중심과 온기를 나누던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형님이 제겐 늘 너그럽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깡이 있기도 했어요. 그래서 함부로 못했죠. 함부로 했다가는 나도 크게 받아칠 준비가 돼 있었으니까. 강요배는 어머니 혜택받고 형님 혜택받고 그랬다는 일방적인 이야기는 안 되죠. 6살인가 7살 때 마루에서 다리를 뻗고 있으면 시원하거든요. 거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형님은 방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는데, 전 여름날에 시원하게 노래부르고 싶었던 거죠. 형이 제게 좀 조용히 하라고 한 거예요. ‘노래 부르는 건 내 자유지’라고 받아쳤더니, 형이 나와서 뺨을 때리셨어요. 맞고 나서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저도 분해서 방에 들어가서 형이 보던 책을 찢어버렸어요. 그걸로 한 판이 끝났어요. 9살 차이가 나니까 형은 중학교 3학년쯤 되고, 나는 초등학교도 가기 전이니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그것이 손찌검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9년 뒤에 형이 보던 참고서를 보다 보니 내가 찢은 페이지가 나오더라고요.” 

2) 강요배, 『풍경의 깊이』, 돌베개, 2020, 63p 

3) http://art.snu.ac.kr/대학소개/미술대학-역사

4)  그 서문은 <각>이라는 제목으로 『풍경의 깊이』에 실려 있다. 

5)  십여년간 이어진 금강산 관광은 2008년에 일어난 사고로 여행이 중지된 이래 다시 재개되지 못했다.  




필자: 이나연 quelpartpress@gmail.com
82년생 이나연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성인기의 대부분은 서울과 뉴욕에서 보냈다. 전공은 회화와 미술평론. 2015년, 제주에서 글로벌 컨텐츠를 생산해내는 퀠파트프레스를 차려 <뉴욕지금미술>과 <뉴욕생활예술유람기>를 발행했다. 2017년 한영판으로 별도 발행되는 문화예술신문 <씨위드>를 창간했다. 현대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고, 강연을 한다. 2020년 제주도립미술관장에 선임되었다.

이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0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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