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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나의 타임리얼리티: 단절과 흔적 그리고 망각

심장섭


서울 강남구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전시중인 ‘타임리얼리티: 단절, 흔적, 망각’(2019.11.21-12.21)을 관람했다.

“역사학의 맥락에서 소외된 사건과 터에 관한 이야기를 예술가의 시선으로 풀어낸 전시”라는 이은주 예술감독의 말에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솔직히 느낀 감정은 내용보다도 타이틀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오랫동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근무했던 나에게는 타임리얼리티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직장에 대한 기억은 퇴직과 함께 자동으로 멈추기 마련”이라는 선배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동안 여기저기 흩뿌렸던 나의 흔적들도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점차 잊혀 가리라.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자 희미해져가는 옛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 고등학교 1학년 첫 미술 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손바닥을 내보이며 이를 스케치해서 한 달 후에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저리도록 힘을 준 왼손을 노려보았으나 정작 스케치북에는 선하나 긋지 못했다. 마지막 날 밤새워 그려 제출했던 그림이 어떠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미술반에 들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던 것 같다. 당시 무지하고 편견이 심했던 나는 그림이 여성들의 전유물인 줄만 알았었다. 그러다 보니 미술과는 전혀 거리가 먼 학교를 택하게 되었지만, 나의 부족한 자질이나 역량으로 볼 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구 본관,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공


그 후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개원 업무를 맡은 것이었다. 미술 작가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서 일반 미술대학과의 차별성과 정체성을 띤 입시와 커리큘럼 설계 등에 매진했던 그때가 요즘도 가끔 떠오른다. 초대 미술원장인 오경환 교수는 첫 입학시험 문제로 “살아있는 염소를 교실에서 8시간 동안 그리게 하는데 음악을 틀어주라”는 것이었다. 가장 어렵고 곤혹스러웠던 기억은 염소 25마리를 구해 교실까지 가져오는 문제와 이것이 사전에 알려지지 않도록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매애~”하고 온종일 울어대는 소리와 역한 냄새 때문에 빗발치듯 쏟아지는 문의와 항의에 답하는 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수험생들은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어가며 계속 반복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협주곡을 지겹도록 들어야 했으니 아마 평생 기억될 묘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떠나 문화관광부 예술국에서 근무하면서 미술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예술학교에서 익힌 경험과 네트워크를 십분 발휘하여 나름대로 적극적인 행정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1996년 초부터 미술계에서 논의되던 미술품 경매제도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침체된 미술시장을 활성화하고 미술품의 환금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경매제도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미술 정책 수단으로 눈에 확 비친 것이다.

화랑협회를 통해 관련 연구와 세미나 등을 개최하면서 소더비 등 민간경매회사와 프랑스의 국립경매원에 대한 검토를 착수했다. 경매사 양성, 작품 DB화, 미술품 감정제도에 중점을 두고 정책적 접근을 시도했으나, 당시 민간 경매회사 등장, 이해관계자들과의 합의 곤란, 민관 거버넌스에 대한 이해와 경험 부족 등으로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물론 국제 아트페어 참가 및 전국 조각공원 설치 지원 등의 성과도 있었지만, 이것들도 지금 돌아보면 과연 원래 의도했던 대로 진행되었는지 많은 의문이 남는다.

이후 십여 년간 미술 정책 업무에 종사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공직을 마쳤다. 이젠 자유분방한 미술 관람객이 되어 전시장을 찾는 일이 취미가 되었다. 그중에서 예술의전당의 ‘마크 로스코’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윌리엄 켄트리지’ 전시, 나오시마 예술섬과 프로방스의 빛의채석장 탐방 등이 기억에 남는다. 작가의 치열한 삶과 혼이 배인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적어도 이와 같은 흔적들은 망각됨이 없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 심장섭 (1957-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무과장, 문화체육관광부 대변인, 저작권 정책관, 미디어정책국장, 국립중앙도서관장 역임. 문화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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