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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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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개미와 연필 이야기

이생진

1
어느 날 은행나무 밑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원석연(元錫淵, 1922-2003) 선생에게 길을 물었다.

“선생의 그림 속에서 개미를 따라다니다 길을 잃었는데 어쩌면 좋아요?” 했더니
“당신도 연필을 들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 당신의 시를 그리세요” 한다.
그래서 연필을 들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 元 선생의 그림을 시로 그렸다.



원석연, 고독한 녀석, 1988, 종이에 연필, 30×30cm

2
내가 연필을 가지고 나선 것은 그림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다.
그가 말하는 그림의 실체란 그림에서 소리가 나야 하고 냄새가 나야 하고 무지개가 떠야 하고 
무지개 색깔이 나와야 하고 쓰러진 사람이 일어서야 하고 가버린 것들을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고독에서 나온 것이라 했다.



원석연, 프로필, 1962, 종이에 연필, 43.5×29cm


3
아내의 얼굴을 그려 본 사람이면 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소중한 지

元 선생의 그림을 시로 그리기 위해
元 선생을 찾아갔다
고양시 청아공원 사랑관 지하에서 만났다
아내와 마주보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은 풍만했다

결혼하던 날 밤 윤성희(1929-2013)라 부르기 어려워
천사라 부를까 아내라 부를까 여보라 부를까 망서리다
날이 샜다며

머리칼 하나라도 놓칠까 두려워
당신의 가슴에 화살이 꽂힐 때 소리치던
행복을 그렸다며
남들이 들을까봐 부끄러워 숨소리 죽이며
그렸다고


4
연필이 지나간 고독을 읽으며 시를 그렸다
시도 그림이니까
고독과 고집
연필은 닳았는데
고집은 그대로다

자고 일어나면 새가 울었고
개미 거미 벌 나비 나방이
연필을 따라다녔다
나도 그림을 따라다니며 시를 그렸다
元 선생도 윤 여사와 함께
시가 그린 그림을 읽을 거다
영혼도 영감이니까

2019년 여름, 이생진


이생진(1929- ) 시인. 충남 서산 출생. 1955년 첫 시집 출간 1969년 등단 이후 1978년 시<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널리 알려짐. 2018 구순기념 38번째 시집 『무연고』, 2019 『개미』(열화당, 이생진 시. 원석연 그림) 출간. 1996 윤동주 문학상, 2002 상화시인상 수상. 2009 제주 성산포 오정개 해안에 시비공원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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