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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숙희 : 사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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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숙희는 시작과 끝을 정하지 않은 그림을 그린다. 하루하루 반복적으로 칠하고, 지우고, 긁고, 또 칠하는 시간들이 쌓일 뿐이다. 마치 농부가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듯, 작가는 그림이라는 노동을 한다. 누군가에겐 색을 칠하고 형태를 완성해가는 것이 그림이라면, 서숙희는 대부분 색을 덜어내고 화면을 비워가는 방식을 취한다. 어눌하고 빈 듯 하나 시간의 깊이가 소박하게 스며든 지점을 찾아갈 때 비로소 손을 놓는 것이다.

‘서숙희 색조’라 불릴만한, 푸르스름한 깊이감을 지닌 청록빛의 색은 그저 몇 번의 붓질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도 없는 엷디엷은 색이 드리워지고, 다시 지워내고, 그 위에 칠해지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빛을 품은 색조가 생성된다. 반투명한 아크릴판 위로 염색되듯 입혀지는 색조는 형상과 배경의 구분조차 모호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는 사물의 외곽과 공간의 영역이 중첩되어 마치 배경 속에 사물이 배어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에게 ‘색’만큼 중요한 조형요소는 바로 ‘선’이다. 회화의 캔버스 위로 그려지는 선과는 차별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서숙희는 아크릴판 위를 긁고 새기는 방식으로 배경과 형상의 질감들을 만들어 나간다. “사물이 자신의 몸에 그어 놓은 상처나 얼룩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런 걸 그리고 싶어졌다.”고 쓴 작가 노트에서 읽히듯이 그에게 선은 오래된 시간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처럼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그가 그리는 것은 매일 눈으로 쫓아가는 산등성이와 대나무로 둘러 싸인 집, 그리고 먹고, 씻고, 치우는 유리잔과 그릇들이다. 작가는 그 대상들을 가능하면 가볍고, 담담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격자무늬의 배경과 푸르스름하게 물든 바탕 위로 무심히 부상하는 형체들은 그 투명성 때문에 마치 기억 속에 자리한 흐릿한 흔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특정한 사물이 지니는 사실성을 넘어 시간성을 지닌 풍부한 리얼리티를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완전한 재현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작가는 잘 알고 있다. “이맘 때면 매년 대나무 그리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완성하지 못하고 접는다. 아무리 그려도 실제의 대나무만 못하기 때문에... 올해도 작년에 그리다 접어둔 대나무 그림을 꺼냈다.”고 한 서숙희의 메모는 가까이 가닿을 수는 있어도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독백과 같다. 

그럼에도 아크릴 판 위에 무수한 선으로 새겨진 그릇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꼭꼭 눌러 그린 격자의 홈들 속에 아스라이 드러나는 산의 형상은 어느덧 우리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우연히 전시장을 들른 이가 있다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을 무심한 풍경이 주는 작가의 위안 속에서 잠시 쉬어가면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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