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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 : 마음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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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 개인전 '마음의 준비'
2022. 10. 4 (화) ~ 2022. 10. 17 (월)



1. 전시개요 

■ 전 시 명: 이윤경 개인전 ‘마음의 준비’
■ 전시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37 갤러리 도스 제2전시관(2층)
■ 전시기간: 2022. 10. 4 (화) ~ 2022. 10. 17 (월) 



2. 전시서문


위기훈

이윤경 작가 그림 앞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 휴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휴식은 얼룩 때문일 수도, 휴식이 얼룩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휴식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쉬는 것입니다. 얼룩은 본바탕에 다른 빛깔의 점이나 줄 따위가 섞인 자국, 또는 액체 따위가 묻거나 스며 더러워진 자국을 말하죠.  
휴식의 중요성을 말하는 이들은 무척 많습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 관련해서는 물론이고, 각종 통과의례 앞에 서 있거나 뚫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젊고 늙고를 떠나 공부하는 이들에게도, 하다못해 심심한 안부에도 휴식은 자주 강조됩니다. 심지어 세상을 바꾼 이들이 휴식 속에서 빛나는 아이디어를 탄생시켰다고, 그 휴식이 일명 ‘멍 때리기’라며, 멍 때리기 대회를 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진짜 말 그대로의 휴식이란 게 있을까요? 
휴식이라는 그 의미 그대로 휴식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취해봤을까요? 

당연한 것은 마땅히 당연한 것이라고 배우고 외웠던 시절부터 어제까지 생각해보면 휴식은 저도 모르게 주저앉는 자리였습니다.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겠다고 노력을 쏟고 기울이다 힘에 부쳤을 때, 또는 자신만만하게 실수를 저질러 놓고 주저앉아 휴식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럴 때면 부모님도, 선생님도, 동료나 친구, 선배, 애인까지도 “왜?”라고 물었죠. 이유를 알아내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뜻이라지만, 저는 그게 다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왜? 라는 질문을 받은 마음은 저절로 두 손을 포갰습니다. 곧이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라는 자책이 따라 붙었고, 자책은 반성으로, 반항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제가 갖다 붙인 휴식은 왜라는 질문에 멱살 잡혀 자책으로, 반성, 반항으로, 결국 일종의 형벌에 갇혔습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라 했던 학습은 그 어떤 착각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동안 학습과 세뇌 사이에서 착란을, 착오를 열망했습니다. 그럴 때면 당연하게 옳은 이들이 당연하게도 등짝을 후려쳤습니다. “너는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질병에 걸렸다, 당연한 것을 배우는 건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힘이다, 모든 건 이유가 있다, 이유를 알아야 올바른 길로 들어선다, 예측가능해야 안전하다, 그래야 미래가 보장된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랬습니다. 최선을 다해 모르고 싶었습니다. 사실이 반드시 있는 그대로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오직 당연한 것들이 싫었더랬죠. 하지만 아는 것이 적어서 모르는 것 또한 많지 않았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그랬죠. 지식이 섬이라면 그 섬의 해안가, 파도치는 그 주변머리 정도만 모르는 것이라고. 무한한 모름의 세계는 있는 것조차 모른다고. 지식의 섬이 크면 클수록 미지의 해안선 또한 크다고 그랬죠. 하지만 모르는 것도 적은 주제에 휴식이라는 상처를 입었다고 세상의 주인공인 양 엄살을 떨었더랬습니다. 

이윤경 작가의 <자맥질> 앞에서 처음에는 노을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엔 노을 아래 넘실넘실 헤엄치는 이들을 하나, 둘 차례로 보았습니다. 마음은 어느새 갇혀있던 형벌을 등지고 있었고, 한순간에 형벌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inner landscape I> 앞에선 고개 들어 우러르던 마음이 뻣뻣하게 힘주어 세웠던 모가지를 비틀었고, 하늘을 발아래 두었습니다. 
<inner landscape II>을 보면서는 자유롭게 착각하고 싶었습니다. 앞에 나무와 그 뒤에 나무, 그 둘 사이에 불길이 일어났구나. 아니, 나무 하나가 허리를 끊어내는 불길에 사로잡혀 있구나. 자연의 색이라 할 초록색이, 녹색이 어떻게 평화롭게 이글거리는지, 어떻게 검은색으로 불타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숲속에 서 있는 저이도, 아들을 부둥켜안은 아빠도, 거울이든 기억 속이든 비친 자화상의 작가도, 모두가 휴식의 어느 한 순간에 놓여있으면서 왜라는 질문 없이, 어떻게 생각을 지우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제가 갇힌 형벌은 후회였습니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낭비했다는 후회. 
죽음보다 무서운 휴식을 마주하고서 얼룩을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infltration>을 보고 또 보며 물과 흙을 나눈 붉은 무늬, 물에 비친 하늘과 흙 밖으로 솟은 풀 사이를 가른 붉음처럼 토해낸 숨을 흡, 다시 후! 하고 뱉었습니다. 
몸은 이완되었고, 미간에 어떤 힘은 분명 몰입이었습니다. 아, 이완된 몰입이라니. 이게 가능하다니!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기도였다고 착각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후회는 외면해야겠습니다. 내게도 분명, 언젠가, 바로 그 때 반드시 도래할 죽음. 
<열망>의 저 여인처럼, 죽음을 잠시 상기하는 마음이 어쩌면 저 풀숲에 누워 휴식 같은 잠을 청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이윤경은 휴식이 요구한 풍경을 가만히, 격렬하게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켜본 휴식을, 얼룩이 된 휴식을, 휴식과 얼룩을 그렸을 거라고 당신에게는 속삭이고 싶습니다. 



그 순간의 밀도_90x116cm_acrylic-on-canvas_2022





밝고도 어두운 그 곳을 걷곤 해.._80x80cm_acrylic on canvas_2022





inner-landscape-I_116x90cm_oil-on-canvas_2022





열망_130x162cm_oil-on-canvas_2022





자맥질_90x116cm_oil-on-canvas_2022



3. 작가노트


슬픔에 관해
언제부터인가 슬픔은 가장 뚜렷한 감정이었다. 대학시절, 그림을 그리면 자꾸 화가 났다. 그릴수록 분노가 증폭되었다. 아마도 가장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분노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분노를 캔버스 위에 담지는 않았다. 
요즘은 그림을 그릴수록 슬퍼진다. 마음이 아리고 슬프지만 역시 나는 슬픔을 그리진 않는다. 다만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채로 그림을 그린다. 

장소와 시간, 상황의 공유
이것이 관계를 결정짓는다. 관계의 유지에는 의지가 필요할 때가 많다. 이것이 나를 힘들게도 하고 나를 구원하기도 한다. 관계는 중요한 것이며 공감은 그것의 윤활유이다. 공감 능력을 길러야한다. 분노는 공감능력을 길러주지 않았지만 슬픔은 공감능력을 조금은 길러준다. 역설적이게도 슬픔은 내가 위치한 장소와 시간, 상황을 견디게 도와준다. 내가 추정한 논리로는 그렇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무엇을 그리든 무언가가 담겨지게 된다. 
그림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다. 상처를 상처로 대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레이어로 깔려있다.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고 때로 나 자신도 모르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림에는 말해지지 않는 어떤 감정이 담겨있다. 담담한 그림을 그려도 담담하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는 행위로 무언가를 담고 있고,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것 같다. 

내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저 젖은 초록빛
누군가가 나에게 내 그림에는 항상 나무가 그려져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나무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초록에서 검정까지 색깔들을 섞어 그리고 있노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장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나무나 풀이 들어있는 사진들에 눈이 가고 그 사진들을 소스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좋아하니 계속 손이 간다. 비가 오는 날, 혹은 비 개인 날이었던가? 내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저 젖은 초록빛이란 생각이 들었다.

몽상가의 상념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나는 처음부터 줄곧 몽상가였다는 것이다. 일상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어도 지금까지 붓을 놓지 않은 건 줄곧 내가 몽상가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이 고약한건 경제적 삶으로 묶어버리는 데에 있다. 저항할 의지를 잃게 한다. 그럼에도 간간히, 스트레스가 목까지 차오르면 조금씩 터뜨리는 그리는 행위로 인해 아직도 나는 작업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의 캔버스 위는 내가 채 소화하지 못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는데 급급했고 나는 항상 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지않다라는 결핍의 상태에 빠져있었다. 충족되는 그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그것이 시간에 의해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생각할 시간, 읽을 시간, 그릴 시간. 시간은 항상 나에게 결핍된 중요한 무엇이었다. 
여전히 충분한 시간은 나에게 결핍된 요소이지만 결핍은 결핍대로!

마음의 준비
아무리 절실하다 하여도 작업을 한다는 것은 공들여 삽질하는 느낌이다. 나처럼 일상과 밀착된 줄타기를 하는 입장에선 나의 상념들과 작업들이 불러일으키는 괴리는 항상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상념들은 고착될 자리를 찾지 못하고 근처에서 서성인다. 
나의 삽질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을 들이는 내적 필연성이 없으면 작업은 상당부분 빛이 바라게 된다. 이 전시의 제목을 ‘마음의 준비’로 정했다. 극작가 위기훈의 희곡집 ‘마음의 준비’를 읽고 나도 전시 제목을 ‘마음의 준비’로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용기, 왜곡과 은폐로 위장된 내면을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로, 마치 첫 전시인 듯, 마음의 준비를 하는 전시로 나름 의미를 부여해본다. 
나의 공들인 삽질에 내적 필연성을 부여하지 않아도 작업은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의미’는 몽상가인 나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의미’가 출발하고 있는 자의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사랑이 변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 어느 날 문득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는 일이다.”라고 신형철은 말했다. 동일한 것이 어느 날 문득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되는 그 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일한 것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 변화를 인정하는 것! 지금은 그 인정의 과정에 있는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의 밀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꽉찬 공기의 밀도를 표현하고 싶었으나 다음 전시에 대한 생각으로 남기고 마음 속에 떠다니는 몇 가지 상념들을 잡아 띄워보낸  그 시작점으로 자가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 서용선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로서의 시작을 말이다.  

2022년 9월 이윤경 


4. 작가약력 


이윤경(Lee, Yoonkyung)

2003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2011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 전공 졸업

개인전
2022   마음의 준비(갤러리 도스)
2019   정서적 현실감(드립팩토리)
2017   각각의 얼굴(面面) (카페두잉)
2014   근처 (57th 갤러리)
2011   그 곳에 사는 것들 (갤러리 31)

단체전
2021   엄마예술가의 시간(청년예술청)
2012   모색 끝에 빛나는 젊음 (서울미술관) 
2012   냉정한 풍경 탐구생활 (신한갤러리 역삼 기획공모)
2010   어긋난 풍경 (아트지오 갤러리) 
2010   그날을 쫓다, 그녀를 쫓다 (갤러리 31)
2009   일상의 상상, 상상의 일상 (갤러리 31)
2007   얼굴얼굴 (리앤박 갤러리) 
2007   서울판화2007 (토포하우스) 
2007   국제도서박람회 북아트전시 (코엑스 태평양 홀)
2006   겉으로 돌기, 안으로 돌기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기획공모) 
2006   서울판화 2006 Duolog전 (서울 모란갤러리)
2005   고백과 증언 (우석홀 갤러리) 
2005   판을 깨자 (서울대학교 문화관 전시실) 
2005   여덟가지 경계경보 (갤러리 도스) 
2005   우수청년작가전-존재와 표상 (갤러리 가이아) 
2005   서울판화 2005 (토포하우스) 
2005   ㅁ(네모)안에 ㅁ(네모)밖에 (대안공간 아룽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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