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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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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나무판에 작은 싸리나무 조각들을 촘촘히 채워가는 나무작품을 선보여, 수공업적 노동이 배인 손맛과 동양적 깊이를 담고 있으며 살아있는 생물을 화면에 옮긴 듯한 느낌을 준다




심수구의 작업, 혹은 우연히 들려오는 타자의 함성


김원방│미술평론



‘형상성’이란 비교불가능한 것들을 묶어놓은 것, 이질적인 조형공간들의 충돌을 의미한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작가 심수구가 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 소위 ‘나뭇가지 작업’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나뭇가지 작업’은 나뭇가지라고 하는 친숙한 재료를 활용하기 때문에 단지 그러한 재료의 측면에만 지나치게 많은 의미가 부여되어 읽혀질 우려가 없지 않다. 예를 들어 그 작업들은 ‘자연생태로의 복귀’나 ‘향토색의 표현’을 주된 관심사로 하는 작업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또 그런 측면에서의 독특한 매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작업들은 싸리나뭇가지들을 마치 물감처럼 사용하여 ‘낭만적인 산수풍경화’ 정도를 보여준다고 보는 관점도 가능하다. 나무로 빽빽하게 채워진 표면을 조금 물러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산이나 구름 같은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는 반대로 이것을 그림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재현적 형상이 첨가된 입체조각으로 간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피를 지녔고 때로는 바닥에 펼쳐지는 설치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향토적 풍경과 산, 구름이 펼쳐지는 진부한 ‘키치’라고 비난 받을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나뭇가지 작업’에 대한 또 다른 관점으로서는, 나무라는 재료가 지닌 물성을 부각시키는 작업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사실 무수하게 쌓여 있는 싸리나뭇가지들의 단면들을 가까이서 응시하다 보면 잠시 그러한 ‘물성의 미학’에 몰입되어버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여러 관점들은 단지 그의 작업에 부분적, 일시적으로 타당할 뿐이며, 결코 그 작업의 전체적 모습을 파악해 낼 수 있는 관점은 아니다. 그 작업들을 거리를 두고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마치 점묘파의 방식으로 그린 산이나 구름, 가로수, 또는 문자의 형상 같은 것이 나타난다. 그 형상들은 촘촘한 나뭇가지들의 배열방향, 또는 나뭇가지 단면의 색의 차이를 작가가 조절하여 배치함으로써 드러나는 효과이다. 따라서 그 형상들은 관객이 방향을 바꾸거나 조명의 방향이 달라지면 이내 사라지거나 불분명해져 버리기도 한다. 여기서 더욱 가까이 다가가면 그러한 재현적 환영들은 완전히 소멸해 버리고, 빽빽이 채워진 나뭇가지의 단면과 틈새들로 이루어진 3차원의 공간, 즉 실제 사물의 세계가 나타난다. 여기서 세부와 전체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멀리 있을 때 보이던 ‘산’의 형상의 세부는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져 버린다. 달리 말하면 2차원적 환영으로부터 3차원과 부피로, 그림에서 조각으로의 급격한 비약 혹은 단절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작품 중간에 오브제들이 자리잡는 경우도 있다. <싸리나무-돌다리 같은>(2002)라는 작품에서는 나뭇가지 사이로 다섯 개의 돌이 박혀 있다. 특이한 점은 여기서 돌의 그림자는 실제 그림자가 아니라 ‘그려진 그림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입체와 평면, 재현과 실물의 모순된 영역들이 매우 불안정하게 공존하면서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모순, 틈새, 단절, ‘불연속성’과 ‘미해결’의 측면이야말로 심수구의 작업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그의 초기작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며 이로부터 우리는 심수구의 ‘나뭇가지 작업’이 그러한 오랜 관심사를 심화해 나가는 지속적 과정 속에 있는 작업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예로 90년 중반에 그가 한 작품으로서, 그림에 표면에 여기저기 뚤린 공간을 만들어 그 공간 뒷편으로 또 다른 그림이 보이도록 한 작업이 있다. 이를 좀더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앞의 그림과 뒤의 그림이 합해져서 통합된 하나의 새로운 그림을 구성하는 듯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입체와 평면, 재현과 비재현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며, ‘나뭇가지 작업’에서처럼 바라보는 자의 가변적 시점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심수구는 오래 전부터 예술의 내용 자체보다는 예술의 존재론적 형식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 왔으며, 그러한 견고한 형식을 풀어 헤치려는 시도가 ‘나뭇가지 작업’에서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심수구와 유사한 관점에서 이질적 질서들을 공존시켜 예술작품의 도상학적 체제를 교란시키는 선례는 미술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16세기 합스부르그 왕가의 궁정화가였던 쥬세페 아르킴볼도(Giuseppe Arcimboldo)는 온갖 식자재들로 구성된 괴기스럽고도 위트 넘치는 초상화들로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물>이란 그림은 바다에서 나는 온갖 생선과 해산물들을, <겨울>이란 그림은 겨울을 연상시키려는 듯 말라 비틀어진 나무뿌리들을, <도서관장>이란 작품은 쌓아 놓은 여러 권의 책 무더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 정물 속에서 인간의 얼굴 형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해 낸다. 특히 <정원사>란 그림은 각종 야채들이 풍성하게 담겨있는 그릇을 그린 그림인데, 그림의 상하를 뒤집으면 검은 모자를 쓴 살찐 남자의 얼굴이 홀연히 나타난다.

아르킴볼도의 그림들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그림일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까? 식자재와 식물에 대한 그림인가, 아니면 초상화인가? 그의 그림에서는 세부와 전체 사이에 급격한 도약과 불연속적 단절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회화에서는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고, 전체는 부분들이 통합된 결과이다. 인간의 코를 확대하면 그건 코의 세부일 뿐이며 결코 코가 아닌 다른 물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아르킴볼도의 <물>에서는 인물의 코가 생선으로 대체되고, 생선은 코로 읽혀지게 된다. 세부와 전체는 서로 다른 것을 재현하고, 다른 코드들을 지닌 채 공존한다. 이 작품은 사실 ‘도상’(Icon)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상학적 단일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도상들의 성격을 띌 수 있는 일종의 ‘유사 도상’(para-icon)으로서, 도상의 재현적 기능에 대한 회의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는 무의식적 환각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서 프로타쥬 기법을 즐겨 사용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어린 시절 오래 된 나무마룻바닥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문지르다가 발견한 기법이다. 문질러 낸 종이에 나타난 나뭇결의 무늬는 우연히 두가지의 서로 무관한 관점에서 읽혀진다. 하나는 ‘마루바닥의 무늬’로, 다른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 등 어떤 다른 물체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환각’으로 말이다. 전자는 재현이고, 후자는 재현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일종의 수반현상이다.




이러한 사례들로부터 유추해 보자면, 특정 작품이 특정 사물을 재현하거나 혹은 재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전념해 온 온갖 예술이론들은 상당 부분 허구이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본래의 자연적 능력을 잃고 훈육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 하다. 언제부터 그리고 왜 우리는 누군가가 보라고 훈련시킨 그것만 보게 되었는가? 합판에 폐 신문지를 바르고 흑색물감을 잔뜩 칠해놓은 라우센버그의 ‘블랙 페인팅’ 연작은 왜 단지 ‘재현의 영도’라고만 읽혀지고, ‘재현의 영도의 재현’, ‘공허한 암흑 그 자체의 재현’, ‘어둠 속의 유령의 모습’으로는 읽혀질 수 없는가... 이 모든 것은 모더니즘 미술이론이 만들어낸 엄청난 허구이며, 현대미술의 상당 부분은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적 도상들로 이루어진 거짓 역사가 아닐까?

에른스트의 프로타쥬, 그리고 달리의 ‘편집광적 비판’은 바로 그 점, 즉 모든 시각적 도상이 하나의 재현으로서 하나의 코드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미 항상’ 필연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 바로 이러한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분열’이라는 사실을 역으로 탐구하고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모든 그림을 명쾌한 재현의 매체가 아니라, 재현에 기생하고 수반되는 ‘유사-재현’(para-representation)들의 충돌과 경쟁의 장으로 생각한 것이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단절과 불연속적인 질서들의 혼란스런 덩어리들일 뿐이며, 바로 이러한 혼란을 읽어내는 주체는 오직 하나의 지배적 코드에 집착하는 도상학적 주체 즉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인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소위 ‘시각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이 이질적 질서들이 뭉쳐있는 덩어리라는 점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가장 정밀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모든 형상과 재현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근원적 개념으로서 ‘형상성’(The Figural)이란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 형상성은 비교불가능한 여러 질서들이 위계질서 없이 뭉쳐져 있는 덩어리를 의미한다. 형상성은 수많은 잡다한 재현과 의미를 생산하는 일종의 ‘모체’(matrix)와 같은 성격을 지니며, 여러 다양한 형상들은 우발적이고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수구의 작업은 리오타르적 의미의 형상성의 한 좋은 예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 작업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의 작업에서 수많은 나무가지들은 이접적 관계로 짜여지면서 파생하는 우발적 사건들을 하나의 사태로 다큐멘트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나뭇가지의 집합은 무의미한 물질덩어리나 단순한 조형적 수단으로 볼 수도 있지만 (...) 나뭇가지 하나 하나의 특유한 몸짓들이 문맥화하면서 무한한 의미작용을 수행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노트 중)


이러한 관점에서 심수구의 작업은, 단지 ‘자연’이라는 의미를 진부하게 코드화 하고 소비하게끔 해주는 키치적 예술에 근접하기는 커녕 반대로 그러한 키치적 질서가 작동할 수 없는 혼돈의 지점을 보여주는 ‘자기반영적’(self-reflective) 작업인 것이다. 단 이러한 측면은 모더니즘 미술에서 말하는 ‘자기반성적’(self-reflexive, 혹은 재귀적) 측면과는 매우 상치되는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술사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모더니즘 미술의 자기반성성은 단지 자기 자신을 반복 지칭하는 동어반복임에 반해, 자기반영성은 주체의 다중화, 탈중심화를 수반하는 포스트모던한 작품들의 새로운 특징으로 규정한 바 있다. 즉 전자는 예술의 도상적 질서를 견고히 하는 반면, 후자는 도상의 분열과정 그리고 바라보는 주체의 분열된 자의식을 의미한다.

우발적 국면들은 기본적으로 그의 작품이 무수한 나뭇가지의 집적과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데서 생기는 ‘필연적’ 결과이다. 즉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우연’인 것이다. 사물의 집적과 반복은 현대미술에서 그 사례를 흔히 볼 수 있지만, 심수구의 경우는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음”을 목표로 차가운 그리드적 구조를 지향한 몬드리안이나 아그네스 마틴, 미니멀아트 작가들보다는, 앤디 워홀이나 베르나르 레키쇼, 신디 셔먼의 경우처럼 기호학적 질서의 해체와 연관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즉 심수구의 무수한 나뭇가지 조각들은 단순히 반복되는 사물이 아니라, 반복되는 ‘기표’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반복은, 가장 원초적이고 실제적인 ‘전체’를 대체하는 어떤 재현적 이미지나 기표도 결국은 상실되리라는 불안 속에서 생겨난다. 불완전한 기표를 반복적으로 파괴함으로써, 기표화되기 이전의 근원적 질서 즉 ‘죽음’ 또는 ‘태고의 어머니의 몸’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따라서 반복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기표와는 다른 기표, 그 기표에 의해 배제되었던 차이, 결코 현실 속에 최종적으로 기표화 될 수 없는 근원적 질서를 지향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심수구의 무수한 나뭇가지들은 전체적으로 모여서 하나의 통합적 형태나 기표를 구축하기보다는, 무수한 변질과 변화, 우연한 차이들의 생성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심수구의 작품에 나타나는 산과 구름과 같은 모호한 형상은 실은 그 반복행위들이 지향했던 목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반복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우연의 한 양상일 뿐이다. 나뭇가지들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 때로는 산이, 때로는 구름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에른스트가 문질러 낸 마루바닥의 무수한 무늬들이 이와 상관없는 이질적인 형상과 우연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심수구의 작업에서 그러한 우발적 국면들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그의 작품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그 본질이 부재한다는 점, 이것이 그의 작업의 본질 아닌 본질이며, 그만의 특유의 힘인 것이다. 그의 작업은 작품 가장 깊은 심층 속에 숨겨져 있으리라 추정되는 본질적 진실과 궁극적 의미의 성립을 지연시키는 일종의 ‘장치’(Apparatus) 또는 ‘배치’와 같은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여러 우발적 형상들, 상징들, 코드들은 서로 간에 우선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우연히 또는 경쟁적으로 존재하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들 경쟁에서 잠시 누가 부각되는가 하는 것은 단지 상황에 따른 우연일 뿐이다. 관객은 나뭇가지만 보고 숲의 정취에 젖을 수도 있고, 좀더 거리를 두어 어떤 전체적 그림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의 모든 면들, 즉 그 작품의 ‘실제’(The Real)는 결코 우리가 단번에 포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실제는 사실 무한하며, 우리는 항상 우연히 마주친 부분적 일면 만을 보고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진정한 실제 혹은 ‘전체’(whole)는 그런 의미에서 ‘이 곳’에 없다. 그것은 ‘이 곳’도 ‘저 곳’도 아닌, 이 곳과 저 곳을 토대로 하여 도약(도주)하고 개시되는 제 3의 지평 위에 존재한다. 이러한 제 3의 지평으로의 운동을 문학이론가 쇼샤나 펠만(Shoshana Felman)은 ‘도주적 부정성’(Elusive Negativity)라고 부른 바 있다. 제 3의 혹은 도주적 지평은 하나의 기표로, 도상으로, 작품으로 고착되지 않고, 계속 확장, 지연, 변화, 생성하는 ‘잉여’의 영역을 말한다. 그 영역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영역’ 좀더 엄밀히 표현하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영역이 이미 항상 현존하고 있는 이 현재성(현존)의 영역’이다. 바로 이러한 잉여와 미진함의 현존, 그 신비와 결핍이 바로 예술작품의 ‘실제적 전체’에서 빠뜨려서는 안되는 ‘부재하는 본질’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더 볼 것이 많다”라고 하는 이 ‘풍경의 결핍’에 대한 나의 목격이야말로 내가 작품에서 비교적 가장 멀리 목격한 바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총체는 결코 고스란히 가시화될 수 없는 영원한 타자, 하지만 현재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미완의 타자이며, 절대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 우연과 차이의 모습으로 찾아올 미래의 모든 가능성인 것이다. 심수구의 무수한 나뭇가지들은 바로 그러한 ‘타자들의 함성’을 들려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심수구의 관심은 나뭇가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의 물질감과 그것이 환기하는 ‘자연’이라는 의미의 친근함과 편안함을 거부할 이유는 물론 없다. 거부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러한 우연은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으므로. 하지만 이와 동일한 이유로 인해서 ‘자연이 아닌 것’, ‘나뭇가지가 아닌 것들’도 필연적으로 그의 관심사가 된다.

수많은 나무의 단면들은 물질이면서 잔잔한 물결 같은 사건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작가노트 중)


사건은 나 자신의 ‘표현’이 아니다. 사건은 시간의 표현일 뿐이다. 작가와 관객의 위상은 단지 방문자 혹은 발견자일 뿐이다. 그 작품은 동일하게 반복가능한 실체가 아니라, 결코 반복 불가능한 차이의 반복으로서의 사건이다. 심수구의 ‘그림’은 실체, 재현, 상징, 언어들로 채워진 그림 내부에 시간, 차이, 지연, 사건을 개입시킨다. 그것은 바로 회화와 조각의 오래된 태생적 기원을 앞당기려는 반복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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