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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페리 : 빈랑시스 檳榔西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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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 Collective 씨알콜렉티브는 2021년 CR 신진작가 공모에 선정된 무니페리의 개인전, 《빈랑시스檳榔西施》를 오는 12월 9일부터 2022년 1월 8일까지 개최한다.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무니페리의 국내 두 번째 개인전이다. 앞서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의 교차 지점을 탐구해온 무니페리는 이번 전시에서 다양한 사회적 맥락들이 만들어내는 오염의 알레고리에 관해 탐구한다. 


전시의 제목이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빈랑시스(Betel nut Beauty)’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열매 ‘빈랑(檳榔, Betel nut)’을 판매하는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카페인과 같은 각성 효과와 약간의 환각 효과를 주는 빈랑은 대만과 동아시아 일대에서 기호식품의 일종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어 왔다. 그 각성 효과 덕에 주로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소비되어 온 빈랑은 도로 위에서 대부분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빈랑시스는 열매의 무게가 가볍고 판매에 큰 자본이 들지 않으며, 주 소비층이 거친 육체노동을 하는 남성들이었기에 마땅한 직업을 찾을 수 없었던 여성들이 쉽게 택할 수 있었던 직업이었다. 도로 위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더 많은 모객을 위해 이들이 택한 방법은 가능한 한 더 자극적인 방법으로 신체를 노출하는 것이었다. 이후 거리 위의 1인 상점에서 벗어나 대로변에 작은 부스를 차리게 되었을 때도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오색찬란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통유리 창의 부스 안에는 여전히 비키니 정도만을 간신히 걸친 빈랑시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 노동자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이들은 2002년, 대만 내 빈랑 열매의 유통이 불법화됨에 따라 다시 한번 양지의 경계에서 미끄러진다. 



무니페리_chapter 1_still image_1_빈랑시스_3 채널, VHS, 8/16mm, 4k, 스테레오 사운드_2021

흔히 이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추락한 존재(fallen beings)’로 일컬어져 왔다. 인간 보편의 기준으로부터 생물학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두 번이나 추락한 이들은 오염된, 혹은 더러운 대상으로 손쉽게 간주된다. 그렇다면 ‘더러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더러운 것과 아닌 것을 구별 지을까? 이때 무니페리는 ‘더러움’에 전제된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을 허물고 그것의 개념을 전복시킬 것을 요청한다.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된 <빈랑시스>는 ‘더러움’과 연루된 존재들을 추적한다. 첫 번째 챕터는 판소리로 막을 여는데, 소리꾼은 ‘추락한 존재’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가사 속 ‘추락한 존재’의 삶은 시간과 공간, 어느 것도 특정할 수 없다. 도처에 널린 이 삶의 형태가 언제 어디에서든 그리 달라지지 않기 때문일 테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본격적으로 빈랑시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상에는 빈랑 산업을 둘러싼 두 종류의 노동자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대만 하난 지역에서 빈랑 열매를 기르는 농부이며, 다른 하나는 빈랑을 판매하는 서비스직 종사자, 즉 빈랑시스이다. 빈랑을 중심에 두고 이들 각자가 빈랑 산업을 바라보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농부는 빈랑을 둘러싼 ‘더러움’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정치적, 사회적 규제들이 빈랑에 덧씌운 ‘더러움’이란 오명에 대해 토로한다. 다른 이의 말을 빌려 말하고는 있지만 땀 흘려 일궈낸 결실로서 빈랑을 살피는 농부에게 빈랑시스는 자신의 결과물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불온한’ 존재일 것이다. 한편, 빈랑시스인 ‘Uki’와 ‘Luu Qoo’는 자신들을 둘러싼 시선에 도리어 질문을 내던진다. 빈랑시스는 불온한 존재인가? 그렇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가? 


옳고 그름으로 이들을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지, 또는 알맞은 잣대이긴 한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이처럼 무니페리가 ‘더러움’의 전복을 위해 취하는 태도는 빈랑시스, 나아가 성 노동자를 가르는 이분법에 온전하게 설명되거나 포섭되지 않는 틈을 찾아내는 것이다. 작가는 옳고 그름을 기준 삼아 누군가를 섣불리 대변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은 채 다만 그들 사이에 놓인 무수한 이야기들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어느 것도, 어느 곳도 선택하지 않을 때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다른 곳으로의 점프가 가능해진다는 사실만을 믿는다.


이때의 다른 곳은 틈새를 비집고 솟아난 이야기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구멍이다. 혹은 모든 의미가 어긋나 뻥 뚫려버린 구멍이기도 하다. 여기에 SF적 상상력을 살짝 더해보자면, 이 구멍은 다른 차원과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돕는 ‘포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포털’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Uki’와 ‘Luu Qoo’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포털’을 통과하는 순간이나 전시장의 창 전체를 메우는 푸른색 구멍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 우리는 그들이, 그리고 이곳에 앉아있는 우리가 어느 곳에 다다를지 상상해보게 된다. 아마도 시공간이 파편화되어 있을 ‘포털’ 너머의 공간에서 추락은 더 이상 위에서부터 아래를 향하지도, 성공에서 실패를 향하지도, 깨끗한 것에서 더러운 것을 향하지도 않는다. 방향과 목적이 소거된 추락은 어떤 부정적 의미도 담고 있지 않기에, ‘추락한 존재’들은 다시 일어날 필요도, 뒤집어쓰고 있는 더러움의 오명을 벗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지난 5월 31일, 60년 역사의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가 모두 철거되었다. 사람들은 철거 소식을 듣고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곳이 이제야 사라졌다며 환호를 보냈다. 도시 미관 개선을 위한 업장 측의 자진 폐쇄 결정이었다고 사건을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로 치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건 내부의 누군가에겐 분명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곳에서 쫓겨난 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누구도 그들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여기저기로 흩어진 이들이 자신의 깨끗한 삶을 오염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을지를 상상해본다. 혹시 ‘포털’의 장력에 휘말려 다른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그곳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서사를 조각내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즐거운 장면을 그려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처럼 무니페리가 보여주는 푸른 구멍은 우리에게 가려진 존재를 기억하거나 상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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