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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의 통찰과 초월, 그여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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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김종영미술관 개관 20년 기념전  『김종영의 통찰과 초월, 그 여정』
전시기간 2021.5.7(금)~ 6.27(일)  (매주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김종영미술관 전관 (서울 종로구 평창32길 30)
전시기획 박춘호(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 전시 개요
김종영미술관은 개관 20년을 맞아 2021년 5월 7일부터 6월 27일까지 전관 특별전 『김종영의 통찰과 초월, 그 여정』을 개최한다.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라고 한 김종영은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개최하며 쓴 자서(自書)에 추상미술을 접하고 “사물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참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지역적인 특수성과 세계적인 보편성과의 조화 같은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찾았고, 30여 년간 작업 여정은 “이러한 과제에 대한 탐구와 실험의 연속이었다”라고 밝혔다.

김종영의 문제의식은 서구에서 도래한 미술을 어떻게 수용하여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이루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김종영이 어떤 방법으로 탐구와 실험을 했는지 깊이 살펴보지 못했다. 

그 동안 많은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로부터 김종영의 추상 작품은 한국 일 세대 추상 작가들 (앵포르멜)과 달리 자신만의 내적 필연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확실한데, 그 뿌리가 무엇인지는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관심이 있어 연구해보고 싶기는 한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번 전시는 부산의 원로 평론가 옥영식(1944~ ) 선생과 그 동안 공동 연구한 첫 번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옥영식은 2015년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때부터 김종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이번 전시가 있기까지 옥영식 선생의 조언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김종영의 관점에서 김종영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했다. 

한국미술이 지역의 특수성을 극복해서 보편성에 기반한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꿈꾼 조각가 김종영은 불각도인(不刻道人), 즉 깎지 않는 조각가가 되길 바랐고, 미술인이면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서양미술 전공자가 보기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작품세계를 펼친 작가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과 글, 그리고 서예 작품을 면밀히 살피면 시종일관하는 것이 바로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대한 성찰이었다. 발묘조장(拔苗助長)하려는 시류와는 정반대로 서구 미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태도와 작품관은 바로 그의 아호 ‘又誠(우성)’이 대변한다. 중용의 ‘성론(誠論)’을 이해하면 쉽게 추론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자연의 성실함을 본보기로 삼은 김종영의 작품 여정은 ‘동양의 뜻을 중히 여기는 사의(寫意) 전통에 기반해서 동서양을 관통하는 추상이라는 형식을 토대로 우리의 생명 미학을 조형하고자 한 탐구의 여정’ 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김종영이 이러한 연구를 ‘어떻게’ 전개해나갔는지 좀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실증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전시 구성
김종영은 1953년 제2회 국전에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 작품 『새』를 출품했고,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상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오십이 되던 1964년 1월 1일 일기에 이전까지 작업은 실험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전개하겠다고 신년 다짐을 적었다. 환갑인 1975년 첫 개인전을 개최했고, 1980년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주지하다시피 김종영이 본격적으로 추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1958년 즈음은 소위 한국현대미술의 출발이라고 하는 앵포르멜이 소개되던 시기이다. 김종영의 추상 작품은 과연 그들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고, 그리고 그 차이의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실증적인 자료와 작품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 작품소개

본관

2전시실
1953년은 김종영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해이다. 휴전 직전인 5월에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국제조각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12월에 개최된 제2회 국전에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 작품인 『새』를 출품하여 인체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추상 조각으로 문이 열리기 시작한 때였기 때문이다.

1953년 발표작인 『새』와 김종영이 스크랩 해서 평생 소장했던 김경탁의 『실생철학의 구상』을 전시했다. 김종영은 동양 철학자 우암 김경탁(1906-1970)이 1953년에 발표한 논고 「실생(實生)철학의 구성」을 읽고, 스크랩해서 평생 소장했다. 참고로 김경탁의 논점은 서구의 이원론적 대립 사상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의 대안으로 동양의 대대적(對待的) 사고, 즉 『주역』의 논리인 음양의 이율대대(二律對待) 관계에서 비롯된 조화론을 제시했다. 대대적 관계를 간단히 말하면 음양은 각자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각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의존해야만 하는 관계를 말한다. 

김경탁은 글에서 노자 『도덕경』 42장을 일종의 조형론과 같이 소개하였다.

“…그(노자)는 만물은 陰을 업고 陽을 안는(萬物負陰抱陽)다고 하였다. 이것은 만물이 이율대대 (二律對待)의 음양을 배태하고 생성한다는 뜻이다. 또 역경(주역)에 「陰陽對待之理」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은 음과 양의 관계에 있어서 음은 양의 결핍된 생활 요소를 가지고 있고, 또 양도 음의 결핍된 생활 요소를 가지고 있어 이 둘은 서로서로 대상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토대로 김종영의 조형 원리는 『주역』의 논리인 음양의 조화론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김종영이 1980년에 쓴 자서(自書)에서 자신의 작업 여정을 “자연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고 조형의 방법을 탐구하였다.”라고 밝힌 것과도 부합한다. 

1953년 제2회 국전에 출품한 『새』는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 작품이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는 작품 제목 때문에 서양 현대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랑쿠지의 『공간의 새』와 연관 지었으며, 김종영이 어떤 관점에서 『새』를 이러한 형태로 제작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를 태극으로 봤다. 따라서 태극에서 음양이 나왔고, 음양과 오행이 작용하여 천지 만물이 성립하였다. 한편 우주와 인간 세계의 관계를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才)로 표현하고 있다. 한글의 경우, 모음은 ‘•’(하늘), ‘∣’(사람), ‘―’(땅), 삼재를 상형 한 것이다. 또한 삼재는 도형으로는 ○(하늘), △(사람), □(땅)으로 표현한다. 이점이 한자문화권의 특수한 우주관이며,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우주관을 염두에 보고 김종영의 『새』를 살펴보면 브랑쿠지의 『공간의 새』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종영의 새는 천지인 삼재에서 비롯된 듯,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머리(天)로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듯하다. 새가 디디고 서 있는 둥근 대좌는 바탕인 태극(一)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수직으로 서 있는 새의 가슴 부분(人)과 다리 부분(地)으로 구분되어, 전체적인 형태는 우주적 존재로서의 자립(천지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브랑쿠지의 새는 날아가려는 순간의 모습을 환원적으로 추상화 한 형태이다. 오히려 김종영은 『공간의 새』의 기원인 『마이아스트라』를 참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전시실
김종영은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상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그때부터 김종영은 작품 명제를 『Work』라 하고, 그 뒤에 제작연도와 순서를 적었다. 이는 특정 제목으로 인해 관객이 불필요한 편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1958년에 제작한 추상 작품 세 점은 『꿈』, 『생성』, 『전설』이라는 특정한 제목을 붙였다. 주목할 점은 특정 사물 명사가 아닌 ‘추상명사’라는 점이다. 따라서 『Work』라는 제목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세 작품 제목을 통해 김종영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가운데 주목할 작품이 『생성』이다. 이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김종영은 1975년 회갑전을 개최하며 『대학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의 일관된 주제라면?”이라는 질문에 “구태여 제목을 붙인다면 『생성』, 『성장』 정도가 될 것”이라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종영의 작품 여정을 살피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단연 ‘생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제목의 연원은 김경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근거는 김종영이 스크랩한 김경탁의 논고, 「실생(實生)철학의 구성」의 핵심어가 ‘생성’이기 때문이다. 

『꿈, work58-1』은 양(직直) 위에 음(곡曲)이 있는 형태로 역의 괘로는 지천태괘((地天泰卦 ䷊)라 할 수 있는데, 음과 양이 교감해서 만물이 조화롭게 생성한다는 의미이다. 교감을 통해 화(和)를 이루는 형태라 할 수 있기에 ‘중화(中和)’를 설명하는 『중용(中庸)』 1장과도 중첩된다. 여기서 김종영의 호 ‘우성(又誠)’의 ‘誠’이 『중용』 20장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김종영이 1980년 자서에 쓴 「인생·예술·사랑」에서 ‘예술은 사랑의 가공’이라 했는데, 여기서 ‘사랑’이란 ‘화(和)’를 풀어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김종영은 이 작품을 통해 앞으로 조각가로서 자신의 ‘꿈’, 즉 자신이 지향하는 작품세계가 어떤 것인지 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work64-4』, 『work71-2』, 『work79-3』의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술관 야외에 있는 『work80-7』은 『꿈』을 둥그런 대(一, 태극) 위에 올려놓은 형태라 할 수 있겠다. 이 대는 『새』의 둥그런 대와도 같은 연원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전설, work58-2』는 그동안 창원 생가 별채인 ‘사미루(四美樓)’의 독특한 누각 형태의 문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모두가 ‘문’의 형태라는 점에는 동의하나, 김종영이 서예 작품에 일찍부터 각도인(刻道人)이라 낙관하며 노자를 즐겨 썼던 점을 참작해서 『전설』을 살펴보면 다른 문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전설』은 검은색(玄) 문과 같은 형태로 가로지르는 세 개의 획으로 지붕(홀수 양, 天)의 형태를 만들고 직과 곡으로 된 네 개의 기둥(짝수 음, 地)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노자 1장과 6장에서 도(道)를 문(門)에 빗대어 설명한 ‘중묘지문(衆妙之門)’과 ‘현빈지문(玄牝之門)’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성, work58-6』은 점토로 제작해서 하얀 시멘트로 떠낸 작품이다. 이후 김종영은 점토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한편 김종영은 로댕의 발작크 상을 통해 “조각의 세계는 물형(物形)의 묘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체를 형성하는 괴(塊)는 그 자체의 고유한 감각을 갖는 것이고, 이 괴를 구체적인 자연의 존재로 보여주는 데서 어떤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 조각의 시초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생성』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조각관과 매우 부합하는 작품이며, 동시에 허버트 리드가 조각 작품에 있어 중요시한 ‘vitality’와 동양의 ‘생성론’ 사이의 교집합이라 할 수 있다. 마치 태아를 잉태한 만삭의 여인 모습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이 작품은 김종영 작품 중에서 생성의 역동성에 방점을 두고 제작한 작품으로 관객이 자신 주위를 돌며 감상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58-8』은 반달 같은 형태(상현달)의 표면에 여러 개의 사각형이 부조되어 있다. 해는 양(天, 乾)이고 달은 음(地, 坤)이다. 그러니까 반달 역시 음이라 하겠다. 작은 사각형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듯이 땅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곤괘(坤卦의 德, 여성성)를 형상화 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생성, work58-6』을 좀 더 추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종영은 이상에서 살핀 네 작품의 조형 원리를 조합하여 이후 작업을 전개해나갔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김종영에게 매우 중요한 초기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4전시실
1964년 50세가 된 김종영은 그동안의 실험을 종합해서 자신의 추상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지향하는 작품을 어떻게 펼쳐나갈지에 대한 확신이 섰다고 할 수 있겠다. 김종영이 1960년대 탐독했던 서적으로는 한스 제들마이어의 『근대예술의 혁명』(1962), 『칸딘스키 예술과 예술가』(1962), 『보석』(1964), 수잔 랭거의 『예술이란 무엇인가』(1967), 허버트 리드의 『근대 조각사』(1967)가 있다. 이 가운데 수잔 랭거의 책을 주목하고자 한다. 김종영이 1980년 자서에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다.”라고 정의했는데, 그 출전이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김종영의 장서 목록과 유고를 살펴보면 수잔 랭거와 허버트 리드에 많은 공감을 했던 것 같다.

1961년 작인 드로잉 작품(D-0108) 을 통해 김종영의 추상이 주역의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 작품을 수많은 드로잉 작품 가운데 하나로만 생각했다.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어 헨리 무어 풍의 누워있는 여인이 좌우로 마주 보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좌측 위·아래에 있는 사인이다. 두 곳 모두 영문으로 김종영을 쓰고 이름 좌우에 상형문자로 위에는 山을 아래에는 水를 썼다. 그리고 아래쪽 바탕에는 파란색과 노란색을 칠했고, 위쪽 배경은 갈색으로 칠했다. 화면을 위아래로 구분해서 山과 水를 쓴 것과 음과 양의 색깔인 파란색과 갈색으로 배경을 처리한 것은 『주역』의 64괘가 상괘와 하괘의 조합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역』에 김종영이 사인한 것과 같이 아래가 물이고 위가 산인 산수 몽괘(山水 蒙卦 ䷃)가 있다. 몽괘는 산 아래에서 샘물이 나오는 상으로, 막혔던 것이 터지는 괘로, 이 괘상을 본받아 장래를 바라보고 산처럼 무겁게 덕을 기른다고 한다. 

역시 1961년 작으로 짐작되는 『D-82-26』도 어떤 그림인지 오랜 시간 궁금했었다. 왜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흑갈색의 여성을 중심으로 아래는 노란색, 위에는 청록색을 칠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지인 삼재를 염두에 두고 이 그림을 보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노란색은 하늘(天), 가운데 여성은 사람(人), 그리고 청록색은 땅(地)을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김종영은 천지인 삼재를 이런 식의 그림으로 그려본 것이 아닌가 싶다.

『work65-1』은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인데, 지금까지는 한옥의 처마 혹은 빨랫방망이에서 모티브를 빌린 것으로 설명해왔다. 물론 가능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핀 주역의 논리, 천지인 삼재, 천원지방의 형태 등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한자 ‘仁’ 혹은 ‘王’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仁을 파자(破字)하면 人과 二가 합친 것이고, 王은 天, 人, 地 삼재를 관통하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65-4』는 김종영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채색한 작품이다. 김종영은 노트에 “원재(原材)에 착색을 하게 되면 재료의 특색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작품은 공간에서 힘을 더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라고 메모한 바 있다. 그렇다면 김종영이 작품에 착색한 이유는 명확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착색을 통해 공간에서의 효과를 검토하고자 시도한 첫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형태는 1950년대 말 몬드리안 풍의 풍경화 연구와 나무를 연구한 드로잉이 합쳐진 듯하다. 수직의 형태에 녹색과 노란색을 채색한 것으로 봐서 12벽괘(辟卦 주역의 괘를 1년 4계절과 12달에 배치) 가운데 여름의 (음력 4월, 건괘, 6양식음, ䷀) 상징에서 비롯되었다는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즉, 6개의 수직 형태의 중첩은 여름에 만물이 생성하는 기운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여름을 상징하는 녹색과 양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김종영이 사용한 빨간색, 파란색, 흰색, 검정도 이런 관점에서 살펴봐야 되리라 생각한다.

『작품70-2』는 그동안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혹은 미니멀리즘에서 영향받은 작품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주역의 복괘(復卦 ䷗)로 볼 수도 있고, 천원지방에서 비롯된 땅으로 볼 수도 있다. 복괘는 계절로 말하면 동짓달로 얼어붙은 땅 아래에서 새로운 생명이 봄을 기다리며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상태(一陽의 회복)를 말한다. 또한 지방(地方), 즉 땅은 사각형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복괘와 지방에서 중첩되는 것은 새 생명의 잉태한 대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평평한 형태가 아니라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간 형태로 공간을 품고 있는 듯한 형태로 제작했으리라 본다. 김종영은 그해 이와 같은 형태로 3점을 더 제작하였다.

『작품71-1』은 작지만, 유기적인 형태로 제작한 『생성』만큼이나 변화무쌍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주위를 돌며 감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면에서 보면 마치 두 사람이 정답게 포옹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 달리 보면 요철(凹凸)로 이루어진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양인 철(凸)이 뒤집혀 있고, 그 위에 음인 요(凹)가 얹혀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주역에서 말하는 지천 태괘(地天 泰卦 ䷊)의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원형은 1958년 『꿈』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신관

3전시실
전시된 조각 작품들은 김종영의 말기 작품이다. 극도로 표현이 절제된 작품들로 김종영이 추구한 ‘不刻의 미’의 정수를 살필 수 있다. 김종영에 따르면 옛사람들이 ‘불각의 미’를 숭상하는 것은 뜻을 중히 여겼기 때문인데, 현대 서구 미술이 작가의 정신적 태도를 중히 여기기 때문에 동양의 불각의 미와 상통한다고 봤다. 바꿔 말하면 동양과 서양미술이 비록 시차는 있지만 이제 사의(寫意), 즉 뜻을 그린다는 공통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불각의 미를 추구한 김종영은 기술과 작품의 형식은 가능한 단순한 것이 좋다고 봤다. 따라서 김종영의 작품은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고 말한 바와 같이 절제한 표현이기 때문에 서구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work79-14』는 계곡이나 강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자연석이다. 아마도 김종영이 어딘가 갔다가 마음에 드는 돌을 우연히 발견해서 가지고 오지 않았나 싶다. 이 작품을 보면 두 작품이 떠오른다. 1971년 남한산성에 갔다 우연히 발견한 전(塼) 돌을 가지고 와서 시멘트에 고정한 작품과 1976년 작으로 김종영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일종의 레디메이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맷돌 아랫돌을 세워 놓은 작품이다. 회색 시멘틀 틀에 검은색 전 돌을 고정한 작품은 마치 음(⚋)과 양(⚊)의 효(爻)같이 보이고, 맷돌을 세워 놓은 작품은 태극() 형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work79-14』는 약간의 가공을 했다. 마치 두 개의 유기체 덩어리가 합쳐져서 하나의 돌이 된 듯하게 보이도록 홈(線)을 냈다. 최소한의 가공으로 음양 조화의 원리를 토대로 조형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work80-5』는 김종영의 세 번째 ‘자각상’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최종태 명예 관장으로부터 이 작품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김종영 작고 후 작품 정리하는데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누가 작품이 아닌 줄 알고 무심결에 버리려 해서 얼른 챙겼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첫인상을 대변하는 일화라 할 수 있겠다. 어떤 나무였었는지 짐작할 수 없으나 최소한의 가공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자각상인데 단지 나무 조각하나만 붙여 코를 만들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은 생략했다. 김종영은 서예 작품으로 정이(程頤)의 「사잠(四箴)」을 남겼는데, 이 자각상이 바로 사잠상(四箴像)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사잠은 시잠(視箴, 보지 않음), 언잠(言箴, 말하지 않음), 청잠(聽箴, 듣지 않음), 동잠(動箴, 움직이지 않음)이다. 그래서 마치 장자가 일컫는 무기(無己), 상아(喪我), 망아(忘我), 좌망(坐忘)의 경지를 엿보게 된다. 

『work80-6』도 별반 가공하지 않은 듯 보이는 작품이다.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어긋나게 포개 놓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김종영 작품 가운데 ‘불각의 미’의 극치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왜 통나무인가? 노자 28장에서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이 된다고 했고, 32장에서 도는 통나무처럼 질박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통나무는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라 할 수 있고, 모든 가능성의 잠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통나무(一)를 반으로 쪼개 포갠 것(二)으로 봐서 이 작품은 도(道)와 음양의 조화에 의한 생성의 원리를 시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2전시실
김종영이 소장했던 책들로 출판연도는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이며, 모두 일본어판이다. 당시 최신 서구 미술 담론과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들 대부분이 상당한 시차를 두고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음을 고려하면 김종영의 독서 편력은 남다른 점이 있다. 현재 미술관에는 김종영이 생전에 본 일본 미술 잡지 『미술 수첩』을 보관하고 있고, 1980년대 서울대학교 조소과 사무실에 『미술 수첩』이 있었던 것으로 봐서 김종영은 최신 미술 관련 서적에 대한 정보를 『미술 수첩』을 통해 얻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김종영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은 노트에 따로 번역해 놓았다. 대표적인 예가 김종영이 1980년 조각 작품집에 게재한 자서(自書)에 정리한 「인생 예술 사랑」에서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다.”라는 마지막 명제이다. 수잔 랭거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한 문단을 노트에 번역한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김종영이 작고한 1982년에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다.



1 전시실
본관 3 전시실에 전시된 작품들이 어떤 변주를 거치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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