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뉴욕 유대인박물관 ‘루이스 부르주아: 프로이트의 딸’ 전시. 잠시 억눌려 있던 정신분석학이 이 전시회에서 부활한 듯하다. 이 전시는 기형적이다. 부르주아의 섬뜩한 조각, 그림, 드로잉 등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전시되고, 부르주아의 메모나 일기가 82쪽이나 전시됐다. 텍스트가 주를 이룬 가운데 가끔씩 작품이 전시되니 실제로 주객이 전도된 전시회다.
부르주아의 삶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될 모든 요소들이 있다. 성애화 된 어린 시절, 깨지기 쉬웠던 어머니와 동맹, 냉온을 오간 아버지와 관계 등. 1932년 부르주아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부르주아는 어머니의 사망을 늘 부재했고 바람둥이였던 아버지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아버지와는 정 반대 타입”이라는 남자와 결혼한다. 신혼부부는 맨해튼으로 이주했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부르주아의 작품은 모호하고 비틀린 조각에 ‘아버지의 파괴’와 같은 전혀 모호하지 않은 제목이 달려 있었다.
전시회는 “내 예술은 나의 정신분석”이라는 부르주아의 주장을 여러 차례 상기시킨다. 그의 작품들이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위로하기 위한 치료 목적도 일정 부분 갖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 큐레이터이자 2002년부터 부르주아 사망 때까지 그녀의 아키비스트(archivist)였던 필립 라라트-스미스는 “내 예술은 나의 정신분석”이라는 부르주아의 말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라라트-스미스는 부르주아 작품의 근간에 정신분석학을 놓기를 원한다. 70년에 이르는 부르주아의 예술 세계는 ‘오이디푸스적 대립(Oedipal deadlock)’을 겪으며 세상에 드러난 한 알의 진주와 같은 것이라고, 라라트-스미스는 강조했다. 이어 “부르주아가 보여준 독보적 언어 이용 능력은 그를 첼리니, 들라크루와, 반 고흐, 아르토와 같은 예술가-문필가 반열에 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보적”의 구체적 의미가 확실치는 않으나, 라라트-스미스가 부르주아의 글들이 중요한 문학적 가치를 갖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수십 쪽에 이르는 이 글들은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간결하지만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편지에, 혹은 무아지경으로 몰아 내리치는 듯한 아르트로의 매니페스토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라라트-스미스가 고른 부르주아의 메모들은 독보적 글들이라기보다는, 프로이트적 분석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남동생을 향한 것인가, 나는/ 거세의 욕구를 느낀다.” 혹은 “난 말 그대로 살아가거나 기능하지 못한다 / 아버지의 보호가 없다면”이라고 부르주아는 썼다.
라라트-스미스는 부르주아의 “글은 그의 조각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라트-스미스는 부르주아가 부모에 대한 생각을 쓴 구절을 인용한 뒤,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체성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오갔다”고 썼다. “<작은 소녀>나 <피어나는 야누스> 등 조각에서 남성과 여성이 합쳐지는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를 번갈아 오가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이 부르주아의 조각을 그녀의 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프로이트적 요소를 “찾기 위해”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 전시회, 그리고 부르주아 사후 여러 평가에서 빠져있는 것은 비판적 시각이다. 지나치게 자의식적인 신화화 시키는 해석들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조각가 부르주아와, 부르주아가 창작 활동을 통해 연기하고 만들어낸 캐릭터를 구별하는 것이다. 비평가 로버트 스토어는 만들어진 캐릭터를 ‘루이스’ 캐릭터고 지칭했다. 라라트-스미스 해석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은둔자이며 한 주일에 한 번 정신분석가를 만나기 위해 동굴에서 나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르주아는 창작활동 첫 40년간은 명성을 좇았고, 나머지 30년간은 영리하게 그 명성을 지켜냈다. 부르주아는 늘 뭔가를 원하는 비평가들에게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나, 이론적인 흥밋거리를 제공했다. 농부가 닭들에게 모이를 흩뿌리듯 말이다.
만약 부르주아의 작품들이 프로이트적 정신분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면, 프로이트 주의자들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세 개의 머리(이드, 에고, 슈퍼에고를 상징?)를 가진 인물 <히스테리칼>은(2001년) 전시회의 주제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볼수록 프로이트적 해석은 약해진다. 대신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건 병적인 핑크 빛깔과, 인물의 눈에서 번쩍이는 악의성이다. 유리 케이스 밑에서는 아편의 악취가 날 것 만 같다. 그리고 해석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해석을 거부하는 뒤샹적인 도발성도 느껴진다.
전시회 '루이스 부르주아: 프로이트의 딸'이 어떤 원칙을 주장할수록, 부르주아의 작품들은 꼬마 도깨비처럼 반항한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더 강력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이, 부르주아도 여전히 그의 아키비스트보다 몇 걸음 더 앞선 것이다.
*전시회 ‘루이스 부르주아: 프로이트의 딸’은 뉴욕 유대인 박물관에서 2021년 5월 21일부터 9월 12일까지 열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