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식은 한국 추상회화 1세대 작가이자 교육자이다. 평생 책을 가까이하며 강연·글쓰기로 현대미술의 확산과 정착에 힘썼다. 선집은 생전에 한 권만 출간됐었다. 그의 깊이 있는 사유와 현대미술에 대한 통찰을 접할 『예술의 밀어』는 출간되지 못한 쪽이다. 비평가·이론가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기존에 묶인 적 없는 호흡 긴 글과 세 권의 에세이에서 뽑은 글이다. 논고는 한문·영문·한글을 혼용하여 독해가 어려웠다. 때문에 한글 표기를 기본으로 한문·영문은 병기하고, 설명을 보충해 접하는 어려움을 줄였다.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성격의 2권은 『화가의 수적』 개정판으로, 일상과 당대 문화예술인과의 교우관계, 자전적 에세이 등이 담겼다. 머리말의 뜻을 살려 제목을 바꿨다.
책소개
“나는 이것을 가장 인간적인 예술 형태라고 믿고 있다!”
한국 추상화 1세대 작가인 극재 정점식(1917~2009) 화백의 미술에세이 선집(選集) 두 권이 나왔다. ‘정점식 미술에세이 선집 1’은 내용이 비교적 전문적인 『예술의 밀어』이고, ‘선집 2’는 대중적인 경향의 『삶의 평형과 예술』이다.
두 권의 미술에세이 선집
대구와 일본 교토, 만주 하얼빈 등지에서 미술과 깊은 연을 맺으며 ‘참 어려운 시대’에도 붓을 꺾지 않은 저자는 모던아트협회(1957~63), 신상회(1964~69), 창작미협(1974~77)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15회의 개인전과 수많은 단체전에 출품했다. 2022년부터, 도솔문화원(유족 설립)과 대구미술관의 공동 제정으로 ‘정점식미술이론상’을 매년 시행하고 있다.
화가로서는 드물게 문재(文才)까지 겸비한 저자는 생전에 네 권의 미술에세이집을 상재하고, 다수의 글과 논고를 남겼다. 선집은 문화예술에 밝은 비평가이자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에세이스트로서 저자의 면모를 압축해 보여 주며,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인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평생 책을 가까이한 저자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1963~70)이었을 만큼 동서고금의 미술은 물론 문학을 비롯한 예술 문화 전반에 밝았다. 미술에 대한 이해가 바닥이었던 시절, 대구지역에서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국내외 미술계의 동향을 알리는 한편 낯선 현대미술의 확산과 정착에 공을 들였다. 특히 청탁을 받아 쓴 글들은 학술지와 학보, 언론매체 곳곳에 실렸다. 그 글들 중 일부를 엄선하여 두 권의 선집으로 갈무리했다.
『예술의 밀어』
‘선집 1’, 『예술의 밀어』는 작가로서보다 비평가이자 이론가로서 조형예술과 작가의 작품세계, 대중문화를 사유하는 저자의 비평적 안목을 볼 수 있는 호흡이 긴 글들이다.
1장은 전통과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생각이다. 저자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한국적인 것을 만들 수 있다며, 전제로 사대주의에 물들지 않은 주체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한국미의 재발견」). 이 전통의 근거리에는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있다. 서민생활이 낳은 질박한 민중예술을 이끄는 아마추어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물질화·기계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잃고 사는 소박한 꿈과 인간적인 체온을 일깨운다(「민중예술과 사회의식」).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서구사회가 보여준, 아마추어 화가들의 비합리적인 유희에서 받은 충격적인 현상에 밀착하며, 자발적이며 무상적인 아마추어 정신에서 현대의 현시욕이나 물질욕과 같은 마귀를 몰아낼 인사이트를 건넨다(「아마추어리즘과 자발성의 유희」).
2장은 국내외 작가 6인의 작품세계다. 섬세한 안목과 밀도 있는 문장으로 감각한 샘 프랜시스의 순수추상(「액션 페인팅과 샘 프랜시스의 타시즘의 의미」), 피카소 예술의 혁명을 배양한 ‘청색시대’에 대한 주목과 죽음에 대한 애도(「피카소의 혁명과 서거」), 한 저택의 거실에서 만난 김창렬의 물방울과 이우환의 묵적(墨跡)이 낳은 동서의 시공간에 대한 유장한 사유(「기다리는 공간과 스쳐가는 시간」), 숱한 실험과 모험으로 숙성시킨 곽인식의 정밀한 회화 세계(「아름다운 정밀의 회화」), 난세에 예술의 정도를 지킨 서화가(書畵家) 죽농 서동균의 삶과 서화세계(「먹의 정밀과 그윽한 품격」), 등 저자는 동서고금의 예술과 문사철을 바탕으로 작품의 의미와 의의를 수려한 필치로 우려낸다.
3장은 국내외 미술의 동향이다. 미술이론가로서 저자의 사유를 확인할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 에두아르 마네, 폴 고갱, 앙리 마티스, 그리고 폴 클레, 잭슨 폴록 같은 캘리그래피 스타일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들이 동경한 동양의 공간사상과 초월의식(「근대 회화의 전개와 오리엔탈리즘」),을 짚어낸 저자는, 이어서 예술의 미래에 대한 예측(「2000년대의 미술」)은 물론 팝아트나 포토리얼리즘으로 본 미국 미술의 리얼리즘과 극사실 전통과 경향(「미국 미술의 극사실성과 그 전통」)을 톺아본다. 그리고 개항 100년 동안 펼쳐진 국내 서양화의 동향을 살피고(「개항 100년, 신미술(서양화)의 동향」), 1952년 6·25전쟁 시기의 미술계를 결산(「저회하는 자아도취」)한다. 후배 작가들에게 보내는 선배 작가로서의 애정 어린 조언(「현대미술제의 득실」)도 곁들였다.
4장은 조형예술과 대중문화에 관한 사색이다. 저자는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달이 초래한 대중문화의 확산과 그로 인한 조형의 혼란상을 통해 동양의 서양화(西洋化)에 따라 우리와 단절된 동양의 예술적 유산을 돌이켜보고 그로부터 출구 모색을 제안한다(「대중문화 속에서의 조형예술의 가치관 문제」). 또 상상력과 기술 사이에 선 예술가의 고민은 언제나 클 수밖에 없는데, 이 고민의 연장선에서 기술과 인간, 이미지와 기술의 관계를 넓고 깊게 반추한다(「조형예술에 있어서의 기술과 상상력의 문제」). 예술원에서 발표한 글(「대중문화와 예술」)에서도 대중문화와 예술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펼친다. 특히 기하학적 추상이 보여 주는 중성적인 미의 질서와 예술의 비물질화, 팝아트의 진군을 좇으며, 삶의 평형상태 유지에 필요한 예술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한다.
이 책에는 저자의 현대미술가로서 전통에 대한 생각, 자발성과 유희에 주목한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긍정, 대중문화의 확산과 조형예술의 대응에 대한 통찰, 그리고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해석, 공감이 함께한다.
선집 출간의 의의
이들 선집은 ‘삶의 평형을 위한 대용물’로서, ‘예술의 밀어’를 다채롭게 추출하여 예술과 삶의 가치를 쇄신시킨다. 선집은 저자의 탄탄한 견해를 유폐시키지 않고, 사회를 향해 방사하는 데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와의 교감이다. 예술과 인간에 대한 탐구, 예술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낳은 저자의 글은 마음의 부적(符籍)으로서 예술의 효능을 일깨우며, 사람들을 삶의 평형상태로 인도한다. 독자는 저자의 사유와 교감하면서 인식의 확장과 미의식의 개안을 경험할 수 있다.
둘째, 여전히 빛나는 통찰이다. 깊은 사색과 그것을 받아안는 밀도 높은 문장은 디지털시대에도 광채를 잃지 않으며 독자를 드넓은 사색의 장으로 이끈다. 이런 글은 지식을 체계화한 이론가의 그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직접 예술적 과제를 껴안고 자기만의 해법을 찾아가는 고민 속에 숙성시킨 것이어서, 일반적인 비평가의 글과는 체질이 다르다. 미술이론과 미술사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것을 품은 채, 다른 지점으로 독자를 데려가는 힘이 있다.
셋째, 작품세계를 위한 서브텍스트이다. 생전에 출간한 4권의 에세이집은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 따라서 접근이 쉽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선집은 읽을거리로서의 효능 외에, 저자의 예술세계와 속 깊은 소통의 장으로 기능한다. 작가로서, 저자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붓을 들었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 갔는지, 그 근원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넷째, 자료적인 가치다.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글의 씌어진 맥락을 알 수 있게 관련 정보를 추가했다. 예컨대, 유치환 시인과의 시화전 준비 과정에서 행방불명이 된 작품 이야기는 일일이 시기를 밝혀서 사건의 해상도를 높였다. 또 70년대를 뜨겁게 했던 대구현대미술제와 1952년 부산 시청 벽화 사태 등은 관련 정보를 곁들여,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더불어, 내용에 언급된 일부 도판을 찾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바로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수정·보완하여 자료적인 활용 가치를 높였다.
해박한 지식과 앞선 예술관
저자는 줄곧 대구지역에서 후학 양성과 화업에 정진한 탓에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평생 ‘돈 안 되는 그림’(추상화)을 그리며 ‘관객 없는 곳에서 외줄타기’를 했던 그를 두고 미술평론가 김윤수(1936~2018, 전 국립현대미술관장)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정점식 화백은 드물게 보이는 학구파로서 한국에서 모더니즘이 채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에 현대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앞선 예술관을 견지하시고 모더니즘 계열의 회화를 그려 주목을 받았고 그만큼 한국 현대회화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가 중앙화단에서 활동했다면 일찍이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크게 조명을 받았을 것입니다.”(『2004 올해의 작가: 정점식』 도록에서)
이 선집은 저자의 마음이고 정신이다. 그 속에 작가이자 비평가, 교육자로서 예술과 문화, 삶에 대한 고민과 사색, 수행하듯이 펼친 예술의 길이 있다. 저자가 남긴, 각고의 사색과 통찰은 이제 우리 모두의 자산이다. 『예술의 밀어』와 『삶의 평형과 예술』은 저자의 예술적 성취와 사유를 나누기 위한 정지(整地) 작업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의식〔詩〕을” 일깨우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예술은 예술가의 자기 목적적인 행위이다. 예술가의 이런 자기 목적적인 행위에서 태어나는 작품은 작가의 자아 속에서 멈춰지고 유폐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통해 사회를 향해서 방사하고 인간에게 자유로운 공감의 호흡을 숨쉬게 하는 공기와 같은 것을 공급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의식〔詩〕을 일깨워주며, 여기에서 작가와의 공감의 세계가 전개된다.”(「조형의 밀어」에서)
지은이 | 정점식 (克哉 鄭點植, 1917~2009).
1917년 경북 성주생. 제1회 남조선미술전람회(1936)에 입상(입선)하고, 일본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만주 하얼빈 시절, 일본 문화학원 교수로 알려진 쓰다 세이슈를 만나 작업에 자신을 얻는다. 해방 이듬해에 6년간의 하얼빈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귀향한다. 6·25전쟁 때, 대구로 피난 온 문화예술계의 주요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예술에 눈뜨고 작가적 기반을 넓힌다.
모던아트협회(1957∼63), 신상회(1964∼69), 한국미술평론가협회(1964∼70), 창작미협(1974∼77) 회원으로 활동했다. 개인전 15회를 열었고, 국전 초대작가·운영위원 역임(1974∼95), 한국현대작가초대전(1974∼94), 아시아국제전 초대작가(1987∼95), 대한민국 미술의해 한국대표작가 파리초대전(1995) 등 참여했다. 대한민국청년비엔날레 운영위원장(1998∼2000), 이인성미술상 운영위원장(1999∼2000) 등으로 활동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2004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명예교수 및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대학원 교수 역임, 계명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박사(명예) 학위를 받았다.
경상북도 문화상(1959), 은관문화훈장(1998), 이동훈미술상(2005), 대한민국예술원상(2009) 등을 수상했다.
저술로는 미술에세이집 『아트로포스의 가위』(1981), 『현실과 허상』(1985), 『선택의 지혜』(1993), 『화가의 수적』(2002) 이 있다.
2009년 타계 후, 2022년부터 ‘정점식미술이론상 제정, 매년 시행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1장. 선택의 지혜
아트로포스의 가위/ 평형을 잃은 생활/ 배움의 자세/ 수적(手迹)/ 우울한 광장/ 여성과 의복/ 두려운 스승/ 내가 신비에 눈뜰 때/ 댄디즘과 멋/ 골동품 취미/ 황지(荒地)/ 웅덩이에 숨은 비밀/ 불편한 관계/ 문명과 하수구/ 화장의 미학
2장. 무상의 작업
무상의 작업/ 중섭의 에로티시즘/ 붉은색을 가장 잘 쓰는 화가―이인성의 화업/ 아름다운 만남―맥타가드 교수 고희에/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청마 유치환 영전에/예술가의 사명/ 예술가의 기벽/ 2차적 현실/ 불모의 뿌리와 토양/ 예술과 인생의 함수관계/ 파괴와 창조―<젊은 세대전>에 부쳐/ 과학기술과 예술/ 만화와 시사성
3장. 현실과 허상
잃어버린 찬가/ 안개 속의 언어/나상(裸像)의 미학/우울한 속신(俗信)들/ 몸의 사회학
4장. 나의 삶 나의 그림
예술의 독학적 경험주의―자서적 단상/ 영상과 실상/ 가을의 이미지/ 난세를 견디는 주술로서의 예술―구작과 신작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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