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박항률 개인전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
주 최 가나아트
장 소 Space 97 | 가나아트센터 1층 (서울시 종로구 평창 30길 28)
일 시 2025. 10. 24 (금) – 2025. 11. 16 (금) (총 24일간)
출 품 작 품 회화 20여 점, 조각 10여 점
2013년 가나아트 부산에서의 전시 이후 1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
1980-90년대 브론즈 조각, 목탄 드로잉 포함 30여 점 출품
한층 완숙해진 시(時)적 서정미가 돋보이는 신작 공개
전시 제목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 2020년 발표한 시집 일부에서 따온 것
박항률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명상(瞑想)
화면 속 인물들이 지닌 명상의 화두는 한마디로 자연과의 합일(合一)
박항률에게 작업은 치유와 회복의 언어이자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삶의 방식
인간의 내면과 존재에 대한 탐구를 추구해 온 박항률의 작가적 태도 고찰
“그림은 화려한 치장을 벗겨내고 삶의 원형으로 환원되기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가나아트는 단아한 색채와 서정적인 표현을 통해 고요하고 사색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박항률(Park Hangryul, b. 1950- )의 개인전,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을 2025년 10월 24일부터 11월 16일까지 가나아트센터 ‘SPACE 97’에서 개최한다. 박항률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를 돌아보는 본 전시는 인간의 내면과 존재에 대한 탐구를 추구해 온 박항률의 작가적 태도를 고찰하는 계기가 되고자 기획되었다. 2013년 가나아트 부산에서의 전시 이후 1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으로, 이번 전시에는 2025년 신작 및 1980-90년대 브론즈 조각, 목탄 드로잉 등을 포함해 3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된다.
“오늘도 붓끝으로 시를 그린다. 그림이 시가 되기를, 혹은 시가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박항률
195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박항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박항률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미니멀한 형태와 색채의 기하학적 추상 및 오브제가 주를 이뤘으나, 1991년 출간한 첫 시집 <비공간의 삶> 이후부터 구상으로 화풍이 변모하였다. 추상에서 구상으로의 이러한 대담한 변화는 그의 문학적 감수성에서 비롯되었다. 화가이자 시인인 박항률은 70년대 초반부터 시 쓰기와 회화 작업을 병행해 왔으며, 절제된 언어로 여백을 만들고 상상의 공간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그 둘은 닮아 있다.
박항률의 작업은 시(詩)적이다. 박항률은 시적 언어와 회화적 형상성을 결합하는데 남다른 탁월함이 있으며 단순한 구도, 부드러운 색감, 서정적인 터치에서 평화로움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박항률은 자연과 교감하는 명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했다. 작업 초기에는 청색의 색조를 많이 다루었으나, 최근에는 전반적으로 붉은색이나 핑크색 등 따뜻한 색조가 두드러지는 작업을 선보인다. 박항률은 추상 작업을 하던 당시 사용하던 기법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여러 원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빚어 낸 다음,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뿌린 물감을 키친타월로 닦아낸 후 한지를 이용해 다시 물감을 찍어 낸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여러 겹의 물감을 얇게 쌓아 올려 색을 중첩시키는 방식은 화면에 부드럽고 은은한 색채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나는 색(色)을 기(氣)라고 생각한다. 화가의 기운일 수도 있고, 색 자체의 기운일 수도 있다. 건강할 때 좋은 색이 나오고 건강이 좋지 않을 때나 우울할 때는 탁하고 안 좋은 색이 나온다.”
-박항률
전시 제목인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은 2020년 발표한 시집 <별들의 놀이터>에 실린 시의 일부에서 따온 것으로 박항률 특유의 서정성과 시적 정취가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한층 완숙해진 시적 서정미가 돋보이는 박항률의 대표작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그의 회화 작업뿐 아니라 조각, 드로잉을 포함해 그간 출간한 시집 또한 출품된다. 오랜만에 선보이는 신작들은 전작에 비해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로 바뀌었으며, 이전보다 맑고 선명해진 색채가 화면을 채운다.
주요 작품인 <새벽>(2025)은 화면 측면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다소곳하게 앉아 있고, 꽃이 핀 나뭇가지, 새와 나비 모두 한 방향을 향해 있다. 화면 속 소녀는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바라보는 듯하지만 표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그저 고요히 침묵할 뿐이다. 박항률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凝視)하고 성찰하여 그 성찰이 깊은 명상에 이르게 한다. 작품 제목인 ‘새벽’은 단순히 하나의 시간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박항률은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경계의 시간을 포착하여, 그가 탐구해 온 인간 존재의 내면과 사색의 깊이를 표현했다. 정적인 응시의 순간을 담고 있는 <기다림>(2025)은 화면 속 소녀가 바라보는 시선의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꽃이 활짝 핀 나뭇가지 옆에 앉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한 단정한 소녀의 옆모습, 머리 위에 앉은 새가 한 편의 시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맑고 선명한 색채들로 인해 밝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낮 꿈>(2010)은 까까머리를 한 소년이 커다란 바위에 걸터 누워 잠들어 있는 듯한데, 화면 속 인물의 시선이 드물게 정면을 향해 있다. 단순한 구도로 여백의 미가 느껴지며, 아스라한 질감이 느껴지는 서늘한 청색, 회색 등의 절제된 색채 사용으로 고요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 작품 제목인 ‘낮 꿈’은 다소 모순적인데, 낮이라는 현실적 시간대와 꿈이라는 비현실적 세계가 공존하게 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원형의 형태로 존재하게 만들었다. <낮 꿈>은 동양적 정서와 서정성이 깊이 스민 작품이다. 브론즈로 제작된 작품인 <소년 부처>(2002)는 박항률과 가깝게 지내던 법정 스님(法頂, 1932-2010)이 좋아하던 조각이다. 2000년경 길상사를 방문한 박항률에게 법정 스님이 진공(眞空)이라는 법명을 지어주며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박항률은 법정 스님에게 단발머리 소녀를 그린 그림을 선물했는데 이를 본 법정 스님이 단발머리 소녀에게 ‘봉순이’라는 애칭을 붙였고, 이후 제작한 <소년 부처> 조각을 본 후에는 “봉순이에게 오빠가 생겼다”며 ‘봉순이 오빠’라는 애칭을 붙였다고 한다.
“정오라는 찰나, 그 찰나는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찰나에도 명상할 수 있다. 낮에 살포시 조는 ‘낮 꿈(Daydream)’도 명상의 순간이다. 새벽도 마찬가지다. 나는 새벽이라는 짧은 순간에도 명상하면서 깨어 있을 수 있는 인간의 표정을 그리고 싶다.”
-박항률
박항률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명상(瞑想)’이다. 1994년부터 30여 년간 명상을 통해 삶의 진리를 탐구해 온 박항률은 고교 시절 겪은 사촌 누이의 죽음과 대학 시절 겪은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박항률은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면에 침잠해 있는 상념들을 작품 속에 녹여내 보는 이로 하여금 관조에서 나오는 애수(哀愁)와 아득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박항률 작품 속 특정 대상들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철학적이기도 하다. 작업 초기 그가 즐겨 그린 ‘소녀’는 그의 사촌 누이와 어머니를 반영한 형상이었으나, 점차 특정 인물을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인간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화면 속 인물들은 그 안에서 무엇인가와 조우하기를 기다리는 듯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정적인 상태로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인물의 실루엣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간결한 형태로 표현한다. 인물의 자세 정면은 1인칭, 45도 각도의 반측면은 2인칭, 측면은 3인칭으로, 즉 ‘내가 너’이고, ‘그가 나’이며, ‘네가 그’일 수 있는 합일의 찰나를 표현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박항률은 객체와 주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다시 존재를 의식하게 하고자 했다. 박항률은 ‘나’라는 존재를 한 화폭에 하나의 인물을 통해 다양한 존재의 ‘나’를 나타내고 있으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그린다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다른 사람을 모델로 그리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그리는 것이다. 내 존재에 대한 다양성을 드러내고 비쳐본다고 할 수 있다. 내 속에는 소년도 있고 소녀도 존재한다.”
-박항률
또한 박항률은 새, 꽃, 나무, 나비 등 친숙한 자연 소재를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으며, 이 밖에도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고구려 벽화 속 상상의 동물들- 인면조(人面鳥), 비어 (飛魚), 천마(天馬)는 시공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자연 속을 부유하고 있다. 박항률 특유의 부드러운 색조와 정적인 묘사로 만들어낸 동화적 세계는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자연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그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다. 박항률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화면 속 인물들이 지닌 명상의 화두는 한마디로 자연과의 합일(合一)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연과 같이 호흡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어우러진 인간의 모습, 바로 그것이 명상의 화두다. 나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박항률
박항률은 오랜 시간 투병중인 아내를 곁에서 돌보며,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사랑의 본질을 깊이 응시했다. 그는 아내와의 사별(死別) 이후, 한동안 붓을 들지 못했으나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박항률에게 작업은 슬픔을 감추는 수단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언어이자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박항률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에게 시집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을 잊지 않았고, 아내를 향한 깊은 애정과 그리움을 담아 시집 <별들의 놀이터>(2020)를 발표했다. 소설가 박완서(Park Wansuh, 1931-2011)는 “박항률 작품은 문학적 감수성과 회화적 형상이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내 일생 중 가장 힘들고 참담했던 시절을 그의 따뜻한 그림으로 위로 받았다.”고 말했다. 가나아트는 《달빛과 별빛이 속삭이는 곳》을 개최하며, 명상을 통해 저마다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궁극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원형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