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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여성작가회 제26회 정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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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없는 미술사’와 한국화 여성작가 - 젠더와 탈식민 

김병수 |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나는 무엇보다도 한국을 이해해온 언어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 •••  
한국을 이해할 언어를 새롭게 발명할 때가 왔다.” 
-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역사가가 세상에 제공하는 이미지는 백미러로 보이는 이미지다.”  
- 존 루이스 개디스, 『역사의 풍경-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



예술동일론과 전체주의. 모든 예술이 동일하다는 것은 보편적이기보다 오히려 전체주의에 의한 폭력이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상황 속에 우리는 있다. 예술의 본질은 무엇일까? 예술철학은 예술작품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그것들은 예술가를 위한 물건이나 표현 수단에 불과할까? 그것들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젠더 차원에서 예술을 물을 수는 없을까? 아니,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의미를 드러내는 장소가 아닐까? 

나는 미학이라는 학문과 미술평론이라는 문학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서있는 사람으로서 한국화와 여성이라는 타자를 고민한다. 그러다가 ‘남자없는 미술사’를 떠올렸다. 가능할까? 그래서 우선 도록을 보려고 했다. 텍스트와 이미지로 그 이야기 혹은 담론이 가능할까 살피려는 의도로. 그런데 그 둘이 반드시 어떤 상응, 일치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대개 전체에서 개별을 파악하고, 다시 개별을 언급한 후 전체를 정리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심지어 가끔은 자신의 이념을 강조하기도하는데 이 모임, 혹은 전시에 대한 이전의 태도들 또한 예외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모두를 약간씩 언급하면서 내가 제시한 제목을 진행하고자 한다.  

젠더와 글로벌 그리고 한국화. 여기에 우리의 관심과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젠더로서 한국화를 물을 수는 없을까? 2025년 4월호 《아트인컬처》에서는 ‘광복 80년 한국미술 80년’을 테마로 다루면서 그 첫번째 분야에 한국화를 선정했다. 여기에서는 앙케트를 실시했는데 “광복 80년 연재 특집에 참여하는 아트인컬처 필진, 미술사가, 미술평론가, 공립 미술관의 관장 및 학예실장, 독립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신문 잡지의 시니어 언론인” 90여 명에게 앙케트를 의뢰해 80명에게 응답을 받았다고 밝혔다. 총 추천 작가는 127명인데 성별은 남성 86명(66%), 여성 44명(34%)이다. 그리고 “세대가 내려올수록 여성 비율이 높아졌다”고 한다. 탈식민과 젠더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가부장적 미학에서 제국은 식민과 섞인다. 서양미학에서 캐논에 대한 비판이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전통 혹은 로컬로서 작동하면서 그 비대칭성을 드러낸다. 이제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세계미학보다는 행성으로서 지구미학이 필요하다. 이때 좀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한국화 여성작가’가 요청된다. 

1988년에 <한국화 논의가 겉도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유홍준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어보면 어떨까? “‘오늘날 한국화가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는 무엇인가?’라는 논의는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면서 여러 차례 글을 쓰고 토론회에 참석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소견이란 소견은 이미 다 털어놓은 셈인데, 이제 또 한국화의 과제를 논하려 하니 일 자체가 짜증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느 독자가 이런 제목의 글을 읽어주고 어느 한국화가가 여기에 공감하여 새로운 작가적 성찰의 계기를 가져줄까 의심스러워 도시 흥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한국화를 건드린 언급은 많은 것 같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그 정체가 불명확한 때문이다. 중국화와 중국화론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고 우리 옛 그림과 문헌을 거기에 덧붙여 쓰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이든 한국화에 대한 이론인지 혹은 관찰인지 말하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한국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나는 관심이 많다. 그런데 18세기에 미학이 발명 또는 발견되었을 때 그 기초에 놓인 생각은 예술은 미에 기여하고, 그러므로 심미안을 가진 사람에게 쾌를 준다는 것이었다. 한국화라는 스타일이 이런 미적 효과를 드러낸다고 해서 그것을 한국화로 단정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화인가? 아직 확정되거나 결정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같다. 그리고 또한 모순되는 관찰과 언급 그리고 이론들이 나와있다. 그러면서 한국화가/작가/예술가들이 직접 갤러리와 아트페어 그리고 비엔날레 등에 작품을 들고 전시와 판매를 진행하고 있는게 보인다. 어떤 성질이 한국화의 정의의 일부가 되려면 존재하는 모든 한국화 작품에 속해 있어야 한다.  

젠더와 탈식민주의, 그리고 한국화 여성작가의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현대 미술사와 평론은 전통적으로 남성중심의 시각과 담론에 치우쳐 왔다. 그러나 최근인 2022년 케이티 헤셀이 《남자없는 미술사》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이렇게 여성작가와 여성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미술사적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성별 구분을 넘어, 미술사 내에서 여성작가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미학을 어떻게 구축하고, 기존 권력 구조와 어떻게 대립하는지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특히, 젠더는 미술작품의 의미와 해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미술사와 평론의 재구성에 있어 필수적인 관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화의 정체성 역시 젠더 관점에서 재해석이 필요하다. 전통적 한국화는 남성 중심의 미학과 권력 구조 속에서 형성되어 왔으며, 여성작가들은 이러한 전통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목소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젠더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화는, 전통과 현대, 로컬과 글로벌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중요한 흐름이다. 이는 단순히 기법이나 미적 효과를 넘어, 젠더와 권력, 정체성의 문제를 작품 속에 녹여내는 작업이다. 탈식민주의 역시 젠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제국주의적 미학과 권력 구조는 종종 성별 역할과 정체성을 왜곡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으며, 이는 동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권 미술사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지구미학’ 또는 ‘행성미학’의 개념이 필요하며, 이는 다양한 젠더 정체성과 문화적 차이를 포용하는 새로운 미학적 시각을 제시한다. 특히, 젠더와,탈식민주의를 결합한 관점은, 미술작품이 갖는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재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화에 있어서도, ‘한국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젠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유럽에서18세기 미학이 형성될 당시, 예술은 미를 추구하고 쾌락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젠더와 권력, 정체성의 문제를 포함하는 복합적 의미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화는 단순한 미적 효과를 넘어, 젠더 감수성과 탈식민적 맥락에 서 재해석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한국화의 본질과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현재 한국화는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 등에서 활발히 전시되고 있으며, 이는 젠더와 정체성의 문제를 반영하는 새로운 한국화의 흐름이 기도 하다. ‘한국화’라는 개념이 모든 작품을 포괄하는 포괄적 기준이 되기 위해서는, 작품들이 갖는 젠더적 의미와 탈식민적 맥락이 반영된 미학적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전통적 기법이나 미적 효과를 넘어, 젠더와 권력, 정체성의 문제를 작품 속에 녹여내는 새로운 한국화의 모습이 될 것이다. 

예술은 인공이지만 억지스러우면 안된다. 혹시 이걸 자연이라는 낱말로 떼우는 것은 아닐까? 테크놀로지와 마음그리고 예술로 이어질 수 있는 논리와 마음을 한국화는 잊은 것이 아닐까? 작가 각자 마음 속에 있는 한국화에 대한 관념은 무엇일까? 그저 말할 수 없는 세계일까? 더구나 정확히 누군가에게 말할 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은 무엇일까? 가끔은 일종의 민속(품)으로 이해된다. 한국화는 민속(품)인가? 그런데 여기 계시는 모두는 예술가이다. 이 차이를 누가 증명할 수 있을까?  

2000년 한국화 여성작가 창립전 도록 작가 분류는 추상, 자연, 풍경, 인물 4개이다. 그 제목이 한자로 표기된게 이채롭다. 그리고 그 시대의 예술을 잠깐 소개하면 정말 어리둥절했다. 2001년 발간한 《새로운 예술론 - 21세기 한국문화의 전망》을 읽어보자. 목차가 이렇다.  

Ⅰ장
1.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예술 -최정호
2. 20세기는 어떤 세기였는가:문학사적 특성 -차하순
3. 영상과 그 세계: 오늘의 문화적 상황 -김우창
4. 민족문화와 인류문명 -조동일
5. 고대와 새 예술 -김지하

Ⅱ장
1. 왜 '새로운 예술'인가 -정중헌
2. '새로운 예술'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김성곤
3. 새것의 헌 얼굴: 현란한 새로운 폐허에서 -김열규
4. 새로움에 대한 역설적 성찰과 가능성의 모색 -한명희
5. 풍자와 해탈 그리고 새로운 시적 사유 -김상환

Ⅲ장
1. 이야기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 상호작용적 서사예술 -박명진
2. 디지털 미디어의 의의와 중요성 -김주환
3. 하이퍼텍스트 소설의 분석 및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 -최혜실
4. 새로운 예술? 디지털과 감성융합! -정진홍
5. 가상현실과 새로운 예술 -김형곤
6. '새로운 예술'의 중심축으로서의 디지털 리터러시 -성완경
7. 인터액티브 네트워크 아트 -이돈응

Ⅳ장

1. 혼혈과 제3의 예술 -김정옥
2. 음악극의 조건과 신창극의 개발 -서연호
3. 21세기의 민족예술과 시민사회 -김명곤
4. 21세기 춤예술의 전망 -김태원
5. 21세기의 영상예술: 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이상면
6. 21세기의 문화-영상매체의 주역 애니메이션 -이원복
7. 예술과 기술-사물놀이 로봇 -권혁찬

Ⅴ장
1. 현대미술의 동향과 국제전 -오광수
2. 새 밀레니엄과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 -박정기
3. 21세기 국제미술계의 흐름과 한국 현대미술의 위 -박경미
4. 예술의 일반론적 당위성 -전수천
5. "지금 이곳"에서의 '새로운 예술' -이영욱
6. 非패러다임의 동아시아 도시건축 -김진애

Ⅵ장
1. 남북한 문화교류와 그 통합 -권영민
2. 남북 문화교류 흑요석 찾아내기 -김영기
3. 정보예술의 발전과 육성과제 -박은주

Ⅶ장
1. 지역에서의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 -최근배
2. 새로운 예술과 전통문화의 창조 -장정룡
3. 문화의 흐름과 새로운 예술의 전망 -손종호
4. 안동지방에서의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 -김원길
5. 제주를 음악의 섬으로 -강문칠

Ⅷ장
1. '새로운 예술의 해'에 바란다 -김종휘
2. 새로운 예술·젊은 예술을 위한 정책 -안이영노

Ⅸ장
1. ZKM:디지털 시대의 바우하우스?: 페터 바이벨에게 듣는다 -최정호
2. 진보와 아방가르드의 붕괴: 레지스 드브레에게 듣는다 -박명진
3. "나는 모짜르트를 듣고 노자를 읽는다": 지에르지 콘라드에게 듣는다 -최정호
4. 디지털 영상예술:해독과 해석의 체험으로부터 감각과 놀이적 체험으로: 앤드류 달리에게 듣는다 -박명진
5. 새것과 옛것의 변증법: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에게 듣는다 -최정호

Ⅹ장
내일의 과거:21세기를 위한 서시 -고은  

여기에 여자는 없다. 페미니즘에 대한 내용이 열 개의 장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젠더를 묻게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데올로기로 비난하지 말고 보고나서 말해달라는 말들을 한다. 작년 봄에 출간된 주디스 버틀러《누가 젠더를 두려워 하는가?》를 두고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미학과 젠더/젠더와 미학을 위해 읽기 시작했다. “왜 젠더를 두려워하는가? 적어도 미국에서는 최근까지 이 용어가 상대적으로 평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는 양식의 확인란을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으며, 우리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한다. 물론 우리중 일부는 확인란을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상자가 더 많거나 전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성별 상자를 확인하라는 요청을 받는 것에 대해 다르게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젠더’가 여성의 불평등을 논하는 방식이라고 의심하거나 이 단어가 ‘여성’과 동의어라고 추정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동성애’를 지칭하는 은밀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섹스’를 출생시 생물학적 또는 법적 임무와 연관시키고 ‘젠더’를 사회문화적 형태의 생성과 연관시켜 두 가지를 구별했지만 일부에서는 ‘젠더’가 ‘섹스’를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추정한다. 동시에 페미니스트와 젠더 연구 분야의 다른 학자들은 어떤 정의와구별이 옳은 지에 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 이 단어에 대한 무수히 계속되는 논쟁은 젠더를 정의하거나 이해하는데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젠더와 한국화의 관계에 대하여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전에 그 실천이 있었다. 그것이 ‘한국화 여성작가회 창립’이라고 생각한다. 


“창립전에 즈음하여 
오랜 바램이던 한국화를 전공하는 여성 작가들의 모임인 한국화 여성작가회가 창립되어 그 첫 작품전을 갖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고 있는 새 천년이 열리는 때에 새삼 여성 남성 구별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라 생각되기 쉬우나 이번 전시회를 통해 우리 여성작가들이 갖고 있는 기량과  역량를 한껏 선보여 그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전시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참여 작가 한분 한분이 현 한국화 화단에서 나름대로 자리매김 하고있는 분들이라 이 전시회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전시회가 규방문화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면면히 계승 유지 시켜온 선배 여성작가들에게는 보람을 드리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긍지를 갖게하며 한국화를 전공하려는 후배들에게는 희망과  자극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참해 주신 회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리고 적극 후원해 주신 문화 관광부, 서울특별시와 협찬해 주신 (주)서울벽지에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0. 7 
한국화여성작가회 회장 김춘옥” 

한국화여성작가회 창립 20년후인 2020년 발간된 발레티나 그랑데가 쓰고 에바 로세티가 그린 그래픽 평전 《페미니스트 아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결코 주인공이 아니지요. 그저 대상일 뿐 … 성적인 대상물.그렇다면 여성 미술가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장점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제시된다. “성공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작업할 수 있다는 장점! 다른 사람의 작품 속에 당신의 아이디어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되고요. 당신의 경력은 빛을 발할 거예요. 80살이 넘으면 말이죠. 직업여성의 길과 엄마의 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다. 당신이 무엇을 만들든, 그건 언제나 ‘여성의’, ‘자의식적’이라는 꼬리표를 얻게 될 테지. 천재라고 불리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하는 일이란 결단코 없고!” 
 
동양화와 한국화 그리고 여성작가, 이 관계 속에서 드러나거나 만들어진 회화는 그 의미가 뭘까? “동양화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라고 할 수 있다. 서양화가 이입되고 근대적 제도로서의 미술 전시(살롱)가 이루어짐으로써 전통적인 회화 양식을 서양화에 대비해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1900년대에 들어오기 전에는 서양화에 대해서 상대적인 개념으로 동양화가 사용되었다. 그것이 1887년 경에 들어오면서 동양화 대신에 일본화가 대체되면서 동양이란 말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동양화대신 일본화가 양화의 상대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국가 체제의 확립과 미술 제도화의 완성이 전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탈아입구의 구화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서양화에 상대하는 존재로서의 일본화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일본화가 동양화의 일부가 아니라 서양화에 상대함으로써 국민국가의 회화로서 당당함을 주장할 수있었다는 것이다. 예술이념보다는 국가논리가 앞서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오광수)  

화론으로 이루어진 회화가 존재할까?
“따라서 시각예술 내에서 동시성은 ‘가장 최근의’라는 시간적 상태가 아닌 제도적 동시성 상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 다소 잠정적인 제안이지만 - 동시성을 공존의 상태로 보는 개념과 동시성을 시간적 현재, 즉 ‘지금’으로 보는 개념 사이에 명확한 단절이 필요하다. 동시성에 대한 ‘지금’이라는 이해를 무시하고 공존이라는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현재에 창작된 예술작품이 거의 포함되지 않는 현대미술전시를 상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국제적’ 현대미술, ‘국제적’ 현대미술, 또는 ‘글로벌’ 현대미술이라는  형용사는 이미 현대미술 자체의 개념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질적으로 ‘다른’ 예술작품들의 동시성을 자동적으로 수반하는 현상으로 내재되어있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적’ 현대미술, ‘국제적’ 현대미술,  또는 ‘글로벌’ 현대미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없을 수 있다. 이러한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는 작품 자체와 관련이 없고 오로지 제도적 맥락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이는 형식적 동시성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술 기관(글로벌 예술계)의  세계화와  ‘동시대’라는 개념의 세계적 원칙으로 인해 현대미술을 형식적 차원에서 세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측면  모두 현대미술작품의 선언이라는 담론적 패러다임에 속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세계적이지만, 구체적인 예술적 발언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현대미술은 자동적으로 형식적으로 세계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반대로,  어떤 예술작품이 주제적 차원에서 세계적인지 판단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로테 필립센, 《글로벌화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이런 상황에서한국화는 현대성을 형식적으로 모색할 수 있을까? 주제적이라는 것은 소재주의가 아닐까? 그러면  무얼로 한국화를 정의하고 동시대성을 획득할까? 여기에서 젠더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이 지점이야말로 역사성과 동시대성이 공존하는 예리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차이점은 종종 무시되어왔다. 전세계가 이미지로 기술적으로 네트워크화되는 추세속에서, 기존의 문화와 또는 문화간 이해의 문제는 문자 그대로 가려졌다. 예를 들어, 예술 분야에서는 완전히 다른 “예술” 개념이  서로 충돌했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세계적 성격은 서양과 비서양의 예술 개념 모두를 다양한 기준에 노출시켰고, 이에 따라 예술작품을 분류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따로 보호구역이 없었다. 약육강식과는 다른 자연을 떠올리면서 생태계라는 단어로 위로하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물론 여전히 그 흔적들은 남아있다. 문화와 예술이 산업이 되는 시대에 한국화는 어떤 생존을 기획하고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예술의 개념은 2000년 이래로 상당히 다양화되었으며, 미술사의 종말을 논의했던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은 이를 포괄적인 전시회인  《글로벌 컨템포러리와 새로운 예술세계의 부상》(2011)에서 기록했다. 아마도 20세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술의 카드가 다시 섞였다. 예술계에 구속력 있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논의 끝에 유럽과 미국에서 각 세대가 합의한 바이다. 서양의 관점에서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 문화와 국가에서는 ‘근대성’과 ‘전통’의 대조가 다르게 정의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동아시아 회화미학의 전통과 근대성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핵심은 서구문화의 헤게모니가 억압하거나 무시하는 바로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통과 근대성이라는 두 개념이 자본주의의 추상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전통에는 자기성찰적 메커니즘을, 근대에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회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통이라는 용어에 현존하는 실천의 구체성을 부여하고, 작은 특수성들을 새롭고 현대적인 형태로 진정으로 확장해야 한다 . 또한 동시에 근대라는 용어에 덜 획일적이고, 덜 형식적이며, 더 나아가 덜 제도적인 지위를 부여하여 적어도 한때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실험적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선구적 개념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만 ‘글로벌 사우스’처럼 제3세계 문화는 대안 문화로서의 가치를 정당화하기 시작할 수 있다. 유럽과 미국의 예술 스타일과는 다른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른바 서양미술사와 모더니티의 양태와는 다른 것이 가능할까? 또 묻는다, 아직 “동양화/한국화”를 그 이름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한국화: 유명론과 실재론 사이. 화론과 실제 그림들 사이에서 지금 한국화는 활동한다. 2017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전시를 계기로 발간한 《20세기 ‘한국화’의 역사》 사건과 이슈 1위는 ‘한국화’ 용어에 대한 논쟁이었다.그래서 나는 이미 <‘한국화’의 탈영토화를 꿈꾸며>를 썼었다. 동양화, 한국화, 그리고 회화와 현대미술, 이 가운데우리는 어떤 미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유일한 참된 반복은, 삶의 창조적 차이를 영원히 재긍정한다는 점에서, 차이의 반복이다. 철학과 예술은, 만일 그것들이 새로운 사유행위와 함께 차이의 도전을 회복할 수 있다면, 영원한것들의 역능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절대적인 탈영토화를 약속할 것이다. 단순히 이러저러한 도그마나 이미지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이미지들의 자유로운 흐름과 무한한 창조 자체로서의 탈영토화를 말이다.”(클레어 콜브룩)한국화와 동양화는 어떻게 다른가? 동양에 의한 회화라는 의미의 동양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근대국가 명칭에 따른 국적 있는 회화로서 한국화는 정부가 보증하는 예술 양식을 의미하는가? 이미 여러 곳에서 동양화와 한국화의명칭이 발생하는 경로에 대한 추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금증들을 그 용어 해설들은 풀어주지못했다.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 등에서 모두 그렇겠지만 특히 회화에서는 개인의 감정과 민족의 사상을 어떤 매개 없이 직접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시대의 정신을 회화 속에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대정신은 회화 안에 담겨지는 모든 예술의 피와 살이며, 색과 향이다. 시대정신이 없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요 허위의 예술이다.” 동양화에 관한 한국인 최초의 글이라고 알려진 변영로의 <동양화론>이 192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되었는데 그것을 현대어로 내가 각색한 글이다. 그의 글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의 죽음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면서 구태의연한 우리 미술계를 비판하고 대조적으로 프랑스 살롱의 작품들이나 미래주의 등 서구미술은 높이 평가했다. “비활동적이며 보수적이고 생명이 없는 예술”인 근대의 조선화와는 달리 그것들에는 일상성의 현실감이 있고, 한편에서는 ‘동작’을 담아내려는 적극적인 기법의 모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항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래서 이에 대하여 “일본의 강압적 식민통치 아래에서 서구지향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던 피정복민의 모습과 불안정한 시대의 증거”라는 입장과 함께 검토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동양화가 여전히 동양화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엉뚱해 보일 수도 있는 이 물음은 ‘동양화’ 탄생의 장면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현재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양화는 ‘일본의 동양화’ 명칭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1888년, 교토부화학교(京都府畵學校)가 제1과를 ‘동양화’로 불러 ‘한화(漢畵)’ 즉 중국화인 남종화와 북종화 및 일본화 3파를 총괄하여 호칭하였는데, 그 목적은 제2과인 ‘서양화’와 구별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이 지점이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주의해서 살펴보아야할 곳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불렀던 동양화 속에 근대 일본화와 전통적인 중국화를 함께 포섭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전통과 갱신에의 의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 1182년 에르네스트 페놀로사의 료지회 강연은 일본의 전통 화가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는 일본 전통미술의 우위성을 피력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신일본화 창조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887년 개교한 도쿄미술학교는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으로 회화과를 포함한 4과를 설치한다. 여기에서 회화란, 당시 유럽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와 그 학교의 간사로 있었던 오카쿠라 텐신이 제시한 이념이었다. 즉, 전통기법에 기초하며 옛 그림의 모사를 장려하여 전통화풍의 확립을 추진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일본 전통미술을 개혁하여 국제화를 도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방향 설정이 효과적인지 혹은 그 성과
가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래서 거기서 구성되는 동양화 혹은 일본화가 의미 있는 것이다. 즉, 이는 ‘에이전시’의 문제이다. 그것(들)을 선험적으로 가정하지 않고 행위를 통해서만 그 행위의 주체가 발생한다는 관점 말이다.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 행위의 작동원인이나 매개성, 혹은 행위를 통해 구성된 비본질적 주체성 개념”이 일본화로서 동양화 혹은 동양화로서 일본화이다. “주체의 내적본질은 비어 있고 어떤 매개 장소나 중간 대리 기능만 한다는 의미에서 작동 원인이나 작인으로” 볼 수도 있다. 한마디로 “행위를 통해서만 구성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주체성을 구현하는 존재가 ‘행위주체(agent)'라고 할 수 있다. 일본화는 이렇게 구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화로서 동양화, 혹은 동양화로서 한국화는 가능한가? 미술사학자 김미경과 황상희가 《우리 그림 비평》에서 지적하는 바는 아주 시사적이다. “일본이 자국의 일본화를 간직한 채 식민지 한국에 설치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동양화부(東洋畵部)’를 만들었을 때, 공식적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말이 ‘동양화’다. 즉 <조선미전>에는 일본이 ‘동양화’로 명명하며 포괄했던 남종화와 북종화, 일본화가 있을 뿐 조선회화의 독자적인 영역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동양화’가 식민지 조선인과 일본인이 모두 출품할 수 있는 공모부문 명칭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화의 아류이거나 일본화에 부속된 조선회화만이 허용되는 제도적 억제 장치였다.” 역사적인 조건이 이와 같았다면 이후 ‘우리’의 모색은 어떠했을까? 고희동이 서화협회를 결성하면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말했던 것을 들어보자. “이름이야 무엇이구 간에 일만하면 된다는 뜻으로 그냥 하여 버렸었다.” 이러한 증언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조선미전>을 통하여 당시 미술계의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기성 화단을 구축하였던 이들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해방된 이후까지도 국전의 보수계로 확고한 지위를 장악했고 바로 그 작가들의 사고방식과 마음가짐은 일본인들로부터 부여받은 ‘동양화’라는 말에 어떠한 인식 양태를 보였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리고 ‘동양화가’라고 불리며 작업하는 일은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회
의적인 심사가 일지 않을 수 없다.  

왜곡된 식민지 근대화와 그로 인한 미술의 구성은 오늘날 세계화 혹은 전지구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극복될 수 있을까? 아니면, 식민지 근대화와 글로벌리제이션 사이에는 건널수 없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심연은 우리가 저항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예술적 유희와 창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제국미술’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갖추는 것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다문화 예술철학: 그 철학적 공간에 대한 여행 가이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예술과 철학 개념은 서양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미학 역시 유로-아메리카의 전통에서 유래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술과 미학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토착적 ‘어떤’ 것만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을 포용하는 새로운 방식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젠더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젠더적 관점은 전통적 미술사와 미학이 남성중심적이고 이분법적 시각에 치우쳐 있음을 비판하며, 다양한 성별 정체성과 경험(LGBTQ)을 반영하는 새운 미학적 틀을 모색하게 한다. 탈식민주의는 또한, 서구 중심의 미술사와 미학이 식민지와 피식민의 경험을 배제하거나 왜곡하는 문제를 드러내며, 비서구권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Documenta 15”) 로버트 영은 1990년 간행한
《백인의 신화》에서 에드워드 사이드, 가아트리 스피박, 호미 바바의 작업을 “역사적 글쓰기의 새로운 논리학”이라고 평가하며, 이들을 탈식민주의 이론가의 ‘성삼위’로 격찬한다. 특히, 사이드의 1978년 저서 《오리엔탈리즘》은 동아시아, 특히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맥락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방대하고 새로운 해석, 사상과 인간관계에 채워진 제국주의적 족쇄의 결과를 감하고자 하는 학문적 사명으로 가능해진 거리에서 되돌아보면, 《오리엔탈리즘》은 적어도 스스로를 투쟁 속에 활짝 열어 놓았다는 공을 세운 셈이다. 이 투쟁은 ‘서양’과 ‘동양’에서 함께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특히 젠더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동양화 또는 한국화의 담론이 서구 중심적 시각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화’의 과제는 단순히 전통적 기법이나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젠더적 관점과 탈식민적 시각을 통해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화의 역사와 담론이 남성중심적 이고, 특정 계층이나 정체성에 치우쳐 형성된 경우, 이는 다양한 젠더 정체성과 경험을 배제하는 문제를 내포한다.

따라서, 젠더와 탈식민주의는 한국화의 재창조와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한국화’라는 지정학적 미학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 맥락에서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을 포용하는 포스트콜로니얼 미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다양한 포스트콜로니얼 논의에서 언급된 ‘동’과 ‘서’의 개념이 관습적이고 역사적-문화적 구성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객관적 현실’로 남아 있다는 점은, 우리가 젠더와 탈식민주의를 통해 ‘동서’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야 함을 보여준다. 즉, ‘미완성’의 미학, 또는 개방적 미학은 젠더와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더욱 풍부하게 재해석될 수 있다. 《동양의 미학》을 쓴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동양 산수화의 ‘미완성’은 개방성과 유연성을 상징하며, 이는 서구의 완성주의적 미학과는 다른, 포용적이고 유동적인 미학”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동양 회화는 미완성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젠더와 탈식민주의적 관점이 이 미학적 논의에 깊이 관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한국화’와 같은 전통적 미술 담론은, 젠더와 탈식민주의적 시각을 통해 재구성되고 확장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재해석을 넘어, 글로벌 시대의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을 포용하는 포스트콜로니얼 미학의 실천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우리가 미술을 통해 ‘타자’와 ‘자기’의 경계를 넘어서고, 더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미학적 공간을 만들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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