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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이영복 :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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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창원 이영복 개인전
한국의 소나무
永遠을 살고 있는 소나무 觀照

2013년 10월 10일(목) - 10월 21일(월)




蒼園과 단호사 赤龍松
朴 喜 璡  | 시인·예술원 회원

창원(蒼園) 이영복(李英馥)은 소나무 화가로서 아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일반 애호가들에겐 그림을 접할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기에, 이번에 열릴 대대적인 소나무 개인전은 화단뿐 아니라 일반 애호가들의 오랜 대망에 부응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바 크다.

그의 첫 번째 소나무 개인전은 1997년 그러니까 벌써 16년 전에 공창화랑의 기획초대로 덕원미술관에서 열렸던 것이다. 당시의 카탈로그 『산과 소나무』를 펼쳐보면 월악산이나 월출산 또는 설악산 말고도 중국의 명산인 황산(黃山)의 그림에다 그의 주특기의 하나라 할 억새의 그림까지 실려 있어 산수화가 이영복의 알찬 기량과 스케일이 괄목할 만한 수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물론 전시회의 주종을 이룬 것은 역시 소나무 그림들인 것이다. 이천의 유명한 반룡송(蟠龍松)이나 청령포의 관음송, 또는 예천의 석송령(石松靈)이라든가 단호사의 적룡송(赤龍松), 선암사의 침굉송(枕肱松) 등 명품송을 비롯하여 여러 기송, 묘송들의 걸출한 모양새가 잘도 묘파되어 소나무 특유의 왕성한 생명력과 기운생동의 묘(妙)를 과시하고 있음을 본다. 소나무 화가 이영복의 명성은 분명 이때에 확립된 것이리라. 이래 그는 산발적으로나마 단체전 등을 통해 소나무 그림들의 수작을 간간이 선보여 왔음으로 이 땅의 대표적인 소나무화가라는 평가는 차츰 무게를 더해 갔다.

그것이 이번 16년 만에 열릴 제2회 소나무 개인전에 이르러선 거의 폭발적인 압도적 광망을 뿜게 될 듯하다. 필시 화단에 획기적인 큰 쾌거로 화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로화가로서의 그의 오랜 경력과 축적된 실력을 아는 분들에겐 그리 놀라운 일이 못되고 오히려 당연한 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는 지금까지 열세 번의 개인전과 수많은 단체전, 특별전 등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해 왔다. 그 첫출발은 1955년의 일이었다. 그가 겨우 중학교 3학년 때 그는 제4회 국전에 입선된다. 「홍성교외」라는 한국화였다. 불과 16세의 천재소년화가! 너무 일찍 찾아온 조숙과 성공에 그는 처음 자만에 빠져 들뜨기도 했겠지만 용케 그 위기를 넘긴다. 그뒤 그는 꾸준히 자기극복과 정화의 길을 걸어 화가의 길 또한 다름 아닌 수행자의 길임을 깨닫는다. 서서히 그러나 게으름은 안 피우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길만이 예술가로서 가야할 활로(活路)임을 그는 일찌감치 터득해 온 것이다.

창원은 올해 76세다. 그런데 놀랍게도 완벽한 건강체다. 몸에 군살이라곤 없다. 안색이 좋은 데다 주름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십년은 더 젊어 보일밖에. 비결을 물었더니 그는 요즘도 일찍 일어나서 댁 근처인 인왕산 자락을 한 시간쯤 조깅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수십년째 지속해 왔다 한다. 나는 탄복했다. 그가 늙어도 늙지 않는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었구나. 천재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심신관리법이라고 할까, 생활기술을 가지고 있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사실 창원이 그런 건강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지켜낼 의지가 없었다면 아마 오늘의 창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나무를 소나무답게 하는 몇가지 특성 중 핵심이 되는 특성 하나만을 들라고 하면, 그것은 소나무의 왕성한 생명력, 달리 말하자면 완숙을 향한 자기 추구의 의지력이 될 것이다. 창원에겐 그런 의지력이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어져 있는 게 아닐까? 소나무에는 만고상청의 기개가 있는데 그런 생명력, 그런 의지력이 부족한 화가라면 어떻게 소나무를 그릴 수 있겠는가?
소나무는 언제 어디서나 소나무로서의 높은 격과 운치를 잃지 않는 나무중의 귀공자다. 무상하기 짝이 없는 이승에 살면서도 소나무는 오롯이 영원을 살고 있다. 그 불요불굴의 자기동일성을 우리 인간은 배워야 할 것이다. 창원도 그런 소나무에 매료되어 그 본질 탐구에 힘써 온 것이리라. 하지만 소나무는 그 불가사의의 본질을 쉽사리 아무에게나 보여주진 않는다. 도통한 견자(見者)에겐 일목요연이겠지만, 아직 오리무중의 초심자에겐 여러 번의 시행착오, 암중모색이 주어질밖에 없다. 왜 소나무 그리기란 이처럼 어렵고도 어려운 것일까?

다행히 창원에겐 그런 암중모색이 오래 가진 않았다. 어느날 그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주 좋은 스승을 만나 홀연 개오의 기쁨을 누린다. 그것이 바로 단호사의 적룡송이었던 것. 창원과 적룡송, 그것은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적룡송 통해 창원은 비로소 소나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게 된다. 이른바 개안(開眼)이 된 것이다. 눈동자를 덮었던 두터운 비늘이 떨어져 나갔다. 명경지수의 마음과 눈을 갖고 적룡송 대하니 비로소 소나무의 무궁무진한 본질과 특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소나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는 것, 빈 마음으로 보고 또 본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보면 볼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소나무의 자태에서 그는 새삼 의욕과 용기가 샘솟았다. 신명이 났다. 그 뒤 그는 해마다 한두 번은 반드시 적룡송을 찾았고 그 이모저모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빠트리기 싫어 생각난 김에 이 자리에 덧붙인다. 창원은 특히 살아 꿈틀대는 적룡의 몸체에서 번뜩이는 용린(龍鱗)에 주목했다. 그렇구나, 용비늘 잘 그려야 소나무를 소나무답게 하는 수피(樹皮)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겠구나. 수피의 모양도 실은 다양해서 용비늘만이 그 전부는 아니다. 거북등의 마름모꼴, 그냥 길죽길죽한 네모꼴도 있거니와……희미한 것, 뚜렷한 것, 켜켜이 일어선 것, 그 어는 것이나 그리기 어렵지만, 수피를 실감나게 잘 그려야 소나무가 산다는 창원의 의견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창원의 남다른 적룡송 사랑을 알게 된 나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참 좋은 인연이네요. 화가에겐 그런 무궁무진한 탐구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을 아무리 보고 아무리 그려도 직성이 안 풀리고, 아니 볼수록 그릴수록 새록새록 다가오는 신비의 대상이. 앞으로 적룡송을 천 장 쯤 그리세요. 그리고 그중 마음에 드는 것 백장쯤 골라 창원의 적룡송 화첩을 엮는다면 필시 후세에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창원의 모든 소나무 그림에는 이 단호사 적룡송이 원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소나무에겐 분명 영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소나무는 여느 나무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높은 격과 운치가 있다. 더구나 명품송, 수백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노송을 살펴보면 그 주변 분위기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이 아니라 4차원쯤에 진입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 탈속한 노송이 풍기는 현묘(玄妙)한 분위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 소나무는 차라리 초송(超松)이요 신송(神松)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모자를 벗고 경건히 예배를 드리고 싶어진다.

범속한 화가, 눈에서 비늘이 안 떨어진 화가라면 이런 소나무를 그릴 수 없다. 도통한 화가만이 도통한 소나무를 그릴 수 있겠기에. 저 신라의 솔거가 그린 신품, 황룡사의 노송도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별도로 치고, 겸재나 단원이나 이인상, 이인문 등 명화가들의 소나무 그림들이 도통한 소나무로 칭송 받는 것은 바로 그것들이 도통한 화가들 솜씨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전 창원의 전화 받고 그의 아틀리에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동안 그려놓은 소나무 그림들을 와서 미리 좀 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십여 점은 표구상의 마지막 손질이 안 끝나서 그날은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서너 점 500호 내외의 대작은 볼 수 있었으니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중 맨 마지막에 보았던 대작 「단호사 적룡송 서설(瑞雪)」은 걸작 중의 걸작으로 아마 길이 잊을 수 없으리라.

오백 호가 넘을 듯한 큰화폭을 그득히 채운 적룡송 서설이 그야말로 실물대로 다가왔다. 이미 그 실물을 나는 여러 번 보았을 터인데 눈 덮인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선지 그만큼 우람하고 대단히 신선했다. 자세히 살피니 그 백설 표현은 화선지에다 백색 물감을 칠한 게 아니라 화선지 본래의 바탕색 그대로를 살린 것이었다. 낏낏이 일어선 진초록 솔잎들이 그 안에 서설을 고이 품어서 한결 생동하는 기운을 뿜고 있다. 살아 있는 용인 양 세차게 꿈틀대는 굵은 줄기의 용비늘에도 아주 살짝 서설이 덮여 있다. 그러한 서설의 애무를 받아 적룡은 더욱 신나는 모양. 땅바닥에도 온통 흰 눈인데, 한쪽 가지 아래 보기 좋게 청태 낀 노석(老石)이 하나 웅크리고 있다. 머리에 몇 그루 난쟁이 조릿대 (조리를 만들 때 쓰이는 작고 가는 대)를 얹고 있는 것이 잘 어울려서 운치를 더해 준다.

하늘 한 모서리가 날이 개이려는지 약간 푸른 기색이 돌고 있다. 더는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완벽한 구도에 절묘한 채색이 균형과 조화를 얻고 있어 아쉬운 데가 없다. 하늘. 땅. 소나무가 하나의 기운으로 꿰뚫려 있는 신운생동(神韻生動)의 경지인 것이다. 그림 전체에서 뿜는 상서로운 기운이 너무도 순수하고 강렬한 것이어서 보면 볼수록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 같다. 바로 지금 이 적룡송 서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리라.

나는 한참을 황홀 도취 속에 말을 잃었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창원은 지금까지 무수한 소나무 그림을 그렸지만, 이것이야말로 최고 최대의 대표작이 되겠어요! 이런 걸작을 보여준 창원께 감사드립니다. ‘대표작’이란 말의 참뜻을 나는 지금 실감하고 있습니다. 한 화가의 대표작이란 그가 지금까지 갈고닦아온 신명의 전부, 재능과 기량과 노력의 전부, 그의 전신전령(全身全靈)의 에너지를 온통 남김없이 쏟아 부은 결과지요”

이날 내가 구경한 것에는 몇 소나무 대작 말고도 창원이 오래전부터 그려서 모아 온 방방곡곡의 묘송, 기송들의 스케치북이 있다. 그 스케치 실력이 대단했다. 그 기기묘묘한 가지의 뻗음새나 낏낏한 솔잎들의 정치(精緻)한 예리함이 진한 먹빛으로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는 걸 보니 연필이나 세필로 그린 것은 아닌 듯하였다. 물어보니 그것은 창원의 독특한 발명이었다. 흔히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버들개지의 가지를 꺾어 날카롭게 만든 끝으로 먹물을 찍어 그린 것이기에, 세필이나 연필로는 그런 효과가 안 나온다고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성력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에겐 길이 열리는가.

창원은 이렇듯 매사에 성의와 노력을 다하는, 섬세하면서도 치밀한 화가다. 남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하기 짝이 없다. 흐리멍텅한 것은 용납을 못한다. 그런 올곧은 기질을 가졌기에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완벽성을 지향하며, 거기에 기어이 도달하려는 무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상 모든 예술에 있어서 완벽성이란 지상목표가 아닐 수 없다. 예술 작품은 완벽을 기해야만 비로소 존재성을 획득할 터이므로.

하지만 이 완벽성을 뒷받침 해주는 건 남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노력의 축적인 것이다. 피눈물 나는 연습의 되풀이, 목숨을 건 집중과 지속의 정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란 걸 간과하지 말 일이다.

나는 지금 다시 한 번 내가 보았던 창원의 대표작, 「단호사 적룡송 서설」을 떠올리며 그때 받은 충격과 감명을 새록새록 되씹고 있다. 벌써부터 10월 10일의 개막일이 기다려진다. 빨리 오너라, 10월 10일이여. 그때엔 장안의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누릴 희유의 안복((眼福)을 어서 마음껏 누려보고 싶구나.



오광수 | 미술평론가

소나무는 예부터 문인사대부들이 좋아하는 수종이자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나무이다. 우리나라 산야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것이 소나무이고 풍광이 뛰어난 곳에는 으례소나무가 의젓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근래에 와서는 도심에도 심심치 않게 엿볼 수 있다. 당연히 우리의 옛 그림 에도 소나무는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소나무를 즐겨 다루는 화가들이 늘고 있다.

창원 이영복의 소나무 사생은 역사가 오래다. 아마 그만큼 소나무를 오랫동안 다루어온 화가도 없지 않을 까 생각된다. 70년대부터 전국 각지의 소나무를 찾았고, 1997년 <산과 소나무>란 명제의 개인전을 가진 이후 그의 화면 중심을 이루어 온 것이 소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40년을 넘는 세월에 걸쳐 소나무를 사생해왔다는 것은 그의 화가로서의 독특한 집념을 보여주는 단면이자 소나무란 소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는 면모이기도 하다.

그는 전국을 누비면서 노송과 솔숲을 찾아 일일이 사생해왔으며 그의 사생 스케치북은 온통 전국의 이름난 소나무들로 메워지고 있다. 어디에 어떤 수종이 있고 어느 곳에 뛰어난 솔숲이 있다는 사실을 훤히 꿰고 있는 편이다. 소나무에 얽힌 사연들도 그만큼 박식한 예도 흔치 않을 듯하다. 그래서 소나무에 대한 강의도 이어지고 있는 편이다. 소재에 대한 단순한 집착이라고 하기에는 소재를 통해 조형적 근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다음의 그의 언급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수형을 가지고 나름대로 각양의 맛을 지니고 있는데 이 모두가 선의 집합적 묘미에서 이루어진다. 여러 수형은 형태에 따라 여러 물상으로 부여되고...... “이 말 속에는 선과 그 선의 집합이 형태로 나아가고 그 형태는 독특한 형상화를 이루어나간다는 동양의 회화의 독특한 전개양상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외형을 사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회화의 근간을 소나무란 소재를 통해 탐구해간다는 것이 간명하게 표명되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만큼 애착의 수종으로 각광받고 있는 예는 따로 없을 것이다. 그 형상에 따라 이름이 부여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연들이 얽혀있어 더욱 소재에 대한 애착을 더하게 하고 있다. 적용송, 등용송, 반용송, 정이품송, 효자송, 관음송, 의암송이니 하는 이름은 보편으로서의 소나무가 아니라 독특한 인격체를 지니는 대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다른 식물이나 수종에서는 볼 수 없는 일면이다. 특히 용의 형상에 대한 이름이 많은 것을 보면 그 형태가 지니는 물상화에서 용트림하듯 휘어져 구비치는 단면이 그 어떤 것보다 극적인 상황을 유도해주고 있기 때문이라 본다.

소나무를 그리는 방식은 화가마다 다르다. 옛 화보에 충실한 관념의 형식으로 다루는가 하면 군집되어있는 솔을 풍경으로서 다루는 경우도 있다. 기본적인 요소만 빌리고 추상화의 형식으로 다루는 예도 있다. 창원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른 것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소재의 외형에서 형상화에 반영된 의인화에 이르기까지 그 진폭이 넓은 편이다. 그런 만큼 단순한 사생의 영역에서 벗어나 감정이입의 대상으로서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저한 사생에 바탕하고 있어 그만큼 리얼리티가 높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현장감이 강하게 전달되는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단순히 그려졌다기보다 화면에서 살아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창원만이 지닌 독자한 형상화의 내면을 엿보게 된다. 대상으로서의 소나무가 아니라 창원의 방법을 통해 되살아난 소나무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천 년의 세월로 이루어진 해후
-창원(蒼園) 이영복 화백

이인평 (시)

그의 화폭 안에서 용이 된 소나무가 꿈틀거린다
제 몸을 유연하게 뒤틀며 천 년의 날숨을 뿜어낸다
솔잎에 구멍 난 바람 소리가
폭포의 물소리처럼 쏴아 하고 들려오는 순간
운무 속으로 사라져 가는 한 마리의 용(龍)!
그가 여덟 폭의 병풍에 그린 ‘단호사(丹湖寺)의 적룡송(赤龍松)’은
어느새 그의 낙관을 물고 하늘을 날고 있다
푸른 기상의 솔바람을 내쉴 때마다
운무의 회오리가 속세의 시야를 걷어내고 있다
그가 소나무를 만나고 소나무가 그를 만난 건
천 년의 세월로 이루어진 해후였으리라
예술혼이 벅차오르듯 한 그의 ‘반룡송(蟠龍松)’을 보면
용이 제 힘을 견딜 수 없어
비늘이 으스러지도록 몸을 감아 조이는 모습 안에서
타고난 그의 애송심(愛松心)의 열정이
용틀임하는 소나무와 함께 팽창하고 있다
솔잎으로 해를 헤아려온 거송들이
송운(松韻)에 취해 시를 읊던 옛 선객들의 자리를 내어 주며
천 년을 흘러온 자신들을 그에게 보여 줄 때마다
맑고 예리하고 부드러운 심성의 눈을 가진 그는
푸르게 흘러오고 흘러갈 삶의 숨결을 보았던 것일까
끝없이 젊은 천 년 소나무들이
그의 화폭에서 솔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 그의 화제(畵題)인 ‘단호사의 적룡송’은 충주 단월동에, ‘반룡송’은 이천 백사면에 있는 소나무.


소나무, 홀로 우뚝하고 더불어 청청하다
김상철 | 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자연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조건인 동시에 예술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을 여하히 바라 볼 것인가에 따라 동서양은 서로 다른 문명과 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서구의 자연관이 인간을 중심으로 한 물질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자연관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인식하며 그것과의 조화를 궁극적인 가치로 여긴다.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 창원(蒼園) 이 영복(李英馥)은 이미 중학 시절 당대 최고 권위의 국전에 입선함으로써 일약 주목받는 신예로 화제를 모으며 화단에 입문하였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배태되고 성숙된 그의 예술은 전적으로 동양적 사유와 사색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다. 작가가 감내한 세월은 전통적 가치의 동양화에서 한국화, 나아가 현대 한국화로의 가치변혁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세태와 시류 속에서도 그의 작업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핵심적 가치는 바로 동양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내밀한 사유였으며, 이는 산수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발현되었다. 주목할 것은 그의 산수화가 고전적인 관념 산수의 정형화된 틀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생을 바탕으로 한 실경 산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한국화라는 명칭이 생경할 당시에 과감히 한국화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관념 일색의 산수화단의 풍토에서 벗어나 부단한 사생을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사실을 보면 그의 자각과 성찰은 이미 분명한 지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여실하다.

비록 산수화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지만 작가로서의 그의 작업은 소나무가 본령을 이룬다.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이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특히 그의 소나무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연륜의 오램과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일궈진 소나무에 대한 각별한 이해가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소나무는 전적으로 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국 각지의 빼어난 소나무를 찾아 나서는 답사는 사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을 찾아 발품을 파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이나 오랜 벗을 찾아 나서는 순례와도 같은 여정이다. 실제 그는 소나무의 뻗고 휘어짐을 통하여 필법의 묘를 취한 바 있고, 오래 묵은 소나무를 찾아 안부를 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대상과의 교감은 바로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고전적 덕목의 구체적 실천인 동시에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는 핵심적인 가치라 할 것이다.

사실 소나무는 예로부터 즐겨 그림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이는 소나무가 지니고 있는 청청하고 우뚝한 기상이 대단히 빼어날 뿐 아니라, 자연물에 특정한 인간적 덕목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동양 회화 특유의 조형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소나무를 통해 절개와 지조를 드러내고, 변치 않는 강건한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천의 가장 보편적인 식생이기에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 ‘겨레 나무’라 불리는 친근한 것이기도 하다. 용의 비늘 같기도 하고, 철갑을 두른 듯 한 웅장한 둥치와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웅자는 그 자체가 신묘하거니와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을 드러낸다. 작가가 소나무에 천착하고 자신의 작업을 결국 소나무로 귀결시킴은 바로 이러한 소나무의 상징과 영성(靈性)에 공감하고 감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소나무는 사생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그 표출은 온유하고 담백함이 특징이다. 수묵은 함축과 절제를 통하여 방만함을 경계하고, 채색은 수묵의 기운을 방해하지 않는 치밀하고 섬세한 경영은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장점이자 특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은 담백하고 편안하나 짜임새가 완강하고 여백이 헛되이 흐름이 없다. 치밀한 사생과 치열한 공간 경영의 결과는 그의 화면 전반에 걸쳐 엄격히 적용되는 준칙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세를 과장하여 취하거나, 혹은 객관적인 형태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기운을 잃는 폐단을 경계하며 소나무가 지니고 있는 온전한 기운을 포착하고 표현하고자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이는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 그 이면을 읽어낸 결과로 외표로 드러나는 생태적 특징은 물론 소나무에 일정한 인성(人性)을 부여하고 대화와 교감을 통해 획득되는 가치인 것이다. 이에 이르면 소나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작가와 대립하는 소재가 아니라 작가와 합일된 의상(意像)의 표출인 셈이다. 더불어 그것은 바로 소나무를 통해 투영되는 작가 자신의 예술과 삶의 또 다른 모양일 것이다.

소나무는 홀로 있으면 우뚝하여 고고하고, 더불어 무리지어 있으면 청청한 기운이 넘쳐난다. 작가는 전국 각지의 노송은 물론 신령스러운 소나무를 망라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일일이 다리품을 팔며 나선 순례의 기록이자 작업의 역정인 셈이다. 우뚝 솟아 늠름한 외경의 자태부터 구부러지고 휘어짐이 자유로워 마치 운필의 묘를 보는 듯 한 기이함에 이르기까지, 또 몸통의 거친 비늘로 천년의 세월을 가늠하며 용틀임하는 기세부터 청청한 솔바람으로 파도를 일으키는 듯 한 기운의 표출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나무는 정녕 영성을 지닌 영물의 실체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사생의 엄밀함이나 기교의 빼어남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정신적 가치와의 교융에 의해 구현되는 독특한 심미적 가치일 것이다. 즉 이는 육안(肉眼)에 의한 관찰의 결과를 심안(心眼)으로 다스려 가공하여 표출함으로써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간(看)의 시각이 아니라 정신적인 관(觀)의 관점의 반영이며, 실(實)에서 진(眞)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에 이르면 소나무는 비록 철저히 객관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이미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개별화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창원의 소나무’인 것이다.

소나무는 정녕 작가로서의 창원의 예술과 삶을 개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소재로서의 소나무가 아니라 그가 일생을 일관되게 견지해 온 동양적 사유의 발현이기도 하다. 더불어 그가 일찍이 자각하였던 우리미술의 정체성과 실체에 대한 그의 사고와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생을 일관된 길을 견지해 온 그의 삶과 예술은 결국 자기만의 소나무를 창출하여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나무 작가로 손꼽는 이유일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상철, 한국화가 창원 이영복,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김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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