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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 : 대지의 숭고미를 담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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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숭고미를 담아낸 작가, 이열





  한국의 이열 작가보다 “대지에 기반을 둔” 작업에 열중하는 작가를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포천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 주변에는 몇 미터에 달하는 자연스런 대지가 펼쳐져있다. 그것은 그의 반추상회화에서 넓게 퍼진 색채로 나타난다. 게다가, 가축과 인간의 형상이나 머리 같은 세속의 근원적 이미지가 담긴 흔적은 색채와 형태의 미묘한 혼합 속에 가시화되고 전체적인 구성 속에 완벽히 통합되어 있다. 

  형식적인 구성과 제스추얼리즘(gestualism)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품들은 수많은 역사적인 유산을 담고 있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서양의 추상회화는 (신적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우주의 완전성과 야만적인 문제나 감정호소, 상처받기 쉬운 육체의 불완전한 일상 사이에 놓은 구분을 가정해왔다. 모든 추상화가들은 (절대주의나 순수주의처럼) 초현실적인 것을 추앙하거나 (입체파나 소용돌이파, 생체표현, 비정형예술, 추상표현주의처럼) 궁극적으로 초현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불확정성에 탐닉했고, 혹은 (신조형주의와 구성주의처럼)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을 화해시키고자 애써왔다. 

  동양의 전통은 예술과 지금-여기에 동등한 양가치성을 부여해왔다. 수 세기에 걸쳐 수묵화는 비가시적인 측면을 강조해왔다. 그러한 예들로는 전경과 후경 사이의 시간관계나 형태와 여백 사이의 대조, 선조들의 주제와 분위기를 닮은 이미지, 시각적 구성요소와 텍스트 사이의 유사성, 그리고 유서 깊은 소재들과 신체적인 붓질을 통해 스스로를 예술가로 드러내는 특성 등이 있다. 그 연쇄 효과는 무시간성의 하나로 나타난다. (생사 가운데, 꽃이 피고 시드는 가운데, 물이 솟구치고 떨어지는 가운데) 순환적으로 반복되는 세계는 멀리 동떨어진 무심한 관점으로 자연의 진리를 구체화한다. 그러나 분명히 동양의 대가들은 나무의 구부러짐이나 저 멀리 있는 어부의 희미한 모습, 미풍에 흔들리는 새의 모습, 여름날의 떠다니는 가느다란 구름 등 소소한 일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한국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세 가지 추상회화의 유형, 즉 (김환기와 박서보의) 패턴화, (단색조 운동의) 평면성, (이우환의) 역동성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역동적인 유형의 작품은 신성이나 세속의 양면성을 포함한 한국의 신화나 지혜문학이 권하는 영적인 상태, 즉 상대적인 고요를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흐름들이 합류된 작가의 작품은 특히 한국의 평면성과 역동성을 서양의 “우발적(contingent)”충동과 결합시키고 있다. 1995년과 2009년 전시 카탈로그에 개제된 비평문에서, 유명한 대학 교수이자 비평가인 김복영은 이열 작가가 자연의 순환과정, 존재와 존재됨의 형이상학, 충만함과 텅빔의 파라독스, 회화적이고 영적인 공간 사이의 상호관계, 그리고 존경받는 조선시대 서예가 추사(1786-1856)를 따르는 형식적인 조화(밝음과 어둠, 두꺼움과 얇음, 수직과 수평)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주장했다. 
   홍익대 미술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작가는 이차 세계대전 이후의 주요 예술 발전에 관심을 보여 왔다. 그는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이나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의 공간적인 기량을 가지고 두꺼운 검정의 직사각형이나 막대, 그리고 둥근 형태 등을 배치하게 된다. 다양한 색조지만 거의 이상적인 색채의 가치를 지닌 비재현적인 형태의 응집이나 분산에서는 아실리 고르키(Ashile Gorky)나 시그마 폴케(Sigmar Polke)의 구성적인 능숙함도 보인다. 또한, 작가의 최근 작품들에서는 극도의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형상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 형상들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괴로워하는 주인공처럼 망각 상태에 사로잡혀 있거나 정형화된 장편 만화의 주인공처럼 대지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올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분법은 (검정과 갈색, 크림색, 그리고 담황색 등으로 가득 찬) 비교적 어두운 톤의 그림들과 밝게 채색된 나무의 동물상들에서 대조적으로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영감을 얻은 중간사이즈의 조각품들은 페티시즘의 격렬함을 가지고 있다. 묘사의 사실성은 그의 회화 표면에 나타난 비자연적인 색조와 광택에 의해 감소된다. 그 창조물들은 길 위의 끌어당김과 영적 세계의 무상함 사이에서 존재론적으로 배회하는 것같이 보인다.

   나아가 이열 작가의 그림이나 조각은 분리해서 생각하건 함께 생각하건 간에, 그것들은 난해하며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어떻게 그렇게 신중한 영적인 추구를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떠한 형태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동물 형상들과 다른 신비로운 매개물들을 통해 우리의 먼 조상들은 그들의 세계에 출몰하는 비가시적인 존재를 회유하고자 했다. 이후, 지적인 분석이 가능해진 문화는 냉혹한 자연의 법칙을 멀리서 통제하는, 하나의 비인격적인 신성을 향한 믿음을 고안해냈다.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유일신의 변주가 이루어진 것처럼, 모든 경우, 인류의 우선적인 임무는 초월적인 존재이건 단순히 궁극적인 생성의 힘이건 간에 그러한 신의 원리를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방식으로 짜 맞추는 것이었다. 화가의 추상회화 역사는 대체로 그러한 목표를 완성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을 시각적인 용어들로 풀어낸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추상화가들은 수도승이나 성직자, 완전히 깨달은 신비학자나 보살 등의 두 가지 범주에 포함된다. 예술계의 수도승과 신비학자는 미적 순수성을 추구하기 위해 일편단심으로 몰두한다. 혹자는 초월적인 의미를 향한 직접적인 접근 수단으로 예술을 간주한다. (요셉 앨버스(Josef Albers), 이브 클랭(Yves Klein),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 바넷 뉴먼(Barnett Newman), 헬렌 프랭컨탤러(Helen Frankenthaler), 그리고 모리스 루이스(Moris Louis)의) 바르게 곧은 선들과 방대한 색면들, 기하학적인 형태들, 그리고 엄격하게 제한된 색조들은 종종 모든 세속적인 혼란들을 배제하는 엄격한 탐색의 도구들로 여겨진다. “내 그림 앞을 지나친 사람들은 내가 그림을 그리며 느꼈던 경험과 동일한 체험을 하는 것이다.”라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말했다. 그의 떠다니는 듯한 부드러운 테두리의 직사각형들은 “비극이나 황홀경, 운명”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전통적인 종파와 맞먹는 대체 종교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념은 애드 리인하르트(Ad Reinhardt)의 “예술은 예술로서의 예술이며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다른 것들이다.”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진술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추상회화의 성직자나 보살들은, 비록 그들이 숭고미를 갈구할지라도, 그들의 동료와의 어울림, 그리고 육신의 촉박하고 혼란스런 자극과의 관련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런 작가들이다.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과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광범위하게 물감을 흩뿌리는 제스추어들, 마크 토비(Mark Tobey)와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의 아주 작게 뒤엉킨 강박적인 표지들, 테오 반 뒤스부르흐(Theo van Doesburg)와 샘 프랜시스(Sam Francis)의 복합적이며 상호간에 활기를 띠는 색채들, 그리고 한스 아르프(Hanse Arp)와 호안 미로(Joan Miró)의 생물적인 교감을 결코 제약하지 않는 비구상적인 형태들. 이것들은 비록 영적인 성장을 추구할 지라도, 이 세계와 평범한 인간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작가들의 특징이다. 

   저 너머가 아니라 일상으로부터 깨달음을 추구한 작가들 사이에 이열 작가 또한 자리한다. 그가 동물 형상들을 새기고 장식하는 가운데 쏟아 부은 확실하고 진솔한 애정은 육체적인 삶이란 측면에서 성적 충동과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고뇌에 대한 적극적인 포옹을 나타낸다. 그의 추상회화에 나타나는 구성의 절제된 복합성은 성숙되고 포괄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밝은 부분은 어둠을 보충하고 강한 표시는 부드러운 색이 지나가면서 중화된다. 물감의 드립과 다른 “우연성”은 작품의 전반적인 계획을 무마시켜버리고 자연스러움과 세심함은 균형 있게 어울린다. 무로부터 탄생한 것처럼 보이는 형태는 그림의 가장자리에 의구심은 남겨둔다. 둥글거나 직선으로 둘러싸인 형태는 평면감과 동시에 무한한 깊이감을 가진 공간에 공존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성취한 평정심을 위한 지시들-혹은 성취한 평정심에 대한 논증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용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중도를 위하여 회피하게 된 극단들, 알고는 있었지만 더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정돈하게 된 삶의 다양성들. 우리는 이것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유서 깊은 동양의 현자들이 제시한 바른 삶을 위한 처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구체화시킨 작가의 그림들에서처럼, 아이러니로 가득 채워진 지금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매력적인 느긋한 도전으로 그것들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리처드 베인(Richard Vine)
아트 인 아메리카 편집장 (Senior Editor, Art in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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