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예술이라는 우리 삶의 프로젝트
하계훈 | 미술평론가
강술생은 지난 20여 년간 작가의 고향인 제주도를 주요 거점으로 삼아 창작활동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생태예술가로 규정한다. ‘생태’라는 개념은 이르게는 2차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시작된, 자연과 인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반영한 개념으로서 대체로 1970년대 이후 본격화 되었다(생태학이란 용어는 이보다 앞서서 일찍이 1866년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지역에 따라 그 시차를 조금씩 달리하기는 하지만 이제 생태에 관한 관심과 논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관련된 전지구적 관심사로서 자리 잡게 됨으로써 우리의 삶에 관한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생태에 관한 관심이 1980년대 초부터 정치 사회적 활동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사회의 획일성을 탈피해가는 국면으로부터 확장되어가면서 점차 환경운동이나 자연보호운동 등으로 그 실체를 형성해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의 독자적인 생명운동으로 그 중요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키워 나아가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에서도 생태운동, 환경운동이 확산됨은 물론이고 미술 분야에서도 이 주제를 자신의 창작 영역으로 삼는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첫 세대를 추적한다면 강술생이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번에 천연기념물 384호인 당처물동굴의 인근 들판에서 진행된 강술생의 퍼포먼스 <우후석순(雨後石筍)>에는 제주의 자연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작업 장소와 재료의 현장성, 그리고 작가와 협업하여 현장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에 동참한 참여자들이 품고 있는 제주도가 작품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바람과 모래와 시간이 만들어내는 우후석순은 동굴의 석순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형성되어가는 과정의 역전(reverse)을 시각적으로 기록해주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참가자나 표현 재료와 공간을 선택하지만 작품의 변천과정과 최종 결과를 구체적으로 확정할 수 없으며 그것을 기획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작품은 바람의 세기, 햇볕의 온도와 강우 여부, 그리고 그 밖의 통제 불가능한 자연 조건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환원과 순환이라는 결과를 향해 수렴해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현장에서 오감의 촉수가 열린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일 수 있다.
이러한 현장성이 기본이 되는 퍼포먼스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충실하게 기록되더라도 현장에서 오감을 통해 느끼는 감동을 온전하게 전달하지는 못한다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작가의 메시지는 현장에 부재한 관람자들에게 보다 현실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제를 동반하여 창조적으로 개입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가 발휘하는 예술성과 퍼포먼스 전달자로서의 기술력, 즉 과학적 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갖춰지면 역설적이게도 관람자들은 현장에서 참여한 참가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부분까지(예를 들어 드론 촬영 영상의 시점과 현장 참여자의 시점의 차이) 보다 효과적으로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갤러리 비오톱에서 열린 전시 <마음의 집>에서 강술생은 <우후석순>과 주제면에서 궤도를 같이 하면서 좀 더 구체적이고 생명과 진화를 사유하는 예술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이미 수년 전부터 작품의 개념과 조형성을 결정하여 이를 환경친화적 재료와 노동집약적 작업으로 전개시켜왔다. 몇 해 전 바닷가에서 발견한 ‘예쁜이해면(Callyspongia elegans)’에서 시작하여 <유기적 리듬>, <마음을 씻다>라는 전시를 통해 일관되게 실행해 온 작업의 연장선에서 열린 <마음의 집>전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우리의 생활환경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 19의 상황을 인용하고 있다. 한정된 실내 공간에 순면의 천과 닥나무죽으로 구성된 재료를 나무 프레임에 중첩시키면서 문지름을 통해 직조의 배열을 해체하여 생명체의 신경조직망과 같은 조형성을 시각화하는 작업은 형식면에서 모노크롬적 단순화와 함께 석양빛의 개입으로 일어나는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하고, 이를 통해서 주제면에서는 자기 내면을 향한 성찰과 생명에 대한 철학적, 미학적 사유로 이끌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태예술가를 포함한 생태운동가들의 지향점은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생명체 사이의 상호관계,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상호 의존적 관계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등에 관한 성찰과 실천일 것이다. 생명을 가진 개체로서의 우리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우리들과 주변 환경 사이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작동하고 그 결과가 발생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의 삶은 물질문명에 대한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발전과 생산력 지상주의적 목표에 함몰되어 때로는 생태주의와 충돌되는 가치를 요구받는다. 따라서 생태예술가의 활동은 때때로 불가피하게 현실 참여적이고, 은폐를 고발한다든지 공격적 주장을 펼침으로써 결과적으로 메시지에 가려진 작품의 미학적인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린 화이트(Lynn White)는 1967년 논문 <우리시대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기원>에서 우리시대의 생태적 위기의 근원은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서양적(기독교적) 근대화 과정에서 찾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철학자이면서 생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은 이러한 생태학과 미학의 부조화를 지적한다. 모튼은 생태학적 관점에서 기후위기와 인류의 생존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를 초래한 지질학적 시기라는 의미로 'Anthropocene'이라는 신조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생태예술에 있어서 자연을 극복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고 양자간의 상호의존성을 자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섣부른 생태논리나 생태활동 모방 행위가 오히려 생태예술 작품들의 예술성을 저하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생태예술은 기존의 미술사의 특정 사조와는 성격이 다른 광범위한 세계적 시각에서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장르간, 학제간 협업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생물체 사이의 상호의존성, 환경윤리학적으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생태환경과 공존하는 생태계의 한 고리로서의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해준다.
강술생이 2005년부터 진행해오고 있는 <무당벌레 꽃이 되다>에서 보는 것처럼 생태예술가의 활동은 장기적인 현장 작업과정에서 작가와 소통하는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장소 특정적인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며 그러한 모든 과정들은 체계적으로 기록화(documentation)되어 궁극적으로 전시장으로 수렴되는 것이 자연스런 과정이다. 따라서 생태예술가가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은 단순한 작품이기보다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술가에게는 생태와 미학의 조화와 상호 촉진작용을 일으키게 만드는 매개자로서의 노력과 보다 넓은 공간과 인적 연대가 요구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강술생의 작업은 이제까지 지나온 긴 시간만큼 앞으로도 더 긴 호흡의 시간이 요구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