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과 유족기증작품 전시
역설적이게도 생명을 가진 개체는 그 생명이 유한하고 무생물들은 그 생명이 무한하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가 소유한 각종 재산들은 그의 사망 이후에도 이 세상에 머물게 된다. 인간이 남긴 물건들 가운데 일정한 기준 이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과 가족관계나 그 밖의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에게 상속되어 다음 세대와 다시 살아가며 소통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였던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2014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코마상태에 빠져 6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다가 2020년 가을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이회장의 급작스런 발병은 삼성 그룹의 미래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쳤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가족들에 대한 상속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전이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언론에 특별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수집했던 미술품에 대해서 이회장이 유언장을 별도로 준비했던 것은 없었던 듯하다. 따라서 이회장이 소유했던 미술품을 포함한 모든 재산은 법이 정한대로 그 가족들에게 상속되고 과세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장이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고, 다시 이회장 부부가 그 규모를 획기적으로 확대시킨 미술품의 상속 문제가 한동안 대중들의 관심사가 되어왔었다. 이회장의 생전에 중요한 작품들 중 일부가 때때로 호암미술관이나 리움미술관을 통해 공개되기는 했지만 최근까지 소장품 전체의 규모나 세부적인 작품 목록이 알려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삼성그룹 차원에서 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재단의 미술관이 작품들을 구입하여 전시회에 공개하여왔지만, 이회장의 재산 상속문제에 연관된 미술품들은 그의 개인적 소유로서 별도 관리되어왔었다.
이회장 소유의 재산이나 상속세의 규모에 대해서 궁금증을 보여 온 호사가들은 미술품에도 주목했다. 국내 미술계에서 국공립미술관들이 재정의 한계 때문에 소장품 구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온 데 반하여, 개인 자산가의 의사결정으로 사실상 무제한적인 구입이 가능했던 이회장의 소장품들은 평가자의 시각에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 보다 그 문화적 가치나 재산적 가치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상속 미술품의 가치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수조 원까지 추정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유족들은 이러한 미술품들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상속세를 부과 받게 될 것이었다.
사실 이회장은 생전에 문화재단을 통해 미술관을 운영해오면서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져 왔지만 그에 비해 자신의 예술 철학이나 미학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현해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미술계의 일각에서는 이회장의 미술 사랑이 조금 과장되게 알려졌다고 보기도 한다. 대규모의 기업을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중요 사업 이외에 쓸 시간의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하기에는 수집된 미술품의 규모가 너무 압도적이다.
이회장의 상속자인 가족들은 심사숙고 끝에 이회장이 수집한 미술품의 상당부분을 국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사회환원할 것을 결정하였다. 총 2만 3천여 점에 달하는 기증품들은 정부 기증에 앞서서 작품의 성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미술관에도 일부 기증되었다. 예를 들어 전남 출신의 화가 김환기와 천경자의 작품들은 전남도립미술관에, 대구 출신의 화가 이인성과 서동진의 작품들은 대구미술관에, 강원도 양구 출신의 화가 박수근의 작품은 양구군박수근미술관에 각가 수십점씩 기증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기증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유물들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들일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지금 이회장 유족들이 기증한 작품들 가운데 중요한 작품들을 선발해서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77점의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겸재 정선의 1751년작 <인왕제색도>와 국보급 금동불상들, 그리고 미려(美麗)한 보살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고려불화 <천수관음보살도> 등을 들 수 있다. 인왕제색도는 조선시대 경복궁의 좌측 인왕산에 비가 내린 직후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시기적으로 이 작품은 유럽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면서 점차 관심을 끌게 된 풍경화들과 동시대에 제작된 작품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은 영국의 풍경화가 가운데 리차드 윌슨(Richard Wilson)이 1750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그렸던 작품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먹과 유화물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윌슨의 작품이 사실적 색채 묘사에 입각하여 목가적인 분위기의 표현에 충실하였다면,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는 붓의 다양한 놀림 및 물과 먹의 농담에 의해 생겨나는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여 흑백의 화면에 비가 개인 직후 안개가 걷혀가는 인왕산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는 과거에 동일한 먹과 붓을 이용하여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기 때문에 정선은 작품 속에 풍경에 대한 상황을 화면에 글로 적어 넣고 자신의 호와 이름, 그리고 낙관까지 찍어 넣었다. 작품에 서명과 낙관이 포함되는 이러한 표현은 대분의 경우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완결하였음을 확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58점의 현대미술 작품들은 주로 한국의 20세기 작품들로서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하는 작가들의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1945년에 35년간의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이후 1950년부터 3년간 남과 북 사이의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하여 2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의 개입으로까지 확대되는 혼란과 파괴의 시기를 겪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를 전후로 한 미술품들의 상당부분이 파괴되고 분실되어 미술사 연구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아쉬움을 초래하였다. 식민지 시절의 고난과 6.25 전쟁 후의 결핍을 이겨내며 어렵게 제작된 작품들이 한곳에 수집되었다가 적지 않은 수량이 기증된 이번 기회는 그런 의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국내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술관이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는 1488점의 작품들 가운데에는 잘 알려진 모네나 고갱 등 외국 작가 8명의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앞으로 이건희 회장의 기증을 기억할 별도의 전시공간이 마련되면 전부 공개될 예정이며 외국의 대형 미술관들과의 교환 전시도 검토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고미술품들이 대부분 국보로 지정된 것에 반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는 미술사적 가치와 함께 제작 후 50년 이상이 경과되어야 한다는 관례적인 평가 기준에 의해 아직 국보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이러한 조건과 시한을 충족한다면 문화재 지정을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작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술관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에는 백남순(Baik Namsoon)의 <낙원>과 장욱진의 <공기놀이>, 그리고 김환기의 <산울림> 등이 주목된다. <낙원>은 한국 전통적 8폭 병풍 형식의 화면에 유화로 그린 작품으로서 동서양 미술의 형식적 만남을 보여주며 현재까지 발견된 백남순 작가의 거의 유일한 대형 작품이다. 파울 클레의 작품과 유사성을 보이는 단순하고 천진한 작품을 주로 그렸던 장욱진이 20살에 신문사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한 작품인 <공기놀이>는 작가의 전성기 작품들과 달리 사실주의적인 풍속화 형식의 묘사를 보여준 귀중한 초기작으로서 주목된다. 1963년부터 1974년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작업을 한 김환기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73년에 제작한 점화(點畵)인 <산울림>은 최근 국내뿐 아니라 뉴욕과 홍콩 등의 경매에서도 수백만불의 낙찰가를 기록하면서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의 전성기 대작 가운데 하나다.
이와 같은 이건희 회장 유족 기증작품들의 전시는 한국미술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의 최고 부자가 소유한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에 더하여 최근 국민소득 증가에 따른 문화소비의 활성화가 맞물려서 때마침 이회장 유족들의 기증품들은 그야말로 예술계의 핫이슈로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도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던 시민들, 특히 젊은 층들이 점점 더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들은 소소하나마 자신의 주거 공간에 작은 작품이라도 하나쯤 걸어놓고 싶어 하는 유행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이회장의 작품수집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전시는 사전 예약에 의하여 제한적으로 공개되고 있는데 이제 젊은층 사이에서 이건희 기증미술품 전시 관람은 거의 유행처럼 번져서 입장권 예약이 불티난 경쟁을 일으켜 한때는 암표까지 등장하였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이회장의 미술품 상속과 기증 문제와는 별도로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미술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소년 그룹 BTS의 리더 RM의 행보일 것이다. 그는 시간 나는대로 미술 전시장이나 아트페어에 조용히 나타났지만, 열성 팬들과 기자들에 의해서 그의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대중들이 미술품 관람에 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인 것도 이번 이회장 기증 건과 결합하여 상승작용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전시장에서는 삼삼오오 작품을 관람하러 온 젊은이들과 가족들, 그리고 때로는 홀로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서 미술관 관람의 문화는 유럽의 살롱전 형식과 유사한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사실상 일반 관람이 시작된 이후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나고 있지만, 이보다 앞선 관람객 문화를 가진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비하여 크게 문제를 일으키거나 관람의 제한을 두어 어려움을 겪게 한 사례는 없었고, 미술관과 박물관에서의 심각한 도난사고 발생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의 유교적 도덕과 질서를 높이 평가해 온 행동규범이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까지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까닭에 미술품의 재산적 가치가 불투명하여 환금성이 없으므로 절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전시 관람을 보다 학구적이고 높은 문화적 소양을 요구하는 행위로 보아왔던 사회적 인식이 자라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스스로 조심해 온 점도 관람문화의 격을 높일 수 있었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점차 수정되었고 최근에 와서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전시관람과 전시장에 인접한 편의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을 자신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그리고 때마침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들이 대중적으로 공개되면서 그 열기는 더욱 확산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