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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해 / 선으로 포착된 생명

박영택

정종해- 선으로 포착된 생명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남정(藍丁)이 청전(靑田)에게 수학하던 시절 그는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좋은 그림이란 무엇입니까? 잠시 후 청전은 이렇게 말했다. “운치가 있어야 하내” 남정은 그 운치라는 화두 하나를 들고 평생을 간 것 같다. 남정이 서울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당시 제자들은 스승에게 물었다. “동양화란 무엇입니까?” 남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동양화란 선(線)일세” 아마도 그의 제자들은 그 선이란 화두 하나를 들고 작가로서의 삶을 걸었을 것이다. 물론 그림을, 동양화를 그렇게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그림은 결국 하나의 선이다. 그 선 하나를 긋기 위해 자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의 맛이 운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냥 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턱없이 모자르지도 않은 그런 선의 맛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해서 ‘쓰윽’ 그어진 선 하나만 보아도 그 작가의 내공이 보이고 그의 마음과 인품과 그림을 대하는 태도와 상념 등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 선이다. 그것을 차마 가리거나 부정하거나 덮을 수 없다. 그래서 그림이 무섭다는 생각이다.

정종해의 근작을 멋들어진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자리한 여주작업실에서 보았다. 그 나무줄기의 선과 세가 화면 안에 가득하다. 살아 숨 쉰다. 다양한 천 바탕에 그가 손수 만든 여러 기이한 붓들이 모필과는 전혀 다른 선의 맛을 증거하면서 지나가고 그 흔적들이 새삼 그림을 만들어 보인다. 기존 붓을 의도적으로 쓰지 않고 그가 직접 만든 다양한 붓, 도구들은 새로운 선, 그가 원하는 선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도구를 받아주기 위해서는 종이보다는 천이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 기와 세를 표출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어진 사각형의 화면을 부단히 벗어나고 유출하는 장치가 요구되었을 터라 화면 밖으로 빠져나간 선들을 지지하는 천의 조각들이 가장자리로 빠져나와있다. 그것은 일종의 변형화면이자 주어진 그림이 얹혀진 화면과 그 바깥의 구분과 경계 또한 은연중 무화시키는 편이다.

그가 그은 것은 선이자 새나 말, 호랑이, 나무줄기가 되고 다시 문자와 숫자로 떠돈다. 선이자 이미지이고 이미지이자 문자와 숫자꼴로 그렇게 정처 없이 유랑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 규정되거나 국한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그 모든 것이고자 한다. 서체이면서 그림이고 동시에 그 모든 장르적 경계나 구분을 지우고 있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이었던 것이 근대 이후 날카롭게 파열음을 내며 산개되었던 것을 다시 통합하고 한 공간에 부려놓으려는 의지를 만난다. 동양에서는 글씨의 근본이나 그림의 근본은 모두 자연의 이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이치를 바탕으로 글씨가 만들어지고, 그림 역시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서화는 그 근원이 같은 것이다. 그도 역시 지속해서 자연의 형상을 빌어 그 내면에 깃든 생명력과 기운을 선과 획으로 길어 올리고자 했던 시간을 지내왔다. 근작은 그래서 동물의 형을 빌어 이루어진다.

동아시아 문인들의 자연관은 ‘관물찰리( 觀物察理)’에 근거한다. 사물의 존재 원리를 만물에 내재된 이(理)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만물에는 한결같이 이(理)와 성(性)과 명(命)이 있기 때문에 마음과 이치로 바라보고 교감해야만 거기에 내재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인들은 주변에 산재한 자연물을 통해 우주에 편재된 기운과 생명력을 느끼고 그 안에 내재된 천기와 이법을 공들여 읽어 내고자 하였다. 여기서 자연은 개인의 심성과 인격을 도야하는 근거인 동시에 순리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를 알려 주는 규준으로 작동했다. 정종해 역시 주변 자연물에서 그림을 시작하고 깨닫는다. 이전에는 산수와 나무를 다루었다면 근작은 동물로 소재만 이동했을 뿐이지 결국 그의 관심은 여전히 자연이다.

동양회화에서 그리기와 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붓의 놀림이란 우주적인 힘에 자신을 맡 김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깨닫게 되는 주객합일의 경지를 지향한다. 그러니까 동양화의 선은 형태의 단순한 윤곽선이 아니라, ‘사물의 내적 선을 포착, 대상과 작가에게 편재하는 기를 표현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듬과 생명력을 가짐으로써 순수한 정신적 리듬과 진동에 의지하는 것이다. 동양화의 지향점은 대상이 지니고 있는 생기의 포착과 그 기운의 표출이었다. 그것이 선이고 획으로 나온다. 그래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은 정신이다. 선 자체는 개념이며 실재하는 가시적 대상이 아니다. 비물질이다. 따라서 선은 정신을 실어 나른다. 생명이란 가시적 대상이 아니다. 생명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을 통해서 주로 감지된다. 그래서 생명의 표현은 선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한다.”또한 “획에 의한 표현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그 자체로 리듬감과 생명감을 가진 표현이다.”(작가노트)

그의 그림은 문인화의 경지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필획의 근원이 되는 서예 전통을 암시한다. 이 형상은 그리는 선과 쓰는 선이 일체화된 “서체충동의 분출”인 것이다. 획으로 간략화된 서체적인 동물들은 완전히 지시적이지도 않고 또한 현실의 재현과 단절되어 있지도 않은 특수성을 띠며 구상과 추상 사이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형상에 있으면서도 다분히 형상을 벗어나 있다. 그리고 그 눈들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살아 번득인다. 그는 그림 안에 이미지와 적합한 글자를 삽입했다.

예를들어 날카로운 눈이 강조된 호랑이 얼굴을 그리고 화제는 ‘哲眼觀世‘라는 식이다. 소식은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하였다. 이 융합의 추구를 시도하는 것의 하나가 바로 제발(題跋)이다. 그 뜻이 의미심장하고 자구가 정연한 제발은 필경 화면의 시정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화면의 내용을 더 깊이 있게 할 뿐 아니라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그래서 문인들은 제발의 시구절과 서예, 낙관 등의 예술적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보충하고 보완하여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최대한 드러낸다. 이렇게 되어 회화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종합예술이 생겨나게 된다. 제발과 낙관은 화면을 보충하고 보완하는 것으로 이는 회화의 한계를 벗어난 문자로서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거나, 혹은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표현한다. 이러한 것들은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형상의 내용에 충실할 뿐 아니라 보는 이의 상상까지도 개발하여 감동을 배가한다. 이러한 상상과 연상의 개발은 보는 이로 하여금 화면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들까지 보이게 하는 이른바 상외상지(象外賞之)의 단계까지 이르게 한다. 그것이 제발의 궁극적 의미다.

작가 역시 대상을 빌어 의중을 표출하고 자신의 마음의 가락을 의탁한다. 근작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그런 의미망을 지닌 것들이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통해 심중을 표현하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전통사회에서 문인들이 그리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대상, 모든 자연만물의 본질이었다. 문인은 그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을 표현하는 이였다. 따라서 동양화는 형상의 묘사를 통해 정신세계를 그려낸다는 이른바“이형사신以形寫神”을 추구했다. 이는 단순한 사실적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외형의 묘사를 통해 그 대상의 내면세계, 내재적 정신 본질을 표현함을 가리킨다. 이른바“전신傳神(정신세계를 드러냄)”이 그것이다. 결국 동양화에서는 그리고자 하는 형상이 아니라 그 형상에 덧대어 자신의 심흉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역시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가시적인 대상, 실재하는 대상이 내포하는 생명의 힘을 교감하고 부각시키는 것, 사물이 본래 그대로 존재하는 힘을 교감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작화태도이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나는 형태를 보는 것이 아니고 형태 밖을 소통한다. 형태란 에너지의 결속에 의해 존재한다. 에너지가 형을 조직 구성한다. 화기(和氣)에 의해 물상이 생성하니 화기가 본질이다. 나는 이 기를 감지해서 필획의 기와 일치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교감될 때 화흥(畵興)의 절정을 맛본다”라고 적고 있다.

작가는 새와 물고기, 닭과 말의 형상을 빌었다. 그 형상들은 한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급작하고 직관적으로 치고 나간 몇 가닥 선들이 흩어지고 모이다가 문득 이미지 하나를 안기다 다시 문자와 숫자로 이행한다. 기묘한 선의 맛이 빛처럼, 바람처럼, 빗줄기처럼 꽂히며 파득이고 활기차게 살아난다. 종이와 달리 천은 그 선들을 온전히 흡수하기 보다는 뱉어내고 그 선의 이동과 흐름을, 기운을 유지시키는 편이다. 동시에 그 선은 채색을 머금고 그어지면서 독특한 채색화의 경지를 얼핏 내보인다. 먹과 채색이 섞이면서 채색을 수묵처럼 다루는 것이 눈에 띈다. 먹 선이 윤곽을 짓고 그 안에 담채가 입혀지는 것이라기 보다, 일반적인 채색화처럼 후채로 쌓이는 게 아니라 색상을 수묵처럼 스며들고 번지게 하는 것이다.

정종해의 근작은 여전히 동양회화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주어진 대상의 본질을 궁구하고 관찰하고 이를 선과 획으로 드러내며, 문자와 이미지를 통합하고 수묵과 채색을 뒤섞으며 나아간다. 작가의 내면과 심중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자연물을 차용하고 그것과의 부단한 일치를 도모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전통주의자의 근작은 동양화 전통을 죽은 화석처럼 간직하지 않고 그 소중한 의미망들이 여전히 환생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모색의 차원에서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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