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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원 / 깊이를 지닌 텅 빈 내부

박영택

성정원 - 깊이를 지닌 텅 빈 내부


모든 용기는 텅 빈 내부를 숙명처럼 지닌다. 곧 금이 가 깨질 것 같은 위태로움 속에서도 그 용기는 늘 무엇인가를 채워 준다. 밖을 향해 팽창해 끝으로 가서 응고된 형국이 그대로 몸이 되어버린 컵이나 용기는 결국 빈 구멍 같은 내부를 보여주려고 존재한다. 컵이나 그릇의 쓰임은 비어있다는 그 사실에 있다.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그릇, 컵의 관대함은 인간에게는 무척 부러운 덕목이다. 해서 우리는 한 사람이 지닌‘그릇’에 대해 말하곤 한다.

컵은 인간 육체의 은유이다. 담을 수 있는 용기들은 저마다 깊이를 지녀야 한다. 그릇들마다 일정한 깊이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 깊이 만큼만이 그릇의 용도이자 쓸모이고 그릇의 정체성일 수 있다. 그래서 그릇은 너무 솔직하다. 그런가하면 그릇의 육체는 슬프다. 그것들은 언젠가는 깨지고 바스라질 운명을 견고해 보이는 외양 아래 잠시 거두워 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모든 그릇은 깨지는 순간까지만 존재한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종이나 플라스틱 일회용 컵들이 쨍하고 깨지는 그릇이나 컵의 성질을 막아 세운다. 그것들은 더 이상 금이 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우그러들거나 찢어지는가 하면 더러 썩지 않고 흉하게 뒹굴어 다닌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컵들이 참으로 많다. 커피전문점마다 저마다의 로고가 새겨진 각종 재질의 컵이 자리하고 일상 속에서도 여러 컵들이 흘러넘친다.

목마름을 잠재우고 몸 안으로 온갖 액체성을 흘려 넣어주는 결정적 도구이자 무엇인가를 담고 있거나 더러 꽃을 피우고 소중한 물건을 간직하는 용기로 사용된다. 컵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두 손을 오무려서 물을 떠먹을 수도 있고 얼굴을 닦을 수도 있지만 컵 없이 물이나 사물들을 오랫동안 담아 둘 수는 결코 없다. 그래서 인간의 부드러운 입술과 맞닿아 연장되는 컵의 단면을 생각해 본다. 아마도 사람의 예민한 신체에 가장 근접해 사는 것이 바로 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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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원은 그러한 컵을 수집했다. 그리고 이를 사진으로 촬영했다. 일상에서 쓰이는 컵을 채집했고 더러 본인이 직접 컵을 만들어 연출했다. 대량생산되는 그 하찮은 컵을 작가는 새삼 다시 보게 한다. 그릇의 용도와 쓰임, 그 깊이를 떠올려주는 것이다. 너무 흔해서 소중함을 망각케 하는 일회용 컵 하나하나의 존재성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애도하는 것도 같다. 그 컵을 닮은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은연중 떠올려 보는 것이다. 버려진 것들, 한 순간의 쓰임으로 삶을 다한 것들을 다시 재생하고 보존하려는 안스러운 묙망도 읽힌다. 그런가하면 컵을 다시 흙으로, 종이로 되돌려 보내기도 한다. 컵은 반복 재생되면서 윤회한다. 마치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육체의 윤회가 부감되는 장면이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에서 소모되는 컵들을 차마 버리지 않았다. 그것들을 모아두었고 기록했다. 그것은 비근하고 소소한 일상에의 의미 부여이자 일회적 생의 한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무엇보다도 사물에 보내는 따스하고 쓸쓸한 시선이 놓여있다. 물건들은 하루하루의 모든 것들을 간직하고 떠올려주는 것들이다. 생의 흔적들은 그/그녀가 사용한 물건의 피부에 들러붙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사용한 물건의 표면에는 그 사람의 생이 처연하게 문질러져 있다. 사물은 그렇게 상형문자를 지닌다. 사물이 인간의 은유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컵은 그렇게 인간의 육체가 되고 그의 마음이자 내부를 떠올려준다. 작가는 그 컵을 통해 자신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떠올려보고 또는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채워주는, 채우고 있는 사람의 몸도 떠올려보았다. 특히 어머니의 몸이 우선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모든 것을 채워주고 담아 주는 컵은 어머니의 몸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것은 무한정 담아내고 있는 어머니의 포용력이다. 그러니까 작가에게 컵은 단순한 일회용품의 사물에 머물지 않는다. 하루하루의 소중함과 일상의 경이로움, 그리고 내부를 지닌 누군가의 마음과 너무 큰 포용력으로 다가오는 어머니의 육체가 그 컵과 함께 하고 있다.

성정원은 용기가 마냥 좋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간결하며 실용성으로 인해 부풀어 오르며 빈 부분을 지닌다. 책상위에 컵을 올려놓고 빛, 시간에 따라 촬영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쪽으로 시선을 모아 컵을 촬영했다. 그로인해 시선의 높낮이가 조금씩 편차를 보인다. 붉은 색 바탕에 수직으로 서있는 하얀 컵이 있는 단순한 구성이다. 그런가하면 연한 녹색 바탕에 하얀 컵이 있다. 그 색채는 자신의 기호에 따른 것이고 그날그날의 기분, 분위기에 좌우되는 것이다.

밝은 봄날에는 녹색바탕에 컵을 놓고 찍었다. 서로 다른 위상, 시선의 차이가 컵의 뒤쪽에 맞춘 초점과 함께 다양하게 다가온다.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오는 빛으로 인해 부드러운 그림자를 안으로 감싼 컵들은 그렇게 각각의 빛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일해보이지만 단 한 개의 컵도 똑같은 것은 없다. 비슷비슷하지만 약간씩의 차이를 지니고 횡으로, 종으로 늘어서 있고 무수하게 집적되어 있다. 직립한 사람의 몸을 떠올려주는 컵들의 침묵이다. 하얀 순백의 컵 상단면을 달리 보여주면서, 크기를 달리하면서 저마다 동일성 속에 무수한 차이를 노정하며 자기 존재성을 드러낸다.

획일성과 균일성, 복제성을 은연중 지운다. 저항한다. 그런가하면 실사크기로 촬영해 프린트한 컵 사진, 그 종이를 원통으로 말아, 구부려 다시 촬영해 마치 입체적인 컵인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것은 눈속임에 해당한다. 흑백의 A4용지 한 장 크기의 화면에 프린트된 컵이 둥글고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는 표면을 착시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구부려놓은 종이, 화면을 계속 수직으로 겹쳐 쌓아올린 작품도 있다. 컵의 입부분만이 무수한 주름을 지어가며 차오른다. 흑백 톤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그것은 순간 기이한 추상적 패턴이 되었다.

근작에는 또한 영상작업, 비디오 작업이 등장한다. 아이폰으로 촬영한 것은 그대로 손의 떨림이 유지되고 있어서 미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작가는 스스로 컵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 실제 컵의 문양을 그려 넣어서 착각을 준다. 던킨 도너츠나 커피 빈 매장에서 사용하는 컵의 문양을 흉낸 낸 가짜 컵, 아니 그러나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컵이다. 그러나 굽거나 딱딱하게 성형한 게 아니어서 그 컵은 컵이 지녀야 하는 기능성을 상실했다.

컵 안에 뜨거운 커피, 액체를 부운 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컵에서 스며 나와 바닥을 적시는 액체성이 결국 컵의 형상을 허물어뜨린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그 컵을 손으로 마구 주물러 반죽을 해버렸다. 그러자 컵은 이내 자신의 원상태인 흙으로 돌아간다. 소리없이 진행되는 컵이 와해되는 장면은 다소 처참하다. 그것은 종내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몸을 연상시킨다. 매끈하고 그럴듯한 이미지로 치장되어 있다가 이내 스러지는 위태로운 몸의 풍경이 시간의 추이 속에서 격렬하게 진행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분명히 목도하게 한다.

이처럼 성정원의 컵 사진과 영상작업은 소박하고 비근한 일상의 용기를 빌어 재생과 순환, 인간의 몸에 대한 여러 생각의 갈래들을 단순하지만 힘 있는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슬픈 컵의 육체를 빌어 내면 깊은 데서 나오는 그 무엇을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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