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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용 / 심상의 기억

박영택

김덕용 - 심상의 기억


이 세계는 사물이 계속 훼손되고, 마음이 계속 변하고, 시간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그런 세계다.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의 격량 속에서 마냥 사라지는 세계다. 그 사라짐과 일회성으로 인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봉합하는 것은 결국 기억이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갇힌 존재라는 사실로 인해 비롯된다.

이 같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항거하는 것이 기억이란 얘기다. 기억의 다른 이름이 추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고 시간의 일방적 흐름, 직선적 흐름에 ‘브레이크’를 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억은 마냥 따스하고 정겨운 것만은 아니다.

추억은 상처이기도 하다. 아울러 개별적인 각 개인의 기억이란 것도 사실은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억으로 번져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해준다. 태어나면서 여러 단계를 거쳐 형성된 지각과 경험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나 그 개별적인 경험들은 성장해감에 따라 사회 관습에 따른 진부하고 규격화된 상투적 나열로 변해간다. 분명 기억, 추억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 따라서 경험은 현저하게 진부한 상투어의 형태를 띠어가고 따라서 그러한 상투어의 형태로 회상되곤 하는 것이다.

본래 경험이나 지각은 기억하는 당사자가 보거나 듣기를 기대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때의 기대감이란 사회. 문화적으로 교육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나 느끼는 능력은, 기대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경향에 의해서 대체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된 내용이 본래의 경험을 점증적으로 대체하게 되고, 기억된 내용 자체가 현저하게 단조로워지고 상투화된다. 다시 말해서 기억은 지각이나 경험보다도 한결 더 상투화된 뼈대 혹은 도식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한없이 불완전한 것이기에 각자의 추억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사회. 문화적인 틀에 따라 단조롭고 상투적인 모습으로 바꾸어버리게 된다. 그런가하면 그러한 과정을 거꾸로 밟기도 한다. 즉 현저하게 상투적이고 단순한 도식을 보고도 자신의 구체적 경험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추억이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과거 그 자체의 사실적인 경험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인 느낌과 분위기이기에, 상투적인 장면을 보게 되면 곧 풍부한 추억의 향기 속에 스스로를 맡기게도 된다. 보편적인 이미지가 곧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추억의 세계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지다. 빠르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디테일이 풍부한 추억을 되살려내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결정적이며 매우 즉각적으로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따라서 구체화되어 제시된 기억들은 그것 자체가 내 것이 아니더라도, 곧 추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강력한 매개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구체적인 매개물을 통해 사람들은 각자의 추억으로 달려가게 된다.

사실 추억이란 증명할 수 있는 과거의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느낌을 내포한 과거의 구체적 체험”이다.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한하고 충만한 현실성을 포함하고 있는 과거로서, 말하자면 ‘현재화된 과거, 과거의 현재화’인 것이다. 추억을 통해서 회복된 과거는 결코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라 새롭게 재구성되고 창조된 과거라고 할 수 있다. 김덕용의 작업은 그런 개인이 추억, 기억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재현한다.

그 기억, 추억은 개별적인 사연을 지닌 것들이자 삶에서 자연스레 체득되고 자국의 전통적인 생활과 문화 속에서 익숙하게 받아들여졌으며 각인된 보편적 정서의 기호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인간의 추억, 심상의 기억을 건드려 주는 일련의 이미지를 채집하고 이를 나무의 표면에 적절히 탈색시켜 무척이나 감성적이고 애잔하게 올려놓는다. 순간 목리(木理)가 자연스러운 나무의 피부를 따라 빛바랜 지난 시간의 추억의 매개들이 홀연 떠오른다.

나무 자체가 그 이미지를 회임하고 있는 듯 하다. 아니 오래된 나무가 인간의 기억을 저장하면서 자기 정체성의 두께를 비교적 두툼하고 견고하게 물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덕용의 재료, 나무는 단순한 화면의 역할에서 더 나아가 비물질적인 추억, 기억,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물화된 존재로 성형해주는 한편 추억을 시간을 부피화 하고 그 기억과 추억이 자연의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풍화되는 상황성을 목도하게 하는 바탕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그는 기억을 나무의 표면에 올려놓았다.

그가 말하는, 재현하는 기억은 유년의 추억이자 어머니와 고향, 아울러 그가 체득하고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것으로 번져나간다.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기억들이 그렇게 죄다 호출된다. 이른바 지난 시간대의 사물들, 옛것, 그러니까 아스라하게 사라져버려서 상처가 된 그러나 여전히 그리우며 온기가 감도는 전통과 관련된 것들이다. 전형성을 지닌 토착적인 이미지이자 근대화의 물살에 의해 급속히 사라졌던 안스러운 잔영 같은 것들이다.

이 같은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은 한결같이 쓸쓸하고 적조함을 두르고 있다. 장롱과 이불, 자개장과 백자, 한복 입은 여자와 거문고, 작은 경대 그리고 아이의 천진한 얼굴과 과일, 소반, 풀과 꽃, 또한 책 등이다. 사계절의 변화 속에 위치한 달과 항아리도 있다. 그 이미지들은 작가 개인의 것이자 동시에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정서적으로 이끌릴만한 전염성을 지닌 이미지이자 아련한 향수와 추억에 잠길 매개로 작동하는 보편적인 기호들이기도 하다. 그는 기억의 기호들을 채집한다. 기호들은 보는 이에게 모종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서사를 구성하게 한다. 상상하게 한다. 현재의 시간의 고리에서 순간 빠져나가 과거의 시간대위에서 살게 한다.

“작품 위에 펼쳐진 나의 기억은 무언의 해석이 가능한 기호이며, 그 자체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작가노트)

근작에는 책이 두드러지게 자리한다. 나무로 만든 책의 표지와 등에는 제목과 그림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나무를 깍고 다듬어 실제 책처럼 위장했다. 펼쳐지니 않는, 그래서 책의 행간을 읽을 수 없는 책이지만 책의 제목과 책등과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유추하게 한다. 대부분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책들이자 존경하는 동서양의 화가와 미술관련 책자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관련 서적의 제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은 결국 개인의 소중한 기억이자 자신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책/나무들이 벽에 걸리거나 바닥에 가득 놓인다. 읽을 수 없는 나무 책이 설치화 되어 진열된다. 빼곡히 포개어져 벽면을 장식하거나 바닥에 놓여 있다. 나무의 표면에 적극적으로 이미지가 개입되는 한편 그 자체가 사물화 되고 입체화되어 공간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형국이다.

그는 오랫동안 나무를 다루었다. 그의 작업실은 흡사 목공소를 방불케 한다. 그는 온갖 종류, 형태의 나무들을 수집하고 다루면서 그 살과 몸을 편애한다. 나무를 연출한다. 나무 안에 시간을 삽입하고 기억과 추억의 이미지를 저장하고 그 자체로 기념비적 순간을 드러낸다. 오래되고 곰삭은 나무의 표면, 마모되고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시간의 결처럼 다가오는 그 무늬 속에 흐릿하게, 이미지가 영상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잊혀졌다가 겨우 출몰하는 기억의 잔상을 닮았다. 그 시간과 기억을 연출하기 위해 나무의 결과 오래된 느낌과 흐릿한 이미지와 정겨운 추억의 상들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영겁의 시간과 기억을 아련히, 친밀감 나게 되살려내는 듯한 이 오래되고 퇴락한, 갈라지고 메마른 색감의 나무질감과 표면의 표정은 과거만이 지닐 수 있는 특유의 표정과 내음, 느낌을 마냥 문질러주고 있다. 삶의 흔적을 지닌 것들은 이렇게 슬프게 아름답다. 아마도 그것은 망실된 시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부재의 시간으로 인해 증폭되는 감상일 것이다.

그래서 김덕용의 작품을 복고적 관점에서든, 민족적인 기호의 차원에서든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지난 시간의 추억의 회상이나 희미해진 전통의 잔영을 연출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의 심상에 새로운 양식을 덧입히는 동시대적인 힘이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살아있는 전통이란 결국 “기억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강영희)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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