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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미나 / 마음이 꿈꾸는 정원

박영택

마음이 꿈꾸는 정원


사람의 심성은 그가 어떤 공간에 사느냐에 따라 규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주거공간인 집 또한 물리적으로 조직된 것이자 동시에 심성적으로 조직된 것이기도 하다. 그곳은 자아가 쉬는 곳이면서 자라나는 곳이며, 홀로 있으면서도 더 큰 전체를 예비하는 곳이다. 이처럼 집은 ‘개체가 세계의 유기적 전체성과 삼투’하는 곳이며 이러한 삼투 아래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간의 인간적 가능성은, 개체와 세계, 인간과 자연, 집안 세계와 집밖 세계가 잠시 만날 때, 잠시 완성된다. 그래서일까, 자연과 적극 교감하고 자연과 자신이 유기적 연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엄정하게 깨닫고 느끼고자 하는 장소가 옛선비들의 집이자 그네들이 그렸던 산수화 속의 집이다. 알다시피 전통산수화에는 항상 집이 등장한다. 그 집은 주변과 조화롭게 어울려 자연과 서로 이어지면서 우주론적 테두리에 열려있다. 절묘한 지점에 자신들의 거주공간을 안착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주변에 동경하는 나무와 꽃을 심었다. 선비들은 자연을 가장 바라보기 좋은 곳, 장소에 집을 지어 창을 내는 한편 정자나 누를 세웠다. 그 안에서 칩거로 인한 고독의 시간을 감내하는 한편 자연의 어떤 모습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했을 것이다. 이는 자연의 무한 영역에 자신을, 주체의 감각과 사고를 열어두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며 동시에 지금 여기 살아있음을 깨닫는 일이었을 것이다. 진미나의 그림은 그런 산수화, 선비들이 주거공간을 퍼득 떠올려준다. 인적이 지워진 자리에 자연과 집만이 홀로 남아 독대하고 있는 그림, 아니 둘의 관계성만이 처연하게 드리워진 그런 그림이 연상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도가道家적인 그림이다. 인간의 삶과 문화를 지운 자리에, 세속의 인연을 단호하게 끊어버린 자리에 집 주인마저 자취를 감춰버린 그림이다. 비우고 덜어내 버린 어떤 정신의 자락을 감촉시킨다. 지상에서 위로 융기한 집과 그 주변으로 무심하게 잎사귀를 퍼트린 나무들이 벌린 손가락처럼 자리하고 있다. 화면에는 적막한 느낌을 부여하는 단색이 벽처럼 마감되어 있고 그 위로 예민한 직선으로 자존하는 집과 점으로 울울한 나무가 서있다. 오로지 집과 나무만이 존재하는 기이한 풍경이다. 구체적인 형태들이 존재하지만 더없이 추상적이고 매우 단순하다. 볼륨과 질감, 원근과 그림자가 부재한 풍경이다. 그것은 외부세계의 구체적 대상을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있다. 단지 선과 점으로 환원시키고 축약시킨 흔적이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직선, 기학학적 선으로 집의 윤곽만이 그려졌고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뒤척이는 나뭇잎은 미점米點으로 찍혀있다. 흡사 점묘법이나 인상주의자들이 빛의 자락을 쫓던 그 붓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시간이 없다. 빛과 그림자가 증발되어 버린 텅 빈 장소다. 분명 현실계의 어느 장소를 연상시켜주면서도 그로부터 자꾸 빠져나가 가상의 평면에 존재하는 기호화된 풍경을 지도처럼 그려 보인다. 선과 점으로 그려진 지도그림말이다. 이 관념적인 풍경은 반복되며 거의 동일하다. 다만 집과 나무의 위치와 방향, 집과 나무가 많고 적음의 미묘한 차이가 그림을 보는 즐거움을 준다.

작가는 마치 납작한 화면에 집을 짓고 그 집 주변에 나무 심는 일을 하는 것 같다. 스스로 자신의 거주공간, 정원에 조경을 한다. 그림으로 말이다. 그림 그리는 일은 그 일을 가상적으로 실현시킨다. 결국 자신이 살고 싶고 이상적으로 느끼는 거처, 정원을 스스로 가설하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과 겹쳐있다. 그것은 그림 그리는 일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세계, 마음의 평온을 찾는 일을 그림 그리는 행위 속에서 실현하는 일, 일종의 치유적인 그림이다. 사실 모든 예술은 인간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가설이었다. 동양의 경우 산수화란 결국 현실계에서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낙원, 파라다이스의 도상화였다. 전통 산수화는 당대인의 구체적인 삶의 공간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인식행위이자 그림 안에 그들이 꿈꾸었던, 바람직한 삶의 유토피아를 가설해 보는 일이었던 것이다. 가상의 영역에서 실현하는 것이 산수화였다면 지상위에서는 선비들이 원림을 조성했다. 밖의 자연을 안으로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부려놓았다. 앞쪽으로 물이 흐르고 주변에 파초와 괴석, 대나무를 심고 소박한 집을 지어 창을 내고 그 창을 바라보며 식물처럼 살고자 했다. 작은 서안에 책을 올려놓고 독서에 빠지거나 산수화를 완상하고 사군자를 치고 차를 마시며 악기를 다루다 어둔 밤에 뜬 달을 보며 살고자 했던 것이다. 진미나의 그림에서 그런 선비들의 삶의 자세가 문득 비친다. 우연일까? 진미나는 현재 자신의 삶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풍경을 그림 안에 호명했다. 여백이 가득한 화면에 선호하는 단색을 질감의 층차를 주며 두툼하고 견고하게 바르고 사포로 갈아내서 마음에 흡족한 질감의 상태, 표면의 상황을 조성한 후에 그 위에 집을 짓고/그리고 나무를 심고/그렸다. 자신이 꿈꾸는 정원을 그림 안에서 실현하고 있다.(여기서 그림의 핵심은 결국 그런 마음의 자락이 얼마나 심도 있게 형상화되느냐이다.)그것은 단지 정원에 머물지 않고 이상적인 삶의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비들은 자신들의 집이나 정자, 누를 지어 그 자연을 삶의 공간으로 적극 끌어들였는가 하면 산수화를 통해 이상적인 자연을 구현하고 완상하며 즐겼다. 산수화 안에는 반드시 작은 집이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있어 그가 자연을 보고 있음을, 자연과 독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토록 자연을 대면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산수화는 사람이‘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된다. 산수를 소요하고 바라보며 산수를 그리고 완상하는 이유는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일종의 수양과 수신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산수의 경관을 보여주는 것이 산수화다.

동시에 선비들은 자신의 원림에서 이상적인 경관을 조망하고 싶은 욕구에 따라 건축적 차경 借景에 의해 정자를 짓고 그 안에서 자연경관을 관조하였다. 차경이란 자연경관을 사람이 직접 찾아가지 않고도 집 안에서 조망하며 즐기도록 하는 경관도입방식을 지칭한다. 이 차경은 마치 산수화와 같다. 산수가 한 폭의 그림과 같기를 바란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산수화는 아름다운 경관을 적극 끌어들이고 속된 경관을 지우려는 차경의 기교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진미나의 그림 역시 그런 차경의 방식과 은연중 연관되어 보인다. 작가의 이런 그림은 주어진 현실적 삶의 무게나 중력을 조금은 덜어내고 이상적인 공간을 스스로 조성하고 그 안에 은거하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을 조심스레 투영한다. 서늘하고 황량한 풍경에 너무 가는 선으로 집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무심한 나무들이 빛난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집과 집, 집과 나무란 또한 이 세상의 무수한 인연의 은유로 다가온다. 작가의 마음 역시 그렇게 나무들처럼 뒤척이고 흔들린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이 세속의 삶을 살아간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내밀한 정원을 가꾸어 보는 것이다. 그 어딘가에 자기 생을 고요히 부려놓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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