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국 / 한지와 함께 한 탈속적 삶의 단상
박영택
한지와 함께 한 탈속적 삶의 단상
한지는 단순한 종이, 화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독자한 물질이자 광의의 자연을 고스란히 응고하고 있다. 자연의 한 편린이면서도 자연 그 자체의 성질을 함축하고 있는 빛나는 결정이다. 종이의 소지는 그래서 이미지가 내려앉는 피부인 동시에 자연의 살과 같다. 아니 자연현상이 얇은 단면으로 환생한 기이한 영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종국은 그러한 영역 안에서 모종의 놀이, 유희를 일삼는다. 자연 안에서 자연 위에서 온갖 장난을 일삼는다. 그것은 어떤 작업이라기보다는 그저 한지와 함께 한 몸의 수행이나 그런 시간의 축적과 두께로 다가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술작품이나 공예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일, 놀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그는 한지와 함께 살고 놀고 있다. 그 놀이는 자기 일상에서 긴요한 생활의 용기들을 스스럼없이 제작하거나 그렇게 생활하고 살아가는 마음의 자취를 부려놓는 일, 노동과 맞물려 돌아간다. 따라서 그의 그러한 일과 놀이를 미술작업이라고 혹은 공예활동이나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구분해서 부르기가 애매하다. 그 모든 것이 마구 겹쳐있거나 혼재되어 있다. 미술작품이면서 동시에 일상용품이기도 하고 예술활동이면서 아울러 살아가는 일 그자체인 것이다. 좀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그는 그저 한지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 매일의 삶을 한지의 살 위에 다양한 방식으로 올려놓고 굳혀놓았다. 한지는 화면이 되고 작은 가구가 되고 다양한 프레임이 되기도 하고 부채나 컵받침 혹은 딱히 용도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이 되어 나와 있다. 너무 많은 표정이고 너무 다채로운 질감이자 매혹적인 색채를 두른 희한한 몸이 되어 자존하고 있는 것이다.이종국은 한지라는 물질을 다각도로 환생시킨다. 한지를 만들고 이를 성형하는 일이 이미 작업의 핵심이다. 그는 사각형과 원형을 중심으로 해서 자그마한 화면, 살을 만들었다. 그것은 한지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살이자 몸이다. 그가 만든 한지 몸은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럽고 적당한 온기를 드러낸다. 더러 뻥튀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천이나 가죽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천연의 한지가 지닌 여러 특질들을 온전히 내장한 특이한 표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만든 여러 조각의 한지바탕은 그 자체로 견고하고 매력적이다. 그냥 그렇게 굳혀진 상태만으로도 실용적 차원이 있고 완결된 그림으로서도 탁월하다. 추상화나 한지오브제작업일 것이다. 작은 조각조각들이 배열되고 집적된 연출 또한 감각적인 편이다. 그러니까 일정한 볼륨으로 두툼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색감으로 마감되어 있는 한지 조각들은 부조가 되어 평면위에서 연출되거나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자존한다. 아무런 장식이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상태로도 훌륭하다. 그는 그 위에 무심한 선긋기나 원초적인 장식욕망을 드리운 먹 선들을 삼투시켰다. 본능적인 공간연출에 기인한 선들의 자취이기도 하다. 흡사 길상문양이나 부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붓놀림이나 먹의 자취만으로도 기꺼이 충만한, 어떤 상태들의 연출이 흥미롭다. 그것은 화면이자 부채고 그릇이며 스탠드며 하나의 구조물로 공간에 나앉아 있기도 하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만든 한지오브제는 충분히 시장에서도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평면회화, 먹그림 역시 자리한다. 해학적인 새의 형상이 두드러진다. 단순하고 재미있게 그려진 새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 무심히 그려낸 민화에서 만나는 해학성으로 가득하다. 또 다른 이미지에서도 그런 맛이 느껴진다. 그가 우리네 민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일러준다. 천진난만함으로 그려진 이미지나 동심과 원초적인 심성으로 만져진 그림을 동경하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경지나 느낌을 형상화한다는 것, 그런 맛을 자연스럽게, 절묘하게 추려낸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그가 만든 한지/화면은 자연스러운 색감으로 견고하다. 색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그런 바탕이다. 한지 자체의 표면이고 얼굴이다. 더없이 포근하고 정겨운 색채, 모든 것을 허용하고 기꺼이 투항하는 그런 색채다. 오랜 시간과 햇살과 바람, 비와 눈이 거쳐 간 자리에 앙금처럼 남아서 굳어버린 그런 색채인 것이다. 단색조이면서도 색채를 규정하는 모든 언어를 무력화시키는 그런 색이기도 하다. 그저 느낌과 낌새와 기척으로만 감지되는 색채! 자연이 만든 색, 인위와 작위를 지운 자리에 처연하게 남아 떠도는 최후의 색과도 같다. 나는 그런 색채를 한없이 즐겼다. 너무 부드럽고 포근하고 황홀하다. 단색조이면서도 작가는 그 안에서 풍부한 변화를 동반한다. 그것은 결국 땅이나 나무의 색과 같다. 한지는 자신의 태생을 그렇게 증거한다. 작가는 그 한지 바탕위에 풀과 나무, 새와 나비, 물고기와 바람이 흔적이나 물결 같은 단순한 무늬를 반복해서 그려넣었다. 사실 그의 그림의 내용이나 도상은 단순하다. 그는 한지의 바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을 무심히 올려놓았다. 간결한 장식성과 해학적인 민화적 도상, 기본적인 도형이나 원초적인 문양들이 드리워져 있다. 추상적인 부호와 문양이 있고 다른 한 켠에는 새와 인간, 앞서 언급한 민화의 작호도(까치호랑이그림)를 차용한 그림, 인물산수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다. 그 이미지들은 모두 천진난만하게, 소탈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져있다. 이미지와 함께 숫자와 문자(한글)가 구분없이 공존하는 그런 화면이기도 하다. 간혹 짧은 시구 같은 문장이 가미되기도 한다. 다분히 탈속적이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이의 낭만과 여유가 감촉되는 그림들이다. 자연 속에서, 시골에서 사는 이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림 안에서 그러한 생활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있기도 하다.
안빈낙도나 은둔적이면서도 자연 안에서 칩거하는 고독함을 즐기는 삶의 여운 같은 것들을 슬쩍 선화처럼 남기는 제스처에서 그런 것들이 감촉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철수의 판화작업이나 이왈종의 그림도 연상된다. 더 나간다면 장욱진이나 우리네 민화와 인물산수화의 어느 예리한 지점들이 거듭 상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종국은 우리의 전통미술과의 친연성을 드러내면서 그 위에 자연과 함께 했던 선조들의 삶의 지혜나 선비들의 진정한 자유, 탈속적 삶의 흔적을 한지제작과 한지공예, 민화적이고 문인화적인 속성들을 두루 내포하고 있는 그리기 작업을 통해 누출하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제스처가 너무 과잉되어 나오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 그자체가 뿜어내는 힘이 약화되거나 단순한 장식으로 전락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가 보여준 작업 중에서 한지로 만든 기이한 오브제들, 정체를 알 수 없는 독특한 형상의 부조들, 그리고 그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그려진 들꽃 혹은 풀그림이 다른 그림들보다 좋다. 훨씬 좋다. 그 까만 먹색으로 적셔진 단촐한 이미지가 마냥 아련하기도 한 것이다.
박영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