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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홍 / 인간의 모든 상처와 고독

박영택

인간의 모든 상처와 고독


최근 몇 년 동안 쉼 없이 엄습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과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한 자책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한동안 최악의 기분과 최악의 컨디션을 견디며 오직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이는 그것만이 바깥 세상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작업을 통해 세상에 저항하고 항거한다. ‘엿’ 먹인다. 그림은 그래서 결코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란 구체적인 삶의 질감을 규정하는 힘이자 일상의 미시적 측면들을 정교하게 옭죈다. 작가란 존재는 늘 자신의 삶에 대해 발언하고 그것에 대해 그토록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이란 자신의 관심사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다.

작가의 파렛트와 붓, 물감 묻은 자취로 어지러운 작업실 공간을 배회하면서 여러 작품들을 보았다. 감각적인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수많은 이미지들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손이 빠르고 화려하며 감각적인 시각연출에 능란하고 몽상과 환각적 연출에 뛰어나다. 형태를 파악하는 눈이 날카롭고 정확하며 특히 사물의 피부, 질감 처리에 능하다. 이는 단지 외적인 껍질의 기계적 재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지닌 성질을 탁월하게 피부화, 촉각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림이란 결국 모든 존재를 표면으로 말하는 것, 보여주는 것이자 외화시키는 일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다양한 존재의 성질과 본성이랄까, 내면 등을 화면의 표면 위에 어떻게 올려놓느냐 하는 문제가 그림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평면의 화면 위에, 표면에서 실현해내는 일이다. 당연히 놀라운 솜씨가 요구된다. 능숙한 손놀림과 훈련된 육체의 탁월한 몸짓이 필요하다. 좋은 작가는 몸이 다른 이들이다. 손과 감각과 몸놀림이 완연히 다른 존재들이다. 나는 작고 단단한 안창홍의 몸에서 그런 냄새를 맡는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환상을 거침없이 그려내는 그는 그로테스크하고 괴이하며 섬찟하고 음울한 이미지를 축제처럼 그림 안에 녹여낸다. 너무 환하고 밝고 강렬하게 그려진 공포와 징그러움, 낯설음은 기이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하다.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꿈대로 그림을 그린다. 해서 그 그림들은 기획이나 개념, 이론과는 다소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 발아해서 움터 나오는 무성한 풀 같다. 풀들이 모든 여백을 촘촘히 메꿔 나가듯 그렇게 빈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는 탁월한 그림 이야기꾼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이야기 그림을 동원해 우리 시대의 여러 징후들을 까발리고 증언한다. 그런데 이런 추진력이랄까 일관된 의식을 그림을 통해서, 매번 같은 강도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작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의 작업은 마치 거미가 실을 뽑아내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든 에너지가 그림에만 쏠려있는 그에게 그림이란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무위도식하면서 거렁뱅이로 살고 싶다고, 그 속에 미쳐서 살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밀양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꿈처럼 기억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했던 그 유년의 기억은 그이 그림에서 넓은 풀밭과 완만한 언덕, 지천에 핀 꽃과 나비로 환생한다. 중학교 졸업 이후 홀로 지내며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살아온, 견뎌온 그의 여정이 도저한 개인성의 근원이다.

80년대 이후 현재까지 그의 작업세계는 결국 유년기의 달콤한 추억과 젊은 시절 겪었던 세상에 대한 환멸과 모욕이 뒤섞인 풍경의 끝없는 재현이다. 생각해보면 그는 오랫동안 사람의 얼굴과 몸을 그려왔다. 오려붙이기 작업은 70년대 말부터 시작했으며 80년부터 82년까지 빛바랜 흑백사진 속 가족의 모습을 종이 위에 유화물감을 통해 재현한 작업을 선보여 왔다. 퇴색하고 흠집이 난 상처투성이 사진의 표면과 시커멓게 칠해져버린 눈과 입을 지닌 사진 속 얼굴은 죽은 이들에 대한 은유이자 가족으로 표상되는 집안, 혈연, 핏줄에 대한 가혹한 훼손으로 드러난다. 한 개인의 가족사에 대한 추억과 상처들이 범벅진 그 작업은 안창홍이란 작가의 특질을 가장 잘 드러낸 기념비적인 작업으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작업실에서 그가 길어 올린 것들은 대략 어린 시절 밀양에서 보낸 유년기의 추억과 황홀한 자연에 대한 인상, 그리고 일그러진 가족사, 불량과 우울과 광기로 점철되었던 음습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 내내 목덜미에 붙은 죽음의 내음과 유혹, 사회 속에서 배제되고 타자화 되는 모든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 여행체험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풍경 등이다. 어쩌면 이 몇 가지 근원들이 지속해서 그의 작품을 화려하게 포장하는가 하면 문득 어둡게 가라앉히고 그토록 다채로운 방법론을 가능케 하는 것 같다. 근자의 작업들 역시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대형 화면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과 사진을 찢고 오려붙인 후 그 위에 몇 가지 조작을 가한 작업으로 크게 나뉜다. 한결같이 기이하고 묘하다. 그는 그 대상(모델, 사진 속 얼굴)을 자신의 눈과 머리, 가슴 속에서 완전히 해체했다가 다시 모아서 자신의 방식으로 재조립하고 재정립해서 내놓았다. 모델 개인에게서 우러나는 체취에다 자신의 내면을 합쳐서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시켰다. 작가의 철학과 시선에 의해서 변형된, 강조되고 특별해진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이 사실 그림만의 마력일 것이다.
우선 사람의 얼굴이 정면으로 촬영된 사진을 응용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사라진 사진관에 있던 주인 없는 증명사진을 구하거나 자신의 사진첩에서 구한 사진을 크게 확대한 후 그 표면에 다양한 칼질을 가하거나 찢어 붙이는 한편 눈동자와 입술을 조작하거나 얼굴 피부나 목덜미에서 기계부품이나 전선줄이 삐져나오게 그려 넣어 일종의 사이보그로 만들어놓는 등의 다양한 연출을 가한 것들이다. 동시에 사진의 질감, 물성을 교묘하게 변질시키거나 이를 이용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오래된 한 장의 기념사진은 딱딱하고 건조한 사실과 기록을 뛰어넘어 독립된 서정과 주술의 매개물로 존재한다. 사진은 그 속에 갇힌 개인사적 시간과 사연을 뛰어넘어 사진 자체로서의 독립된 사회성을 갖는다. 그 독립된 에너지의 매혹 때문에 나는 사진에 이끌린다.”(작가노트)
그는 증명사진 속에 박힌 얼굴을 이용한 여러 유희를 통해 인간의 외부와 내부의 간극과 틈, 분열상을 보여주는 한편 날카롭게 자른 부분과 손으로 찢은 부분의 상충과 겹침, 어긋남을 이용하기도 하고 두 장의 사진을 하나로 겹쳐놓으면서 인간 감정의 여러 측면을 보다 풍부하게 드러낸다. 얼굴은 진실을 가리고 있는, 그 뒤에 또 하나의 속 얼굴을 감추고 있는 장소이자, 동시에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다. 특히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인형의 눈을 빼닮은 커다랗고 홍채가 햇살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 눈동자를 그려 넣은 사진 속 얼굴은 무척 기이하다. 더러 눈을 감기기도 하고 입술만 붉게 칠해놓거나 얼굴 주변에 나비를 부착한 경우도 있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듯 들어가거나 명상에 잠긴 듯, 혹은 열반에 들거나 영원한 휴지기로 접어든 존재들의 영면 같기도 하고 지상에서의 고단한 삶과 신난한 생애의 이력을 모두 다 지우고, 뒤로 하고 비로소 맞이한 꿈같은 휴식을 부여한 포즈 같다.

적멸의 순간이자 명상의 정점, 또는 모든 욕망을 잠재운 후에 비로소 드러나는 평화로운 얼굴 같기도 하다. 여기서 눈은 그 경계가 된다. 생사의 경계는 눈을 뜨고 감는 찰나에 서려있다. 그는 마치 시신에 화장을 하고 염을 하 듯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 오래된 흑백사진을 빌어 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 같다. 직사각형의 철제 프레임 안에 들어간 거대한 사진(얼굴)은 에폭시로 절여져 있어서 반짝이면서 영원한 부동과 침묵, 방부와 시간의 입김이 스며들 수 없는 곳에서 영생과 불사를 누리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그의 작품 속에는 지독한 허무와 무상감이 수시로 몸을 섞거나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아늑한 접점이 흐려지는가 하면 늘상 죽음을 통해서 현재의 강렬한 순간을 대면케 하는 시선들이 교차한다. 인간은 죽음 직전까지 열심히 생의 욕망을 동원해 자신을 벼랑으로 내몰며 산다. 죽음이 비로소 브레이크를 걸어 그간의 멈춤 없던 생명활동을 종식시킨다. 그렇다면 죽음은 커다란 휴식이자 영원한 동면이다. 그런가하면 그 얼어붙은 시선들은 순간 자기 생을 뒤돌아보라고 권유한다.

반면 대형화면에 흑백으로 혹은 컬러로 그려진 거대한 누드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기존 누드와는 판이하다. 매혹적이면서도 어딘지 불편하다. 우선 이 커다란 크기는 누드를 숭고한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그 숭고한 크기에 들어온 누드는 어둡고 음산하며 퇴폐적이고 음란하기도 하다. 기존 상투적인, 형식적인 누드가 가지는 로봇 같은 느낌은 없다. 창백하게 아름답고 박제처럼 매만져진 상투적인 누드가 아니다. 그는 통상적인 미학적 접근을 포기했다. 인물화가 가지는 관념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미적인 강박이나 관념성에서 벗어나 육체 덩어리 자체가 우리 눈앞에 그냥 던져져있다. 너무 생경하고 날 것의 내음을 진하게 풍기면서 그대로 달려드는 흡인력이 있다. 기존 누드모델하고는 생김새와 몸의 상태도 다르다. 작가는 자기 주변에서 그런 인물을 골랐다. 규범이나 형식의 틀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와 일탈과 반역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경시된 이들, 위험한 인물들, 기존 삶의 강제된 틀에서 이탈된 이들이기도 하다. 상당수는 문신을 했다. 그 문신으로 인해 그들의 인상은 더욱 강렬하다. 이 ‘타투예찬론자’들은 막힘없이, 내키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사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는 그들의 초상과 몸에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인상과 껍질 이면의 또 다른 울림을 포착해낸다. 그들에게서 전혀 생경한 것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주밀한 탐색을 거쳐 그 안에 숨겨진 것, 작가 자신만이 발견해낸 존재감을 그리고자 한다.일상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타성에 젖은 시선으로 상대를 관습적으로 바라보고 익숙한 인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그 사람의 살갗과 뼈 속 깊이, 동공의 그늘 깊은 곳에 가려져있는 ‘영혼의 향기’를 맡고자 한다. 화가란 존재는 그런 것들을 보고 느끼고 끄집어내는 이들이다. 화가의 눈은 초라하고 지친 육체를 통해서도 육체의 근원적인 위대함을 발견해낼 수 있고, 창녀의 지친 몸을 통해서도 인생의 격량을 해쳐가는 강인함 속에 깃든 신성한 어떤 것을 발견해 낼 수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인물을 통해 역사와 이 시대의 불편한 현실상황에 처해진 저마다의 입장과 정신적인 것을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결국 그 존재를 빌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 다소 퇴폐적이고 낯설은 에로티시즘은 개별 인간들이 자아내는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완강함을 강렬하게 발산한다.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보는 이들을 바라본다. 이 여자들은 더러 베드 카우치에 ‘낑겨’있는데 그러나 한 인간의 내면과 심리까지도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까발려내려는 무서운 시선을 무력화시키는 날것의 육체와 시선이 있다. 전혀 이 육체를 길들이거나 체제에 종속시키거나 이성과 자본의 위력에 굴복시킬 수 없는, 완전히 소시민적 삶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이탈된 이들의 당당함과 뻔뻔스러움과 처연함이 있다. 진정 이런 이들이 무서운 존재들이다.

벌거벗은 여자들은 세련된 소파와 화사한 실내, 화려한 소품들 대신에 물감과 붓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어둑한 작업실 바닥위에 느닷없고 생뚱맞게 연출된 딱딱한 베드 카우치 위에 강제로 걸터앉거나 불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 정면을 응시한다. 아! 그들의 눈이 진정 무섭다. 그 눈이 우리를 노려본다. 각자의 개성을 통해 대립된 환경의 모순 속에서도 개별적 삶의 역사가 묻어나는 건강하고 따뜻한 육체의 정직성과 존재감에 대한 경의, 가공되지 않은 몸을 통해 아름다움의 본질과 존재의 꿋꿋함을 보여준다. 주체로서의 당당함이 우리를 향해 겨냥되어있는 것이다. 나른하고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며 퇴폐의 시간을 희롱하는 인물들은 다소 냉소와 자학으로 빚어진 초상들이다. 나른하고 퇴폐적이며 어두운 삶의 상처가 울울한 이 여자, 남자들은 생생하다. 날고기와도 같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그는 위선적인 인간이나 사회에 대해 가진 불만을 그림으로 표출하고 폭로해왔다. 인간의 상처와 고독에 그토록 민감해하는 그의 내면을 그렇게 에로티즘과 데카당스적 정서가 착잡하게 뒤섞인 체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월을 변치 않고 지내온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안창홍을 우리 화단에서 무척이나 이례적이고 독특한 존재로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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