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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 방 안에서 사물들과의 몽상

박영택

방 안에서 사물들과의 몽상


방은 외부와 고립된 고독한 영역이지만 한편으로는 더없는 자유로움이 유영하는 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방에 들어와 있을 때, 세상이 문득 방문 저쪽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안도감과 편안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방바닥이나 침대에 누워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볼 때, 순간 이런저런 상념이 꼬리를 물때 사람들은 사뭇 센티멘탈해진다. 지나간 시간이 덧없이 떠오르고 여러 기억들이 착잡하게 흩어진다. 벽지와 천장, 방안에 놓인 여러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온갖 상상도 감행해 보는 것이다. 밀폐된 공간과 그 곳에 놓인 사물들과 은밀히 독대하게 되면서 가능한 일이다. 사물을 통해 몽상 하는, 꿈을 꾸는 느릿한 철학자나 예술가가 되어 자기 주변의 것들을 좀더 집중해서 살펴보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고 개입하면서 자기 나름의 어떤 세계를 그려본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되어 거닐어 보는 것이다. 순간 모든 것 속에 자아가 반영되어 돌아다닌다. 박현진의 작업은 자신의 주거공간을 관찰하고 꿈꾸면서 개입한 흔적들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들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자취를 하는 작가는 적지 않은 세월을 이 작은 빌라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전히 이곳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순간 되돌아 보았던 것 같다. 그러자 이 작은 빌라의 방과 가구, 온갖 집기들에서 숨 쉬고 있는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적당히 낡고 바랜 집의 내부에는 오랜 시간을 자기 몸과 함께 하며 닳고 초라해진 사물들이 자신과 함께 그렇게 피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는 새삼 자신의 주거공간에 놓여진 것들,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 빛과 질감, 분위기 같은 것들을 주목했다. 낡아 퇴색하고 빛바래고 문드러진 것들, 흉측하거나 지저분해진 것들로부터 떠나고 싶은 욕망이 일순 멈추고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면서 그것들로부터 어떤 환영이 안개처럼 퍼진다. 그러면 이 공간, 이 순간의 삶이 슬쩍 부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외부에서 조심스레 들어오는 적은 양의 햇살(빛), 얼룩이 지고 찢겨진 벽지, 갈라진 장판의 틈새, 집안 이곳저곳에 뭉쳐있는 먼지와 머리카락, 빨래건조대에 걸린 스타킹과 옷가지, 옷걸이와 전기콘센트, 전선줄과 이부자리 등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 일상의 진부한 풍경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속물성의 틈새로 어떤 기이한 반전이 자라난다. 작가는 그 사이에서 적극적인 상상을 해본다. 그것은 단지 생각이나 마음의 차원만은 아니다. 작가의 손길이 직접 개입된다. 빛을 발산하는 침대 머리에 놓인 스탠드에 가발을 뒤집어 씌워놓거나 욕조 한 켠에 놓인 세탁기에 딸린 호수 근처에 머리카락을 바글거리도록 모아놓는다거나 천장의 모서리에 자잘한 알약 같은 것들을 잔뜩 붙여놓고 어떤 형상을 만드는 식이다. 그런가하면 방문 옆 벽에 그 방문의 형태를 모방해서 선으로 대충 드로잉을 해두거나 씽크대 수챗구멍을 향해 혓바닥 같은 붉은 비닐장갑을 놓는 식이다. 혹은 즐겨먹는 카라멜 마키아또의 종이 팩을 밤의 창가에 달라붙는 나방 마냥 붙여놓았다. 아니면 방안에 있는 것들을 무척 감성적인 시선으로 잡아두었다. 옷걸이에 걸린 스타킹이 조명을 받아 벽에 그려놓은 그림자나 이제 막 몸이 빠져나온 어수선한 이부자리로 파고든 환한 아침 햇살의 자취를 무척 정서적인 호흡으로 찍은 것이 그런 것이다. 지렁이나 뱀과 같은 시선으로 자신의 방 곳곳을, 미시적으로 접근하며 다시 보는 작업이자 이미 그것에 그렇게 있는 레디메이드를 활용하는 오브제 작업, 일종의 설치미술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란 생각이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공간에 개입해 현실로부터 연유해서 또 다른 사물과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풍경을 천진하게 재연하고 있다. 집/방은 한 개인의 은밀한 꿈이 무럭무럭 자라는 곳이다. 누구나 결국 자기 방에 와서 긴 잠과 그만큼 깊은 꿈을 꾼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매일같이 꿈을 꾸기 위해, 나른한 휴식과 편안함을 위해 집으로 들어가고 자기 방으로, 침대 위로 올라간다. 그 방에 놓인 자신의 삶의 기억과 경험을 모두 담고 있는 사물들 틈에서 잠을 청하고 꿈을 꾼다. 벅차고 힘겨운 현실의 무게를 비로소 내려놓는 시간이자 무겁고 비정한 세상의 압력밸브를 열어두는 시간이다. 박현진은 그런 시간의 그 소중한 꿈꾸기를 가시적 존재로 실현하고 이를 사진으로 담아두었다. 비루한 현실과 속악한 그 하루하루를 자신과 함께 눈물겹게 살았던 것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주었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위엄을 지닌, 결코 하찮을 수 없는 사물들을 말이다. 이는 결국 그것들과 함께 살며 조금씩 가라앉는 자신을 동요시키는, 긴장감을 부여하는 일종의 치유의 노력인 셈이다. 그와 함께 누추한 생의 공간에 낭만과 환영을 부여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경이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어떤 간절함도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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