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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 / 한 눈으로 보는 이원적 세계

박영택

한 눈으로 보는 이원적 세계


6, 70년대 국전을 통해 수묵 담채의 인물화로서 두각을 나타낸 이철주, 이양원 등의 뒤를 이어 김호석, 조환 그리고 얼마의 시간을 지나 박순철이 9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국전세대들에게 인물화란 공모전 특유의 정적이고 완상적인 여인상이나 일하는 사람들이 다분히 정물적으로 위치하고 있었다면 이후 그 제자 세대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소재주의로 받아 들여져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그중에서는 당시의 삶의 고단함이나 피로에 지친 소시민들의 초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시선 등이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 80년대란 시기가 그런 개연성을 주었던 것이다. 김호석과 조환의 경우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 영향은 박순철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모필의 필력을 최대한 살려 수묵담채로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간명하게 취해 그려내는 그는 여전히 그 인물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부에서 지르는 무언의 음성을 전하고자 한다. 최근작은 이전작보다 더욱 간소하고 분방한 편이다. 대상의 요체만을 걷잡아 순식간에 부려놓은 자리에 가득찬 여백만이 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화면의 중심부에 자리한 인물은 표정과 동세만이 강조된 체 함축되어 있다. 더 이상 더하고 빼고 할 것 없는 어떤 상태를 겨냥해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그림도 실은 동일 대상을 수차례 거듭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단 한 장을 골라내는 적지 않은 시련(?)이 따른다. 그림이란 게 마음 먹은 대로 그렇게 술술 풀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경을 쓴다고, 정성을 드린다고 잘나오는 법이 없다. 좋은 그림은, 마음에 드는 그림은 자기도 모르게 문득, 불쑥 나와 버린다. 좀처럼 반복 할 수 없다. ‘매뉴얼’이 없는 것이 그림이다. 박순철의 인물묘사에는 어색한 점이 별로 없다. 편안하게 쓱쓱 그리거나 척척 붓질을 가하면 흥미로운 표정이 나오고 어떤 예사롭지 않은 포즈가 나온다. 그런데 이게 관성이 붙을 위험도 있다. 그리고 다분히 표피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그런 위험을 안고 그는 직관에 의지해 밑그림 없이 곧바로 한지 위에 붙어 순식간에 그려나가고 있다. 그림의 소재는 동시대 인간군상이다. 우선 주변 사람들이고 길거리에서 발견한 얼굴들이자 매스미디어를 통해, 특정한 상황 속에 위치한 얼굴들이다. 철저히 자기가 목도한 현실계의 인간들이다. 그리고는 작업실에 세워두는 전문 모델이 있다. 그가 인간을 그리는 이유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할 매개로 삼기 위한 것이다. 혹은 현실을 사는 일반인들이 자신의 얼굴과 몸으로 직접 발화하게 한다. 어떤 그림은 발만 그려져 있고 어떤 것은 손 하나만 길게 나왔다. 그것 하나로도 충분한 말이 된다.얼굴과 몸, 신체의 일부는 하나의 텍스트다. 요체만이 번득이는 시와 같은 문구다. 그러니까 그는 그 인물을 빌어 현실에 대한 자신의 감정, 느낌, 언어를 이미지화한다. 어쩌면 그의 수묵인물화란 그날그날의 현실에 대한 단상을 속사로 그려 기록해두는, 일종의 신문의 만평란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모필로 그때그때 살아가면서 접하고 느끼는 현재의 자신의 감정과 의식을 그림으로 전달한다. 여기에는 나름 현실문제에 대해 늘 관심을 표명해야 한다는, 그가 생각하는 지식인적 화가상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한국전쟁기의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자신의 가족도 그 사건을 겪어냈기 때문에 역사나 정치,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은 지도 모르겠다. 근작은 <욕망과 상실>이란 제목을 달았다. 그는 현대를 욕망과 상실이란 단어로 인식한다. 소비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 동기로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지를 목도한 그는 우선 그 욕망의 상징으로 ‘여성’을 잡았다. 욕망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대한 은유는 기실 그의 남성적 시선과 맞닿아 있다.

혹은 그런 모델을 통해 동시대인의 무한한 욕망의 비등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델들은 여성잡지에 등장하는 광고모델들이자 거리에서 접하는 젊은 여자들의 하려하고 육감적인, 관능적인 몸매를 지닌 이들이다. 아찔한 옷들을 걸치고 명품 가방을 든 체 요염하고 자신만만한, 뇌쇄적 시선으로 정면을 쏘아대는 표정을 짓고 있다. 뭇 남성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도발적인 시선이다. 일견 대중매체를 통해 빈번하게 접하는 이들이자 광고를 통해 각인된 상투형의 포즈들이다. 그것이 이 소비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몸이고 얼굴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여성들에 의해 재현되는 신체와 시선이다. 그것은 거의 기호에 가깝다. 여자들은 반복해서 그 기호를 재현한다. 그는 더 나아가 누드모델을 통해 성적 욕망을 더 극적으로 연출한다. 그것은 포르노이미지와 유사하다. 자신의 성기를 매만지며 오르가즘을 느끼거나 자극적인 자세로 유혹하는 포즈다. 깊고 노골적인 욕망의 순간을 필선이 훑어나간다. 비벼댄다. 그러한 욕망에 한정없이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동시대인들은 그러나 정반대로 자신들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냉소적 시선을 보이며 외면한다.탈정치화되거나 탈역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무관심으로 본다. 욕망과 무관심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어쩌면 이 시대는 대중들의 탈정치화를 추구하면서 대신 말초적인 욕망에 한없이 잠기게 하는 메커니즘 아래 작동된다. 대체로 무력하거나 자포자기한 듯한 표정, 시름에 차있거나 무력한 표정의 사내들이 그려져 있다. 그가 즐겨 그리는 주름이 자글거리고 세파에 찌든 듯한 노인의 표정은 물론 흥미로운 얼굴표정이자 심리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치열한 욕망의 경쟁구도에서 밀려난 소외된 대상이나 혹은 도덕적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욕망과 무관심의 얼굴 이외에 그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접한 흥미롭고 재미난 표정과 포즈도 물론 있다. 무관심을 대신해 그는 최근 우리가 겪은 정치적 사건이나 참사 등을 그렸다. 아이티지진 참사와 천안함 침몰사건, 4대강 개발사업, 이주노동자들의 얼굴이 그것이다. 그는 먹을 풀어서 얼마동안 둔 후 그 가라앉은 퇴묵을 사용한다. 끈적한 먹물을 찍어 선을 긋고 얼굴과 표정과 느낌을 만든 후 물을 적시면 자연스레 번져나가면서 그었던 선들이 흐려지고나 끊어지면서 퍼지고 번져 흥미로운 효과를 유발한다. 먹찌꺼기가 만드는 독특한 맛이 있다. 농묵을 풀어서 자유자재로 효과를 내는 맛도 독자하다. 부분적으로 먹물이 퍼져 멍든 부위처럼 만드는 효과 역시 매력적이다. 아울러 단일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다양한 맛들을 지닌 선들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특히 수제 한지가 지닌 색감과 질감은 그 뭉툭하게 끊어지고 이어지면서 부드럽고 단호한 맛을 내며 휘몰려 다니는 붓질과 먹의 맛을 단단히 잡아준다. 필선과 먹을 부드럽게 풀어내면서도 절제된 감각을 구사해 대상을 포획한다.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붓질의 여러 측면을 구사한다. 온전히 그리지 않고 부분만 그린다. 나머지는 상상과 여운 속에 던져둔다. 그런 특질은 여전하고 반복된다. 그는 점점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고 한다. 이제 잘 그리는 것도 싫고 어디에 얽매이는 것도 싫다고 한다. 특정한 주제를 내걸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자신의 그림이 어떤 그림이라는 선입견으로 구속되는 것도 싫어한다. 그저 자유롭고 편하게 그리고 싶은 데로 그린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나간다. 그런데 정작 그리고 싶은 것, 그리게 되는 것은 살아 있는 자신의 삶에서 파생되는 무서운 욕망과 주어진 정치현실의 답답함과 또한 그로부터 무한히 벗어나 스스로를 자폐시키려는 무력감들이다. 그럴 때면 부드러운 한지의 그 텅 빈 소지 위에 떠오르는 얼굴 하나를 찾아 순식간에 달려든다. 마치 선비가 대나 난을 벼락 같이 치듯이 말이다. 결국 그는 욕망과 무관심, 그 모두를 한 눈으로 보고 그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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