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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현 / 낯선 풍경

박영택

김소현의 낯선 풍경


이것은 풍경화인가? 혹은 건축설계도면에 유사한가? 붓질에 의해 그려진 것인가 아니면 물감 스스로 자발적인 흐름과 유출, 집적과 번짐을 연출하고 있는 것인가? 김소현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그 표면에서 이루어진 흔적, 효과가 일반적인 회화와 사뭇 다른 느낌, 질감, 표면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는 색채 또한 비현실감이 진동하는 인위적인 색감으로 가득했다. 몽환적이면 인공적이고 상쾌하고 감각적이면서 차가운 그림이다. 손맛과 붓질의 감촉이 증발된 화면에는 어떤 물리적 힘과 압력에 의해 눌려진 물감의 질료와 기계적인 선들이 속도감 있게 지나가고 있다. 김소현의 화면에는 물감의 성질을 대비적으로 충돌시키고 기계적 엄격함과 부드러운 유동성을 뒤섞어 놓아 이원적인 요소들이 공존한다. 개별적 단위들이 평행을 이루어 중첩되어 있는가 하면 그 위로 누출된 여러 색감을 지닌 물감이 용암처럼 흘러 덮고 있다.

정형화된 틀 안에서 견고하게 들러붙은 물감과 그 틀로부터 부단히 빠져나와 혼돈으로 흘러내리는 두 세계가 공존한다. 이는 작가에 의하면 “껍질 속 내면에 감추어진 현대인들의 혼돈과 곤궁, 계층간의 갈등과 개인의 상실감을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혼성적인 현실과 문화에 대한 은유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기하학적인 선이 캔버스 밑변과 일치되게 지나가면서 구축적으로 쌓여지면 그 위로 비처럼 흘러내리는 물감이 수평의 띠, 선들의 경계를 덮어나가고 있는 그림이다. 수평과 수직, 딱딱함과 부드러움, 자연과 인공, 개체와 종합, 구상과 추상, 평면과 물성, 회화와 판화적/ 부조적 요소들이 상충하고 결합되어 있는 그런 화면이다. 그 대비와 충돌이 사뭇 감각적이고 세련되게 조율되어 있다. 구상과 추상이 교묘하게 몸을 섞고 상반된 요소들이 기이하게 공존한다. 일견 그것은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화면에는 항상 산줄기가 수평의 선 위로 떠있다. 광막한 하늘이 가득하다. 더러 그 사이로 도시건축물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보인다. 현대적 도시 산수화 혹은 모더니즘적 어법으로 도해한 산수화는 아닐까? 수평으로 펼쳐진 산, 박스형 건축구조물이 길게 누워있는 그 이미지는 가상의 모습이고 연출된 풍경이다. 구체적인 듯 하면서도 어딘지 이상한 허구적 풍경이다.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 조립된 산수이자 건축도면과도 같은 풍경은 현실계로부터 추방된 듯 고립된 느낌을 준다. 인적도 없고 여타 존재도 부재하다. 황량하고 차갑고 한적한 공간에 산과 모던한 건축물만이 섬처럼 떠있다. 이 자연과 도시 건물은 어딘지 낯설다. 아울러 그 풍경은 어디론가 질주한다. 마치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차에서 바라보는 외부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불안하고 불안정하게 유동하며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풍경,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거주공간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연과 건축물은 별다른 차이없이 섞여들어간다. 오늘날 자연은 인공의 힘에 의해 전유되고 도시공간은 이제 보편적인 자연공간을 대체하고 있다는 은유일까?

그러나 나로서는 이 작가가 물감의 물성을 드러내고 각인시키는 방법론이 흥미롭다. 앞서 언급한 작가의 주제, 이야기는 설득력이 큰 편은 아니다. 바탕을 단호하게 덮은 단일한 색채는 화면 자체가 묘한 느낌을 발산하게 해주는 견고한 색 층을 형성한다. 그것은 물감을 붓으로 칠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날카롭고 단호한 압력에 의해 밀려서 생겨난 어떤 흐름, 결을 슬그머니 부감시켜준다. 그 사이로 산 같기도 하고 건물 같기도 하고 도로 같기도 한 어떤 자취들이 놓여있다. 아니 물감의 물성들이 응고된 어떤 표정을 지닌 살들이 되어 매달려있다.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고 고체성과 액체성이 혼재되어 있다. 물감은 다채로운 표정, 몸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물감의 성질이기 이전에 그것을 화면에 안착시키고 고정시키는 재료와 방법론에 의해 생겨난 여러 초상이다. 우선적으로 평면의 화면에 물감이 수직으로 하강한다. 비처럼 물감들이 캔버스 밑변을 향해 줄줄 흐른다. 그것은 표면에서 도포되고 응고되거나 마감된 것이 아니라 캔버스의 표면을 넘어서서 측면으로 흘러내리는 물감의 흐름을 연상시킨다. 이 흐름은 시간과 속도를 동반한다. 그래서인지 아래로 줄줄 흐르는 물감의 질료들은 적막하고 텅 비어 보이는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기계적으로 그어진 수평선을 덮거나 흔들면서 모종의 경계를 섞는 효과를 자아낸다는 인상이다. 이 물감의 흘러내림은 정작 수평의 띠, 선을 긋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파생한 상처다. 유동적인 상태의 물감을 스퀴지나 두꺼운 종이의 단면으로 마스킹 테이프로 구분해 놓은 면 안에 강하게 밀어내면서 의도적으로 만든 효과다. 그것은 정면성에서 배제되었던 물감들이 우연히 모서리를 넘어 아래로 흘러내린 자취를 닮았다. 그리고 수평의 선, 띠들이 질주한다. 그 선, 띠는 풍경을 연상시키지만 구체적인 풍경의 재현은 아니다. 거르고 걸러진 풍경이다. 산이 형상이 얼핏 드러난다. 산이면서 물감의 층들이고 자연풍경이자 속도감 나는 선들이다. 추상적인 선, 물감의 질료들이 모여 산의 형상, 이미지를 연상시켜주는 회화다. 간혹 박스형의 건물과 유사한 형태들도 보인다. 화면은 아련한, 흐릿한 파스텔톤 색채로 가득하다. 부드럽고 인공적인 색채는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자연적 색채가 아니라 작가 본인이 꿈꾸고 상상하는 이상적 풍경, 가상의 세계상이 그것이다. 작가는 아크릴과 과슈, 핸디코트를 섞어서 물로 조절한다. 유동적인 물감의 상태는 중력의 법칙으로 인해 아래로, 아래로 몰리고 흘러내린다. 그것은 무척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다. 확정적이고 고정되거나 딱딱하지 않다. 이 유연성은 작가에 의하면 “인간의 적응력, 생존력”과 결부된다. 물감은 중력의 법칙 아래 흘러내리고 아래로,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다. 또한 물감을 굳히고 뜯어내고 다시 올리고 칠하는 이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표면에 올라간 물감의 살들이 깊이를 지닌 결을 이룬다. 그 수없이 다른 시간이 동시에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화면에 깊이를 파들어 간다. 지층으로서의 회화라는 생각도 든다. 내면의 껍질을 폭로하거나 안쪽을 긁어나가는 조각적 회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면은 벽 자체가 되어 부조적인 지지대를 만들어 보인다.

그러니까 기존 회화의 물감이 올라가는 것과는 달리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해 스퀴지로 밀고 나가고 또한 파내고 칠하는 여러 공정으로 인한 흔적이 흡사 박락된 벽을 보는 듯한 것이다. 이 회화는 사실 다분히 판화적 기법을 응용한 회화인 셈이다. 스퀴지로 밀고 나가는 힘과 속도, 압력, 작가의 신체와 호흡 등이 결정적이다. 결국 스퀴지를 이용한 판화제작술이 회화로 전이되어 응용되고 있는 방법론이다. 이 그림은 평면 안에서 무수한 차이를 준다. 판화를 전공한 김소현은 판화매체가 납작한 평면으로만 국한되거나 이를 확인하는 작업에 머무는 것에 대한 불만을 회화로 풀고자 했다고 말한다. 판화는 평면을 더욱 평면으로 확인시키는 방법론이다, 강한 압력으로 지면을 내리 눌러 화면과 이미지, 잉킹한 부분과 상처 난 부분들을 극한으로 밀고 가는 과정에서 응고된 흔적이다. 작가는 분명 그 판화에서 맛보는 압력으로 인한 이미지의 눌림, 단호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여러 겹으로 물감의 층들을 올리고 긁어내고 파내고 다시 올리는 과정과 물감의 우연적인 흘림이나 걷잡을 수 없는, 통제될 수 없는 상황을 허용해 이를 한 화면에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매력적인 회화, 독특한 물성으로 연출된 색다른 화면이 보는 이의 시선에 촉각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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