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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그리기

박영택

그리기가 유행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그리기, 집요한 그리기, 아찔하고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과 무한한 시간을 잡아먹는 그리기에 저마다 몰두하고 있다. 오로지 그린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인 듯, 내용도 의미도 부재한 상황에서 그저 그린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자족하는 그런 그림들이 번성한다. 이제 미술의 운명은 흡사 그린다는 그 자체로 명명될 것도 같다. 자신을 가혹하게 혹사 하는 그리기, 천형 같은 그리기, 목적이나 목표 없이 오로지 그림 그리고 있는 현재의 순간을 지속시키는 그런 그리기다. 그것은 지금 순간의 시간에 탐닉 하는 욕망이자 미래나 전망을 차단한 상황에서의 자폐적인 그리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매혹적인 상품과 건축 공간, 미디어아트와 무수한 시각적 볼거리가 흘러넘치는 이 이미지과잉의 시대에 그와 맞붙어서 경쟁할 수 있는 회화, 모든 것을 죄다 품고 흡수해 내는 회화, 동적이면서도 속도감이 나는 그런 회화를 열망하고자 하는 욕망도 감지된다. 당대의 테크놀로지, 그리고 인문학과 맞물려 빚어낸 이른바 통섭으로서의 회화, 명상과 참선이 가능하고 이른바 무빙하는 회화, 또한 단지 보는 데서 머물지 않고 만지고 싶은 촉각적인 그런 표면을 지닌 회화, 이미지 괴물의 시대에 맞서 여전히 회화만의 매력을 지닌 그런 회화에 대한 갈망이 그리기를, 회화를 간절히, 절박하게 호명하고 있는 것도 같다.

동시대에 새삼 그리기는 왜 유행할까? 모더니즘이 서서히 스러져가는 70년대 말에 이르러 한국 화단에서는 드로잉, 손의 회복 등의 수사가 떠돌았다. 그리고 80년대는 분명 그리기의 시대였다. 형상회화나 신형상이나 극사실주의적인 그림들이 그것이다. 80년대 민중미술 역시 철저히 그리는 미술이었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영상과 설치가 유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회화로 유턴했다.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도 그림, 그리기가 대세다.

새삼 다원주의나 해체의 시대가 저물자 그간 현대미술을 추동시켰던 논리나 이론, 개념적 사유가 피곤하다고 여겨지거나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지 않을 때, 그리고 번거롭고 수고스럽게 머리 굴려가면서 미술을 공부하기가 불편해질 때, 질문을 던지며 모색하기가 용이치 않을 때 다소 마음 편하게 그리기로 돌아서는 것 같다. 그것은 현대미술의 동력인 아방가르드 정신의 쇠퇴이거나 새로움으로 치달았던 현대미술이 어느덧 고갈되고 막막해진 상황에서 피어오르는 간편한 타협 같다. 이제 미술에서의 논리나 이념은 무의미해지거나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이론 없이, 사유의 고통 없이 현재의 시간을 즐기며 그린다는 사실로 자족하는 태도들이 그리기의 복원과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는 또한 불안과 고독이 깊게 스며들어있다. 나로서는 최근 그림들에서 그 불안의 징후를 엿본다. 불안을 때우는 막막한 그리기가 퍼져있다. 삶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 미술의 장래에 대한 불안이 마구 교차한다. 막연한 불안과 씨름하고 답답한 현실을 홀로 뭉개고 있을 때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끄적임, 집요한 그리기에 몰두할 때 비로소 그 불안감은 조금씩 지워진다. 그것은 또한 권태로움을 반영한다. 딱히 무엇을 그려야 할지, 미술이 어디로 가야할 지 난감할 때 작가들을 진정시켜주는 것은 그래도 생각 없이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다는 자의식이다. 소소한 개인의 일상을 혼자서 고독하게 끄적이는 일기형 드로잉의 번성은 이를 잘 말해준다. 여기에 따라붙는 것이 또한 홀로 꿈꾸는 괴이한 상상력과 환상, 엽기성이다. 사회나 현실과의 연결고리나 소통의 출구를 쉽게 찾기 어려울 때 작업은 거의 자폐적인 회로 속에서 춤춘다. 그러나 그 지독한 그리기의 몰입은 역설적으로 내가 아직도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는, 작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무언의 항거일 수 도 있을 것이다. 딱히 출구가 보이지 않고 전망이 봉쇄되어 있거나 삶이 잘 안 풀린다고 여길 때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일이다. 일상 속에 그저 살아있다는 것, 살아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그린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저항일 수 있다. 그렇게 “별일 없이 산다.” 별일 없이 살면서 그림을 계속해서 그린다. 그것이야말로 말로 백수, 88만원 세대의 생존방식이자 저항의 제스처다.

아울러 무수한 시각이미지가 팽배해 있는 동시대 시각 환경 속에서 작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기 보다는 현란하고 감각적이며 매력적인 기존 이미지에 기생해서 유희하고자 한다. 그것은 소비사회의 감수성에 연관되어 있다. 물신주의와 상품미학 속에서 미술은 매혹적인 상품의 표면과 디자인에 달라붙거나 기존 이미지를 적극 소비하고 좋게 말해 재해석하는 수준으로 변질(?)되었다. 이른바 팝아트의 변종들이 번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동시대의 시각문화, 그러니까 만화와 애니메이션, 인터넷과 게임, 사진과 영화, 광고가 끼친 막대한 영향관계도 고려되어야 한다. 동시대 젊은 작가들은 분명 그런 것들로부터 이미지를 주입받고 감수성을 훈육 받아 왔으며 일정한 기호와 취향을 형성해왔다. 동시에 그것은 보수화된 현실, 미술시장과도 깊은 관계를 가진다.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이른바 글로벌경제구조로 촘촘히 직조되면서 우리 사회의 모든 것들은 그 자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결국은 자본이고 경제력이라면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근거이자 가치기준이 되었다면 미술 역시 돈이 되는 것, 시장에서 선호되는 것, 팔리는 것이 ‘장땡’이다. 논리나 이념, 또는 작가정신 등은 귀신 풀 뜯어먹는 소리가 되었다. 보수화된 시장에서 결국 팔리는 것은 여전히 평면회화이며 손의 정교한 묘사와 ‘죽이는’ 솜씨로 매만져진 매력적인 상품 같은 것이어야 한다. 시장에서 그러한 작품들이 선호되고 팔리는 순간 모든 젊은 작가들의 더듬이는 그 쪽을 향해 엄청나게 진동한다. 오늘날 시장이 미술을 지배하거나 최소한 조종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시장이 선호하는 작품을 그려야 산다. 살펴보니 회화이자 기막힌 솜씨와 인테리어나 공예적이고 일러스트레이션과 유사한 작품들이라면 결국 그와 비슷한 작품들이 열심히 제작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들 그리기에 몰두한다. 작가들은 화랑들의 요구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예술이고 나발이고 결국 먹고 살아야 그 예술이란 것도 하는 것 아닌가? 라고 항변하면서 말이다.

90년대 이후 작가들은 엄청나게 많아졌다. 미술대학뿐만 아니라 대학원 그것도 모자라 유학을 갖다 온 그야말로 가방끈이 긴 작가들이 부지기수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미술 분야 역시 학력 인플레가 엄청나다. 그러나 일자리나 먹고 살 수 있는 방편은 거의 부재하다. 열악한 우리네 미술시장에서라도 악착스레 버티는 수밖에는 없다. 고학력의 작가들, 보고 배운 게 너무 많은 작가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이 떠나지 않은 작가들은 저렴한 도구, 경제적인 제작을 모색해나가게 되고 그것이 결국 드로잉, 회화로 귀결시키기도 한다. 영상과 설치, 조각 등은 지속해나가기가 쉽지 않다. 일단 돈이 너무 든다. 비교적 저렴한 매체인 회화는 그래서 선택된다. 또 하나 생각해볼 점은 테크놀로지와 영상은 철저히 탈물질적인 매체라는 점이다. 반면 회화, 그리기는 지독히 아날로그적이다. 디지털과 전자이미지 시대에 역으로 수공적인 그리기가 번성하는 이유가 있다. 막강한 영상이미지에 맞서는 회화에 대한 모색이거나 또는 비물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질감으로서의 회화, 촉각적인 회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동시에 몸으로 생각하고 반응하고 느낀 것을 몸으로 그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몸에 충실하다는 얘기다. 그 어떤 것 보다 몸이 우선한다. 몸의 욕망에 충실한 그리기야말로 몸이 우선되는 시대에 부합된다. 작가들은 저마다 자신의 몸짓, 몸의 욕망을 가시화한다. 회화는 철저히 육체적이다. 그림이란 세계에 관한 육체적 기록이다. 그림이란 무엇보다도 외부 세계/대상과 작가 자신의 육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회화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개인적이고 창조적이다. 회화는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세계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탁월한 통로’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미묘하고 섬세한 조건, 신체적 조건이 개입된다. 우리들의 몸은 운동하면서 지각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뇌로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동감각에 기인한다. 새삼 오늘날 회화는 급변하는 문화 환경 속에서 회화의 향방과 화가의 위상을 질문하고 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한 그림, 일종의‘메타-그림’의 성격을 띠고 진행한다. 그래서 동시대 회화는 개념적인 것과 지각적인 것이 직접 마주치는 장이자 신체-자연의 비개념적인 운동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운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보면 회화의 본질은 한때 모더니즘에서 강조되었던 것처럼 단순히 평면성이라든가 형상성, 개념성 등의 어느 한 측면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마주치고 겹쳐지는 형국 속에서 형성되는 특이점들의 역사적 변환에 따라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의 본성은 다중성과 복수성,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긴장관계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몸으로 밀고 나가는, 때우는 작업이 있는가 하면 회화와 몸의 관계를 고려해서 그려나가는 경우로 구분된다. 또는 몇몇 작가들은 기존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는 새로운 육체와 마음의 증식과 분열을 경험하고자 한다. 그림그리기를 통해 고단하고 무모한 노동을 통해 그 같은 유희를 누린다. 그 유희와 노동에서 문득 권태와 부단히 싸우는 오늘의 미술이 떠오르고 동시에 그린다는 행위 안으로 침잠하는 몰입과 잠행만이 동시대 미술의 초상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스친다. 그것은 시간과 자본이 최우선시 되는 사회에 역행한다. 무료하고 지루하고 막막한 시간을 축적시키면서 자행되는 노동의 비효율성과 시간을 낭비(?)하는 회화, 그리기는 분명 자본주의적 삶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제스처다.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뜯어먹고 탐닉하고 낭비하면서 직선적이고 효율적인 시간관에 맞선다. 맞서고자 한다.

여러 이유로 인해 그리기는 그토록 번성한다. 무엇보다도 극사실이 대세다. 시각 현실을 충실히 묘사한다는 일반적 의미의 사실성을 기법 면에서 극단으로 이끌고 간 경향을 극사실이라고 지칭해보자. 대부분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리고 예쁘고 감각적인 사물들을 줄기차게 묘사한다. 이 환영주의는 예술과는 별 관계없이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의 첨단화와 대중화의 결과로 보인다. 이처럼 21세기는 새로운 환영주의 시대로 재편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이 극사실회화인 셈이다. 작가들은 첨단 기계복제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화가의 손맛을 공들여 드러낸다. 작가와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 속에서 피부에 달라붙어 기생해나가듯이 균사처럼 퍼지듯이 그린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사물의 피부를 애무한다. 관능적으로 피부만을 편애한다. 가능한 그림을 즐겁게 그리고자 한다고도 말한다. 나를 위해 그리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그린다. 즐기면서 오래 그리는, 그리는 순간 거의 무아지경이 되는 극사실적 묘사기법이 선호된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그리는 과정은 힘들지만 시간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안기기 때문이다. 대다수 작가들은 그리기를 통해 자족적인 유희를 누린다. 재미를 위해, 재미있게 그리기 위해 가능한 그리는 순간, 그 시간을 연장하고 지속한다. 이는 그림에 부여되는 과도한 의미나 현학적인 이론, 혹은 담론과 주제를 지워버리고 그린다는 사실, 그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그리기다. 난해하다고 여기지는 미술이론이나 중압감을 심어주는 메시지 같은 것을 덜어내고 철저히 그림 그 자체에 집중한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물의 표면을 열심히 따라가 보는 단순한 그리기이기도 하다. 미술에 대해 머리 아프게 고민하거나 애쓰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알리바이를 다소 편하게 제공해주는 것이 지금의 극사실주의 그림의 바탕에 깔려있다. 감각적인 사물과 기호들을 가지고 유희하는 일이고 그것들과 한 몸으로 접속되는 일이 젊은 작가들의 극사실적인 그림이다. 편차가 있지만 거칠게 묶어보면 고영훈, 이정웅, 이지송, 김상우, 강강훈, 박민준, 이국현, 한효석, 이재삼 ,안성하, 허유진, 황순일, 정보영. 최정혁, 이용학, 박종필, 장기영, 윤병락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장재록, 한승협, 윤세열 등 수묵으로 극사실을 추구하는 흐름도 엿보인다. 이들은 한결같이 탁월한 묘사와 함께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시각연출은 보여준다. 그들이 만나는 대상과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뿐 표현과 형식은 거의 동일하다.

그와 함께 팝적 극사실이 있다. 역시 사진이미지보다 더 사실적이고 실제적으로 그려내려는 욕망을 매달고 있다. 전적으로 사물에 육박한 시선을 보여주는데 이 사물만을 독대하게 하고 그 사물의 피부에 들러붙게 만드는 시선은 소비사회의 욕망을 닮았다. 그래서 관자의 망막과 몸이, 감각이 사물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너무도 생생하게 실존하는 물질의 세계이자 몸으로 만나는 구체적 존재들이다. 그러한 인식은 다분히 유물론적 세계관을 암시하는 한편 동시대 자본주의의 세계상, 물질로 구현된 세계에 대한 순응적 태도이기도 하다. 물질적 풍요와 자본주의의 소비사회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이에 익숙한 모든 이들이 갖는 보편적 세계 인식이자 사물관이다. 여기서 극사실은 몸을 내민다. 사물의 고유한 물리적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실주의적 기법, 전략이 동반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당연히 팝아트적 속성도 함께 한다. 워홀은 '팝아트란 사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을 욕망하는 일이다. 동시대 젊은이들, 작가들은 귀엽고 예쁘고 감각적인 것들을 전적으로 갈망한다. 미술은 통해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이제 미술은 그들의 욕망을 보상하는 선에서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키치적이고 팬시한 감성, 장식적이고 달콤하며 관능적인 미감이 물씬 거리는 다분히 통속적인 미적 감수성이 동시대미술에서 압도적이다. 그래서일까, 이른바 미술과 대중문화의 접점에서 시대적 아이콘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업, 그러니까 가볍고 피상적인, 달콤하고 우호적인 미적 감수성과 함께, 인스턴트문화, 일회용 문화에 대한 선호가 적극 반영된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것은 매혹적인 상품, 사물을 공들여 그리거나 그것들을 채집해 그리는 일, 소소하고 비근한 사물로 채워진 자신의 일상(공간)을 그리는 일이다. 그것은 이전의 관습적인 정물화와 포개져 있지만 또한 그것과는 조금은 다르게 소비사회의 사물들로 둘러싸인 현실을 반영하는 제스처로도 다가온다. 그것은 사물로 이루어진, 너무나 많은 인공의 사물과 상품으로 둘러싸인 소비사회의 환경에 대한 시각적 반응 같기도 하다. 화려하고 달콤하고 미끌거리며 반짝이는 것들이 발화한다. 홍경택과 황현승, 전상옥 같은 작가들이 있다.

극사실에 유사하지만 실은 회화적 기법, 표현방법론에 주목하는 작가들은 한운성, 이광호, 오치균 등이다. 이들에게는 가능한 언어와 개념을 빼고,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붓질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촉각적인 이들의 그림은 작가의 몸이 느끼는 사물의 피부질감, 그 감각을 붓질을 통해 온전히 전달하려는 데 있어 보인다. 진부한 구상 혹은 냉랭한 극사실주의, 공허한 추상이라는 틀을 비껴나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인 그림을 모색하고 있다.

재현적 회화는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대상의 모방으로 귀결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 보여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간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닮았다는 것이 재현으로 귀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현에 의해 전적으로 흡수되거나 점령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림의 세계이지 않을까? 메타회화가 그것이다, 현대회화는 스펙터클의 생산 및 소비라는 차원에서 전자매체와의 부질없는 경쟁을 접고 재현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을 행하면서 메타 비평적인 차원으로 이동한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미해야 하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와 해방의 형식으로서의 놀이를 강조한다. 김홍주, 김동유, 윤종석, 함명수 등이 떠오른다.

표면적으로는 재현회화이지만 실은 세계의 이면을, 세계의 내부를, 작가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작업들이 있다. 심리적이고 통감각적인 회화들인데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를 관습이 아닌 그것 자체로 생생하게 접촉할 때 생기는 생소함을 그리고자 한다. 사물은 비로소 의미의 대상이 아닌 ‘의미의 주체’가 된다. 알려진 모든 선입견과 편견이 지워진 지점에서의 사물과의 우연한 만남, 맞닥뜨림, 그리고 이로부터 또 다른 가능한 세계와 대면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으로 세상의 풍경을 잡아내며 시간과 속도, 감각적인 붓질이 동원돼 화면이 입체적, 촉각적으로 지각되고 있으며 동시대 삶의 공간, 풍경을 질문하는 메시지도 개입되어 있는 데 대표적 작가들은 이만나, 써니킴, 김보중, 공성훈, 노충현, 정주영, 유근택, 정재호 등이다.

고립과 외로움, 어떤 거부반응도 없이 ‘나’를 받아주는 것은 바로 픽션의 세계이다. ‘나’라는 개체를 이루는 대부분의 특성을 픽션의 세계에서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최근 젊은 작가들이다. 그것은 엽기적 상상력과 허구가 공존하는 세계다. 동시에 심리적 불안, 내밀한 상처 등 복잡하고 미묘한 세계를 그리기를 통해 적극 탐사한다. 김정욱, 표영실, 이샛별, 류준화, 김은진 등이 그들이다.

그리기의 중심에는 또한 드로잉이 자립잡고 있다. 드로잉은 손의 움직임, 정서와 감정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담는다. 상상력을 빠르게 휘발시킨다.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바슐라르)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이미지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기도 하다. 또한 드로잉이란 최소한의 재료를 가지고 자신의 몸 전체를 쓰는 그리기다. 계속해서 그리고 지속해서 느끼고 여전히 예술가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드로잉이다. 그래서 상당수 작가들이 계획 없이 재빠르게 자신이 생각한 것을 걸러내지 않고 옮긴다. 그와 동시에 드로잉의 위상과 영역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작업들도 많아졌다. 박이소, 안규철, 김범의 등의 작업이 당대 젊은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그리고 이강일, 김명숙, 정복수, 김을, 김태헌, 유승호, 구명선, 김은주, 류승환, 이현승, 이승애, 윤종구, 박미현, 홍인숙, 허윤희, 차영석, 염성순 등의 드로잉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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