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말할 수 없지만, 보여질 수 있는
이선영(미술평론가)
2021년 [역대 길었던 장마] 전은 실제로 있었던 2020년의 긴 장마에서 영감 받은 부제지만, 전 세계적으로 동시적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전례 없었던 COVID 19와 더불어 감내하기 힘든 자연현상을 중첩시킨다. 지루하게 내렸던 비는 그쳤지만, 장대비와 함께했던 또 다른 재앙은 현재진행형이며, 아직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다. 2020년 종근당 예술지상에 출품한 작품 [역대 길었던 장마]에서 김창영의 뇌리를 스쳐 간 ‘장마’는 특정 연도에 한정된 일회적 현상이기보다는 일종의 은유로 다가오는 이유다. 바이러스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에서의 사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더 클 수 있다. 예술작품을 바이러스같이 꺼림직한 대상과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예술 또한 작은 것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부지불식간에 스며들고 전염된다. 언뜻 보면 그냥 단색으로 칠해진 화면같은 김창영의 작품은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같이 섬세하다.
아트스페이스 휴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아트스페이스 휴에 있음)
그림의 의미와 연결될 대상을 찾아 화면을 헤매는 시선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작품들은 [의도치 않은]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의미의 방향타를 정해놓지 않고 열어놓는다. 작가는 생략된 만큼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것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단색조의 화면에 무엇인가 지나간 흔적들이 남아있는 화면은 다양한 특이점을 가지는 현상을 잡으려 한다. 인간의 마음대로 될 수 없는 변화무쌍한 기후 현상과 예술은 비슷하다. 특히 확고한 지시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현대예술은 주체의 의지 이상을 요구한다. 이번 전시작품 제목들이 모두 [의도치 않은] 것으로 붙여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의도치 않은’ 것은 양날의 칼이다.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튈 수 있다. 축복일수도 저주일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주체의 자유가 극대화되는 장조차 타자의 힘이 상당하다. 타자는 때에 따라서 자연, 신, 무의식, 광기, 육체 등등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김창영의 작품에서 타자는 요란하거나 기괴하기 보다는 신비롭게 다가온다. 푸르거나 붉은 기운을 가진 색은 직사각형, 정사각형으로 구획된 화면 안에 각각이 모두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신비스러운 느낌을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신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사고는 인간의 언어를 철저히 검증한 후에 나온 ‘과학적’ 결론이다.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해질 수 없지만, 보여질 수는 있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말하기 불가능한 총체들은 존재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제다. ‘언표 불가능한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비트겐슈타인) 불가사의하게 보이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 즉 언표 불가능한 것은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을 이룬다고 한다. 한 순간에 그 진의가 파악되는 회화는 신비와 순간을 연결짓게 한다.
신비주의자들은 ‘모든 순간에 민감해 지는 것, 그 순간을 완전히 새롭고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완전히 수용적으로 되는’(앨런 와츠) 경지를 추구한다. 그림의 형식에 있어 타자는 재현에 내재된 거울이나 그림자를 통해 나타난다. 김창영의 초창기 작품에서 상당 기간 지속되었던 그림자에 대한 관심은 회화에 내재된 타자를 암시한다. 빅토르 스토이치타는 [그림자의 짧은 역사]에서 고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인용하면서 회화가 선으로 윤곽을 그린 인간의 그림자에서 최초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회화가 처음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체의 부재와 그 투영된 형상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회화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가설은 재현이 그림자에 근거를 두었던 근본적인 목적을 말해준다. 즉 회화는 부재중인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보조물로 간주되었다. [그림자의 역사]에 의하면 플리니우스가 묘사한 재현은 그림자의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최초의 회화는 복사물에 대한 복사물이었다.
그것은 재현이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유사성과 관련됨을 알려준다. 김창영은 르네상스 시대에 확고하게 정립된 거울의 패러다임에 기반한 재현이 아니라, 이미지의 기원을 그림자로 소급한다. 게다가 작가는 그림자를 단독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덮고 다시 그리고 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한다. [그 어떤 것도 닮지 않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2014) 전에 집약된 그림자는 덮기와 그리기 사이에서 반복과 차이를 실행한다. 그가 그렸던 자신의 손은 그리기를 위한 최소한의 참조점에 불과하며, 반복에 의한 차이의 흔적이 화면의 몸통이 된다. 그것은 최초의 출발점인 손과의 유사성을 상실한다. 질 들뢰즈는 [반복과 차이]에서 유사성이 없는 이미지인 시뮬라크르는 원본이라는 이데아, 즉 재현의 세계를 창시하는 관념을 무화시킨다고 한다. 들뢰즈는 허상(simulacres)이 바다같이 자유로운 차이를 찬양한다고 말한다.
의도치 않은_B01, oil on canvas, 97×162.2cm, 2021
의도치 않은_B02, oil on canvas, 97×162.2cm, 2021
들뢰즈에 의하면 재현이 동일성을 요소로, 유사한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허상은 계속되는 불일치를 기준으로 한다. 미메시스가 실재를 확인한다면 시뮬라크룸은 실재의 결여를 전제로 한다. 김창영의 작품에서 ‘이미지’는 원본의 왜곡이 아니라 원본과 복제의 대조 자체를 부정한다. 그림자를 겹쳐서 그렸을 때 그것은 비록 자신의 손 이미지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실체 대신에 차이적 관계로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생생한 리얼리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육체뿐 아니라 풍경에도 적용된다. 작가에게 영감을 준 산과 강, 공기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마주했었던 파주의 임진강, 통일 전망대 등의 풍경을 실감 나게 말한다. 시간대와 계절에 따른 뉘앙스의 차이까지 언급되는 것을 들으면, 그것이 거듭된 방문에 의한 결과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에 비한다면 그 지역에서 떠올려지는 남북한 체제 차이에 의한 그때그때의 정치적 기상도는 거칠기만 하다.
김창영은 자연을 구체적으로 재현하지는 않지만, 크게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화면을 통해 자연을 제시하는데, 그 자연은 정치경제학으로 대변될 수 있는 인간 문명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원초적 기준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인왕산 기슭의 한옥에서 자랐던 유년 시절의 영향일 것이다. 작업 및 학업 때문에 해외에 오래 머문 동안 아파트 공화국으로 변모한 한국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수직선이라는 조형적 언어에 문명이라는 상징을 부여하게 했다. 그것은 몬드리안의 수직선이나 버넷 뉴만의 수직선과도 다른 수직선의 추상화이다. 양차 세계 대전 전후의 추상화가들에게 수직선은 신지학같은 유사 신학이라는 정신적 배경을 가지며 긍정적인 함의가 있다. 그것은 파괴 이후의 건설이나 혼돈을 질서화하는 숭고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적 충동의 에너지가 상당히 고갈된 현재, 수직은 무너뜨리고 싶은 과거의 기념비로 다가오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_R01, oil on canvas, 91×91cm, 2021
의도치 않은_R02, oil on canvas, 91×91cm, 2021
이번 전시에서 수직은 선이 아니라, 미세한 붓의 방향성만으로 감지된다. 명시적이지 않은, 즉 잠재적 풍경은 물감의 밀도 차이와 붓의 방향성이라는 흔적으로 생성된다. 생성되었기에 소멸될 수도 있다. 관객은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보다는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덮었는지 상상해야 한다. 이미지와 가림막의 사이에서 빛을 품은 공기가 느껴진다. 공기의 흐름이 그렇듯이,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과정, 본질이 아니라 흔적,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중층적으로 결정된다. 특히 차이의 감각이 중요하다. 줄리언 벨이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현대의 구조주의 또는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단어의 관계가 아니라, 전체 문장 구조로서의 언어에 대한 단어의 관계’(프레게)임을 인용했듯이, 단어들은 ‘사물과의 유사성으로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로 인해’ 얻게 된다. 현대철학적 관점에 의하면 실체와 본질이 그 무엇이든 계속 연기되고 유예될 따름이다.
작가는 기후뿐 아니라 화폭 앞에서도 재현할 수는 없고 암시만 할 수 있는 실재와 직면한다. 그의 작품은 인공조명 또는 자연광의 상태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며,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살아있는 표면이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홍수 속에 살고있는 현대인에게 회화만이 가능한 미세한 효과를 연출한다. 회화는 어떤 감수성과 지식, 그리고 의지를 가진 인간의 육체가 직접 만든 산물인 것이다. 그러한 시각적 효과는 차이를 두고 여러 겹 칠한 화면이기 때문이다. 단번에 베어진 시간의 단면이 아니라, 그러한 단면들이 무수히 쌓여 울렁거린다. 이러한 민감한 표면은 배경/형태, 의미...등등의 둔탁한 범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역대 길었던 장마] 같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어떤 경험을 앞세운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범주가 아니면 소통하기 힘든 상황을 염두에 둔 역발상이거나, 또는 제목이 어때도 상관없다는 전략일 수도 있다.
의도치 않은_B03, oil on canvas, 72.5×116.5cm, 2021
의도치 않은_B04, oil on canvas, 72.5×116.5cm, 2021
그것은 그의 화면 만큼이나 여러 층위의 은유를 내포한다. 우선 그것은 현대 예술가로서 회화가 풀어내야 하는 어떤 난제를 떠올린다. 현대예술은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난 것인데, 재현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18세기까지는 보편적이며 최소한의 정의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회화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줄리언 벨에 의하면 모방을 뜻하는 미메시스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천년 동안 유럽을 풍미하던 재현에 바탕한 미의식을 말한다. 요컨대 그것은 자연 대상을 최대한 유사하게 복제하는 눈속임 기법을 따른 작품이 완성도 높은 회화를 낳았다. 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그러한 ‘명화’들이며, 미술사를 소비하는 대표적인 방식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으로 집약되었듯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하학은 존재하지 않는다.’(줄리언 벨)
현대에 와서는 극사실주의 회화조차 전통적 재현주의를 겉으로만 취한다. 극사실주의가 의지하는 사진은 육안과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이 ‘손이 아닌 손가락적인 것’(들뢰즈의 구별)에 머문다면 기계적인 것, 코드 등. 인간과 예술 모두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시스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현대예술에 적용시킨 [감각의 논리]에서 코드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서 육감적으로 생산된다고 말한다. ‘회화의 죽음’은 수없이 외쳐졌지만,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 만은 남았으며, 그것은 김창영도 마찬가지다. 의문시된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이다. 김창영이 초창기 작업에서 그림자에 천착했을 때 시각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으나 여전히 사물은 암시되었다. 그림자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상과의 관련성, 즉 인덱스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마치 근대미술가들이 모두 공유했던 것같은 공통의 과제는 풀려버린 끈처럼 ‘자유’롭게 됐다.
의도치 않은_R03, oil on canvas, 91×91cm, 2021
의도치 않은_R04, oil on canvas, 91×91cm, 2021
미술사의 어떤 시기에 세잔같은 ‘천재’가 등장하여 회화의 어법을 혁신했지만, 이제 그러한 주류 미술사적 논리가 충분한지는 의문시된다. ‘근대 회화의 시조’로 자리매김된 세잔만 하더라도 자연과 회화의 문제는 함께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회의]에서 원근법이나 화면구성을 사용하지 않고서 리얼리티를 추구했던 세잔의 작업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평가한다. 그는 ‘새로운 광학을 찾아야 해’,..‘그것은 자연과 예술 두 가지 모두에 관한 것’이며, ‘나는 그 둘을 통일시키고 싶다’고 말한 세잔의 말을 인용한다. 메를로 퐁티에게 현대회화는 ‘모든 터치 그 하나하나가 공기, 빛, 대상, 구성, 성질, 윤곽 및 스타일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잔이 터놓은 길 이후, 자연이라는 유력한 지시대상을 떼어내고 자율화된 조형 언어의 진화가 예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지의 문제는 남아있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극복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공유된 결과다.
김창영이 모두가 영향을 받았던 어떤 자연현상을 말한 것은 자연만큼이나 실재적인 무엇을 예술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장마라는 실제적 기후 현상과 비교하자면, 장대비와 거리가 먼 흔적과 비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가령 역대 긴 장마 때문에 습도가 높아져 자극 감도가 예민한 어떤 표면에 남은 흔적같은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한 번의 흔적도 아니다. 여러 시공간 대가 겹쳐서 중층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복합적 흔적이다. 역대 긴 장마라고 해도 그의 작품에 비 오는 풍경이나 홍수같은 사건의 풍경이 직접 담기는 것이 아니다. 마치 리트머스 같은 민감한 시험 종이처럼 순도높은 추상적 지표들이 전제된다. 나이테로 기후 환경을 추정할 수 있는 것같은 간접적 지표들이다. 하지만 김창영의 작업은 그러한 과학적 지표들처럼 복잡하지 않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어려운 이론을 간파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원한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공간에서 좋은 작품을 향유하고자 하며, 자신의 관객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의도치 않은_B05, oil on canvas, 72.5×116.5cm, 2021
의도치 않은_B06, oil on canvas, 72.5×116.5cm, 2021
의도치 않은_B07, oil on canvas, 72.5×116.5cm, 2021
주어진 조건 속에서 스며들 듯이 영향을 받았던 작가처럼 관객 또한 그의 작품과 스며드는 관계를 가진다. 미세한 흔적 외에 아무것도 ‘묘사’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 자신이 살고 작업하는 파주의 풍경에서 분단 상황 등에 대한 상념이 가득한 것은 생뚱맞지 않다. 억지 춘향식으로 작품에 사회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현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한국의 토양 속에 잠겨 있고, 스스로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어 작품으로 발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년에 이은 [역대 길었던 장마] 전은 통일 전망대에서 본 풍경에서 이미지는 더 뺐다. 전에는 붉고 푸른 톤에 곡선적 이미지였다면, 이번 전시는 곡선을 제거하고 붉은 톤과 푸른 톤을 분리했다. 옐로우 톤의 전시 조명 아래에서 풍경의 느낌이 남아있는 것은 직사각형 구도 뿐이다. 정사각형은 잠재적 풍경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림을 설치적으로 운용할 때 구조적 단위로 배치될 수 있다.
물론 붉은/푸른 톤은 하늘과 그것을 반영하는 물에서 하루의 경과를 알리는 징후로 남아있다. 한데 합쳐져서 서해로 흐르는 북녘의 임진강과 남한의 한강처럼, 끊김 없이 흐르는 파주 지역 산의 능선처럼 붉은 톤과 푸른 톤이 조용히 섞이면서 흘렀던 작년의 풍경은 경색된 남북관계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서로 다른 화폭에 담겨 둘로 나뉜 전시장의 각 방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가 살고 작업하는 파주의 아름다운 풍경조차도 불편한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섞이기 힘든 것을 분리한 결과는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다. 김창영의 어법에서 자연의 부드러운 능선과 대조되는 고층빌딩의 수직선 같은 대조 대신에 부드러운 직선이 두드러진다. 수직선은 2014년 한국에 돌아 왔을 때 점령군같이 보였던 아파트 천지인 남한에 대한 인상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는 [인왕제색도]의 능선같은 뒷산을 배경으로 한 어릴 적 한옥 집과도 대조된다. 수직선은 지배적 가치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의도치 않은_R05, oil on canvas, 91×91cm, 2021
그것은 자연을 수동화시키는 능동적 힘을 말한다. 최초의 추상화가 중 하나인 말레비치에게 직선은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기본형태’(아론 샤프)이다. 아론 샤프는 [절대주의]에서 말레비치에게 이러한 기하학적 형태는 물질을 지배하는 정신의 우월성을 나타낸다. 자연에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기본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유심론은 미학적 순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사각형을 남긴 채, 전통적 이콘화로 되돌아가게 했다. 미술사가 노버트 린튼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성상(聖像)적 특성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초기의 기하 추상화가 몬드리안에게 수직선은 신지학자 블라바츠키가 이론화한, 하늘의 수직성(활력성, 남성의 원칙)과 그와 동등한 땅의 수평적인 지평선(평온성, 여성의 원칙)과 관련된다. 이 두 개의 선이 상호교차하여 만들어 내는 십자가같은 형태 또한 정통적인 신학은 아니지만, 유사 신학적 사고를 공유한다.
기하학적 추상을 잠시 거친 칸딘스키에게도 ‘수평선은 무한하고 차가운 운동가능성의 최소형태’이며 ‘수직선은 그 의미에 따라 무한하고 따뜻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은 대개 지양(또는 종합)되기 위해 강조된 것이지만, 유럽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미술사에서 정리된 추상미술에 내재된 형이상학적 태도를 읽기에는 충분하다. 김창영은 이번 전시에서 비스듬한 선을 사용했다. 수직/수평의 구도를 완화시키며 정중동을 전달한다. 요컨대 비스듬한 선은 전후나 상하가 아니라 중간이며 옆이다. 서 있는 것을 쓰러뜨리고 누워있는 것을 세우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주조색인 푸른/붉은 뿐 아니라, 직선/곡선, 수평/수직 등의 대조군, 그리고 남/북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문제까지, 김창영에게는 두 가지 대립 되는 항 간의 상호작용이 발견된다. 그는 [역대 길었던 장마]의 작가노트에서 ‘두 강줄기가 만나 바다로 진입하는 곳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상반된 것들이 어울려 공생을 이룬다’
...‘빛과 어둠이 서로 기대어 존재하고 악이 있어 선을 논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양면의 엘리시움]에서 ‘도시화 된 현대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고뇌와 무기력함을 주제로 표현한’ 작업인 엘리시움(Elysium) 시리즈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산의 모양을 형상화한 곡선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이상을, 아파트를 형상화한 세로 선은 인간 스스로 만든 질서와 규범을 상징한다. 곡선만이 존재하던 세상에 인간은 직선의 왕국을 만들면서 살아간다’고 하면서, ‘직선 왕국은 점점 더 거대해지고 확장’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러한 대립적 구도는 약화되어 있다. 정사각형의 붉은 톤 작품에는 수평선이 직사각형의 푸른 톤 작품에는 대각선이 감지된다. 이번 전시에서의 선은 곡선과의 대조에 의해 의미화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있음, 또는 사라짐에 대한 징후로 다가온다. 위아래 방향으로 그은 붓질은 수직선의 잠재적 긴장감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붓질의 수직선과 이미지의 수평적 선이 대구를 이룬다. 푸른/붉은색은 대조적이지만 단색조로 칠해진 각각의 화면에서 푸른색이나 붉은색은 아주 조금 들어갔을 뿐이다. 푸른 색조라도 거의 회색에 가깝고, 붉은 색조라도 거의 분홍에 가깝다. 볼 때 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는 표면은 색이기 보다는 빛에 가깝다. 빛은 고정된 색과 달리 시간의 추이에 따르는 유동적인 것이다. 다시 미술사를 참조해 보면, 초기 추상화가들에게 색 또한 선처럼 대조군으로 이해되곤 했다. 칸딘스키와 함께 초기 추상을 일군 작가 프란츠 마르크에게 ‘빨강은 대지의 색이다. 잔인하고 무겁고 혹독하기 때문에 파랑과 노랑은 끊임없이 빨강과 싸워서 극복해야 한다’(마르크) 미술사가 다비트는 마르크의 전기에서 그가 ‘파랑이 빨강을, 순결한 정신이 물질의 기세를 눌러야 한다고 믿었다’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마르크는 최후의 그림에서 모든 구체적 형태를 제거함으로서,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최후의 패배를 선고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의 동료인 칸딘스키도 마찬가지였지만, 정신/물질의 이원론 속에서 색 또한 배치되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파란색이 심화될 수록, 더 무한한 것을 상기시키며, 순수한 것, 초감각적인 것에의 동경을 환기한다’고 말한 바 있다. 블루는 초기 추상화가들에게 ‘잃어버린 인간 정신의 상징’(마르크)으로 간주되었다. 청홍은 동양에서도 친숙하며 태극문양에도 들어있다. 양자는 대립보다는 보완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 김창영의 작품에서도 푸름/붉음은 대조적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아예 두 색상을 분리했을 뿐 아니라, 각 색상도 정작 푸른색/붉은색 물감을 미량만 섞는 등, 양극단이 아닌 중간을 선택한다. 둘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동이 트거나 석양이 지는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그러하듯, 무언가를 엄격히 나누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아닌 인간의 규칙일 따름이다. 색을 빛처럼 다루는 김창영의 작품에서 그림자 또한 빛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진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색의 수수께끼]에서 탁 트인 하늘 속의 밤은 강렬하고 어두운 파랑색으로 빛난다고 말한다. 빛이 흰색이 아니듯이, 밤도 검정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자의 경우도 검정이 아니라 단지 ‘빛의 감소에 의해 생성’(마가레테 브룬스) 된다. 요즘 작품에는 그림자가 없지만, 김창영은 학부 때부터 빛과 그림자 같은 근본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 4학년 때 대상은 빼고 그림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외곽선만 있고 세부가 사라져 고정적 형태가 의문시됐다. 시각성에 바탕한 회화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회의가 그림자에 관심을 갖게 했다. 붉은색은 그림자를 낳는 빛의 먼 기원이 된다. 그가 한때 관심을 가졌던 인상주의처럼 빛에 대한 감도가 강한 이즘은 그림자 또한 검은색은 아님을 알고 있다. 뉘앙스에 대한 차이를 중시하는 점은 여전히 인상파의 유산이다. 이론과 지각은 다르며, 여기에 기억이라는 시간적 요소가 더해지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그림조차도 간단치 않은 것이 된다. 그림자든 풍경이든 그리고 덮기를 반복한 작품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무수한 시간성을 압축한다. 그것은 시공간에 의해 중층결정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출전; 우수전속작가 비평지원 프로그램(예술경영지원센터-아트스페이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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