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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의 Art Talk] 행복과 위안을 주는 그림

이명옥

명화를 감상하면 얻는 것이 많다. 감성은 풍부해지고 안목이 생기며 창의성도 길러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걸작을 창조한 예술가의 기질이나 삶을 바라보는 방식까지도 알게 된다. 미술작품에는 예술가의 인생관이 투영돼 있으니까.

예를 들면 삶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는 예술가의 작품은 마음에 위안을 안겨준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을 보자. 절로 마음이 흥겨워지고 그림 속의 소녀들처럼 삶의 기쁨을 노래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난다. 마음속의 그늘인 근심, 걱정, 두려움, 불만, 문젯거리들이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단 한 번뿐인 인생인데’ 라는 긍정 마인드를 갖게 된다. 르누아르는 미국의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가 주장한 ‘모든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기치를 그림을 통해 실천한 셈이다.

이 그림은 평생토록 삶의 양지만을 추구했던 행복전도사 르누아르의 인생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매인양 보이는 두 소녀가 피아노를 연습하는 장면이다. 한 소녀는 악보를 넘기면서 새로운 곡조를 연습하고 그 옆의 소녀는 피아노에 팔을 기댄 채 악보를 내려다본다. 르누아르는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의 조건들을 화폭에 묘사했다. 화목하고 안락한 가정, 감미로운 음악, 빛나는 청춘, 사랑스런 소녀들,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한 것이다.

화가는 감상자에게 지상의 낙원을 선물하고 싶었던가. 마음을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화면 바깥으로 추방했다. 곧고 강한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직선보다 부드럽고 유연한 여성적인 곡선을 많이 사용한 것도 밝고 온화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색채도 파스텔 색조를 선택했고 꽃가루를 날리듯 섬세하게 붓터치했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그림을 감상하면 왜 두 소녀의 얼굴은 둥근지, 긴 머릿결은 물결처럼 흘러내리는지, 커튼과 소파의 촉감은 포근한지, 심지어 피아노의 딱딱한 선마저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그림은 르누아르의 성품과 인생관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그는 천성적으로 모나거나 거친 것을 싫어했다. 늘 낙천적이고 활기에 넘쳤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모욕을 주는 것을 싫어했다. 동료화가들과 심각한 논쟁을 벌이는 것도 기피했다. 자신은 제도와 전통에 도전하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부족하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나보다 먼저 다른 사람이 했던 것을 계속 이어갈 뿐이다. 나는 투사 정신이 없다’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르누아르가 묘사한 그림 속의 주인공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흥겹게 노래하며 춤추는 사람들,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 천사표 미소를 짓는 아이들,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는 젊은 미녀들의 몫이었다. 슬프거나 불행한, 고통스럽거나 추한, 늙고 병든 여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인생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인데 삶을 화사하게만 치장하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설가 모파상은 ‘르누아르는 장밋빛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았다’라고 혹평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르누아르를 단순히 현실도피성 그림을 그렸던 시대정신이 부족한 화가로 깎아내리면 곤란하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이 그림을 그리던 시절 그는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으니까. 중풍에 걸려 몸은 마비되고 류마티즘성 관절염이 악화되면서 뼈가 비틀어지는 통증에 시달렸다. 손가락은 새의 발톱처럼 휘어져 손톱이 살에 파고들었고, 붕대를 감은 손으로는 더 이상 붓을 쥘 수 없게 되었지만 붓을 손가락 사이에 끼어달라고 부탁해 그림을 그렸다. 긍정적인 인생관은 극심한 통증을 완화시키는 진통제였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만 파묵은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세밀화가 올리브의 입을 빌어 회화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림은 정신이 보는 것을 눈의 즐거움을 위해 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란 정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눈을 통해 세상에서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르누아르도 ‘그림은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는 예술관을 가졌고 자신과 감상자의 즐거움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미술(美術)이란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각예술이라는 것을 그림을 통해 증명한 것이다.

대중들이 삶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르누아르의 그림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통과 스트레스, 외로움과 허무함에 지친 나머지 그림을 감상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어서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그림을 이렇게 불러도 좋으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미술 테라피(Art Therapy)라고.<-국민일보 2011.10.28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497157&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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