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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길 위에서] 제주도 사람들의 김정희·이중섭 사랑

오태진

유배온 秋史, 피란온 이중섭 두 천재와 맺은 인연 소홀히 여기지 않고 두 사람을 제주 사람으로
그 예술혼을 제주 것으로 끌어안고 승화시킨 제주 사람들에게 감복하다

'마당의 가을 이끼 쓸어내지 않았는데/ 바람 앞에 붉은 낙엽 하나둘 쓸려 가네/ 빈집엔 온종일 지나는 이 없고/ 고목은 머리 숙여 책 읽는 소리 듣고 있네(一院秋苔不掃除 風前紅葉漸飄疎 虛堂盡日無人過 老樹低頭聽讀書)'. 서귀포 대정읍 추사관에 걸린 추사(秋史) 김정희의 칠언절구를 읽는다. 쉰넷에 유배 와 여덟 해 석 달, 갇힌 천재의 고적(孤寂)했을 날들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추사관 지하 전시실은 추사의 유배 시절을 상징하듯 어둑하다. 여든 점 남짓한 전시 작품도 대개는 사본이나 탁본이지만 추사의 기재(奇才)와 기개와 숨결을 호흡하기에 충분하다. 채광창으로 햇살이 서광처럼 비쳐드는 마지막 전시실, 추사의 마지막 유작(遺作)인 봉은사 '판전(板殿)' 편액의 탁본 앞에 서면 추사의 유배가 어둠이 아니라 승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추사를 정성껏 모시는 제주도 사람들의 '추사 사랑'에 감복하게 된다.

제주도는 작년에 낡고 옹색하던 옛 기념관을 헐고 75억원을 들여 새로 추사관을 지었다. 지상 목조건물은 추사가 '세한도(歲寒圖)'에 그린 집을 그대로 본떴다. 건물 곁에는 역시 세한도처럼 소나무 몇 그루가 가지를 드리웠다. 건축가 승효상이 한국사에 으뜸가는 문인화 세한도의 고고한 선비혼(魂)을 단순 담박하게 잘 구현했다.

'신품(神品)' 세한도는 추사의 귀양살이가 낳았다. 제자인 역관(譯官) 이상적이 중국에서 귀한 책을 꼬박꼬박 보내주는 게 고마워 보답으로 그림 그리고 글 붙여 보낸 작품이다. '한겨울 추워져서야 소나무·잣나무가 쉬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그가 학문과 서예의 깊이를 더해 추사체를 완성한 곳도 제주도였다. 제주도의 자연을 닮듯 인간으로서 한결 성숙해진 것도 이곳 대정에서였다.

추사관 뒤에 추사가 살던 초가가 복원돼 있다. 추사는 유배형(刑) 중에도 가장 혹독한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받았다. 가시울타리를 둘러 가두는 형벌이다. 그러나 집주인 강도근은 물론 제주와 대정 관아 사람들은 추사의 바깥나들이를 못 본 체했다. 추사는 주변 후학들을 집에 불러모아 가르쳤다. 학문·서화·예절에서 제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밝혀줬다. 제주도 사람들은 해마다 7월 추사 탄생일이면 유배지에서 추념제를 올린다. 11월에는 추사문화예술제를 열어 서예전·사진전과 함께 유배 행렬을 재현한다.

서귀포시 서귀동, 시가지 언덕 길가에 방 세 칸짜리 초가 한 채가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인데도 여행자들이 작은 부엌 딸린 오른쪽 끝방을 기웃거린다. 4.6㎡, 한 평 반 방안에 이중섭의 사진이 놓여 있다. 이 좁디좁은 방에서 이중섭은 아내, 두 아들과 오종종 다리를 포개며 살았다.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열한 달 피란살이였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이중섭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와 화순항에 내린 뒤 한겨울 밤 걸어서 이 집에 왔다. 세간도 없이 보따리 둘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집주인 김순복은 생면부지 이중섭에게 선선히 방을 내줬다. 그릇과 수저, 이불과 된장도 줬다. 이중섭 가족은 비만 안 오면 모두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와 군용 반합에 쪄 먹곤 했다.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의 짧은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서귀포 피란 시절이었다. 작품 주제가 가족과 아이들로 바뀌면서 '서귀포의 환상'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같은 걸작을 쏟아냈다. 예술 세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셈이다.

작품 '길 떠나는 가족'은 서귀포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소달구지 위에서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린다. 소를 모는 사내는 감격에 겨워 고개와 손을 하늘로 치켜세웠다. 슬픈 피란이 아니라 즐거운 소풍을 가듯 흥에 겹다.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유토피아였다. 가난에 치를 떨다 이듬해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린 아내도 서귀포를 떠나면서 집주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고 한다. '이 집에서 보낸 일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주인 김순복 할머니는 아흔 된 지금도 이 집에 산다. 안방 문에 '사람이 살아요'라고 써 붙인 걸 보면 관광객들이 무시로 방문을 열어보는 모양이다. 그래도 싫은 내색 않고 조용히 지낸다. 서귀포시가 이 집을 초가로 복원하겠다고 할 때도 순순히 허락했다고 한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씨 그대로다.

서귀포시는 2002년 초가 뒤편 언덕에 이중섭미술관을 열었다. 소장한 이중섭 작품 열한 점 중 아홉 점은 기증받고 재작년에 9억원을 들여 두 점을 사 들였다. 지역사회로선 작은 돈이 아니다. 초가 앞길은 '이중섭 거리'로 이름 짓고 그의 걸작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웠다. 화가들의 창작 산실인 이중섭창작스튜디오도 지었다.

이제 이중섭 하면 누구나 서귀포를 생각한다. 이중섭에 관한 세미나와 추모 행사는 으레 서귀포에서 열린다. 딱 열한 달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않은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 씀이 서귀포를 '이중섭 예술의 본산'으로 일궈냈다. 제주도에서 찬란한 자연 풍광 말고 갈 만한 곳 둘만 꼽으라면 추사 유배지와 이중섭미술관이다.

- 조선일보 2011.10.2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0/20111020025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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