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있는 그림(83)인왕산, 눈으로 산을 오른다. 보고 있노라면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잰걸음으로 산을 오르던 생각이 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내쉰다. 그때 그 내음을 눈을 감고 느껴본다. 고향이 눈앞에 있어 행복하다. 태어나면서 보아온 산이며, 어릴 적 동네친구들과 함께 오르내리던 곳이며, 추운겨울이며 아버지 손에 이끌려 덧을 놓으러 가고, 아침이 되어 선잠을 깨우는 아버지께 가지 않겠다고 투정하면서 따라가 잡아온 토끼가 마루 밑에 겨울을 나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동네 시장 통에 화실을 냈다. 아침이면 일어나 창문을 열면 거대한 인왕산이 겸제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 짙은 안개는 창문을 타고 들어와 내 그림 속에 머문다. 그림이 눅눅해진다. 창밖으로 후두둑후두둑 빗소리가 요란하다. 더 많은 안개로 내 시야에서 산이 사라진다. 내 붓끝으로 들어왔다. 진종일 비가 내린다. 다시 창문을 여니 비는 그치고 산은 포근한 안개를 두르고 있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화실창문에서 바라보던 인왕산이 보이고 소란스럽던 시장 통 정겨운 소리가 그리워진다. 아침이면 옆집 빵집가게의 구수한 빵굽는 냄새와 닭튀기는 기름 냄새, 아래층 슈퍼를 들락거리는 사람 소리 등…….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차를 타고가, 시장 통 거리를 서성인다.
화실이 있던 허름한 자리는 번듯한 건물의 슈퍼가 들어서고 더는 남아 있는 흔적이 없다. 그 자리에 서서 인왕산을 바라보니 앞 건물에 가려 잘 볼 수가 없었다. 다시 눈으로 산을 오른다. 내 그림 속에 인왕산도는 어린 시절 돌아가고 싶은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