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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가가 되려다 좌절한 어부

남정호

나는 전생에 ‘화가가 되려다 좌절한 어부’라 믿고 있다. 왜냐, 물고기라면 먹는 거, 잡는 거에서 보는 것까지 죄다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게 생선요리이고, 시간만 나면 낚시를 하려 한다.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갔다가도 그 꿀 같은 시간에 새 신부를 데리고 갯바위 낚시를 갔을 정도였다. 그러다 밀물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신혼부부가 익사할 뻔 했다. 잘하면 신문에 날 일이었다. 물고기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는 것도 너무 좋아해서 횟집 수조에서 뻐끔거리는, 곧 요리가 되실 운명의 광어?우럭? 도미가 헤엄치는 것도 몇 십 분씩 골똘히 본다. 그러니 수족관은 어떻겠는가. 해외출장을 갔다 잠깐 짬이 나면 그 도시에 유명한 수족관에 혼자 가 오만 물고기를 넋 놓고 본다. 헌데 이런 물고기 사랑을 능가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미술 감상이다. 이렇게 물고기와 미술에 빠진 걸 보면 화가가 되려다 좌절한 어부가 틀림없다. 


돌이켜보면 미술은 어릴 적부터 늘 주위에 있었다. 부친이 어떻게 바람이 들었는지, 한 때 그림수집 매니아가 된 적이 있었다. 심할 때면 한 달 월급 거의 전부를 탈탈 털어 그림을 사셨다. 빠듯한 살림을 책임진 모친과 꽤 자주 다툰 기억으로 보아 아낌없이 거금을 투자하셨던 것 같다. 그 덕에 어렸을 때부터 그림이 늘 주변에 있었다. 게다가 유럽에서 유학하고 근무한 적이 있어 보통 한국인 남자치고는 상대적으로 많은 미술관을 가봤을 게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부끄럽게도 미술, 미술가에 대한 한심한 편견에 빠져 있었다. 예능계 사람들은 지적으로 부족할 거라는, 쉽게 말해 공부 못해서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학 때 음·미대 여학생들과는 아예 미팅도 안 할 정도였다.


김아타, <뮤지엄> 시리즈


그러던 나의 부끄러운 편견을 바로 잡아주는 기회가 찾아온다. 2006년부터 4년 간의 뉴욕특파원 생활이었다. 해외 특파원이란 으레 모든 분야를 커버해야 한다. 물론 문화기사도 처리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미술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교류하게 된다. 헌데 어찌된 일인가. 내가 알게 된 성공한 미술가들은 예외 없이 어느 분야 사람들보다 지적이고, 사고의 폭이 넓었다. 미술작가들이란 엄청난 독서량에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구파란 사실은 정반대의 편견에 빠져있던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독특한 개성에다, 진솔함과 소탈함까지 더해 작가들에게 급속도로 빠져들게 하는 것 아닌가. 그 후 미술가들이 데려가 준 미술의 세계는 더 없이 오묘하고 흥미로운 곳이었다. 마침 세계 미술의 중심 뉴욕에서 일했던 터라 수많은 작가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만난 이들이 이우환, 김아타, 이상남, 전광영, 변종곤, 강익중, 박유아, 정소연, 이재이 등이었다. 이들의 치열한 고민과 열정을 엿보면서 미술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MOMA, 메트로폴리탄, 휘트니 등을 위시해 뉴욕에 자리 잡은 수많은 미술관은 나에게 걸작을 감상할 기회를 줬다. 또 첼시의 갤러리 순방은 첨단 미술을 맛볼 수 있는 행운까지 가져다 줬다. 한 마디로 미술에 관한 한 더 없는 축복을 받았던 셈이었다. 이 때의 감동은 나로 하여금 백남준 씨의 미망인 구보타 시게코를 인터뷰해『나의 사랑 백남준』이란 책을 쓸 수 있는 열정을 줬다. 그 후 미술이 알면 알수록 재미있어져 나의 지식을 측정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지난해에는 ‘준학예사’ 시험에 응시해 괜찮은 점수로 합격했다.  의무 근무시간을 채우면 어디 가서 큐레이터라고 주장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게 됐다. 지금은 신문사에서 그럭저럭 일하고 있지만 불현듯 퇴직의 날이 올 거라는 건 잘 안다. 그렇게 되면 큐레이터로서 뭐든 미술 관련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게 지금의 소박하면서도 거창한 꿈이다.  



남정호(1962- ) 서울대 경제학과 학사, 런던정경대(LSE) 국제관계학 석사.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사회부·정치부 기자와 브뤼셀·런던·뉴욕 특파원, 국제부장을 거쳐 현재 국제선임기자로 일하면서 국제문제 관련 칼럼을 기고 중. 유엔기자협회(UNCA) 부회장 역임, 저서『나의 사랑 백남준』(이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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