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걸
퍽 오래 전이겠다. 초등학교 시절 내게는 미술 시간이 가장 고역이었다. 치밀하게 준비물을 챙기지 않는 내 습관 탓인지 사는 게 변변찮았던 우리 집 탓인지 나는 미술 시간에 제대로 준비물을 챙기는 법이 없었다. 물감과 파레트, 스케치 북, 붓 어느 것 하나는 반드시 빼먹기 일쑤여서 여기 저기 야무지게 챙겨 온 반 친구들에게 얻어쓰거나 교탁으로 불려 나가서 한참 벌을 서곤 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어 내게는 이 난감한 시간을 구제해 주는 고마운 친구가 있었다. 항상 곤경에 처한 나를 구해주던 뒷자리의 이 친구는, 지금은 당시의 나보다 훨씬 고통 속에 신음하는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신부님이 되어 계시다. 그것도 이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깊은 오지 쓰촨성의 한센인 마을에 들어가 벌써 10여 년째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헤어진 발이 되고 일그러진 손이 돼 주고 있다.
세월이 흘러 학교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왔을 무렵,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토록 지겨워하던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유명 화가의 전시회도 가끔 비싼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고, 주말이면 인사동과 청담동, 평창동의 화랑들도 기웃기웃 발품을 팔았다. 제법 물감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은 기발하고 때로는 엄숙하고, 때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절벽 앞에서 당혹해 하기도 하면서,더러 그림 안쪽에 스며있는 작가의 에너지와 열정, 혹은 고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그림을 보고 떠 오르는 느낌을 나의 언어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고 그림을 볼 줄 아는 예술적 안목이나 식견이 느닷없이 생긴 것은 아니었으니 그저 그림이 내 두 눈을 타고 뇌리에 전달될 때 내 뇌에서 그려지는 이미지를 다시 텍스트로 환치해 놓은 정도의 어설픈 작업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이 아름다움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닫기 시작한 이후, 어린 시절부터 턱없이 미술을 싫어했던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이 부쩍 들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 아름다운 것을 보는 순간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황홀한 감정을 오래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무한 자본의 궤도에서 잠시라도 뛰어내려 숨고르기를 하는 나만의 생존방식이 조용한 화랑의 문을 열고 들어가 한 점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림값은 눈물과 땀과 열정이다.
흔히 그림 시장이 어렵다고 한다. 대중들은 그림을 외면하고 그림은 다시 대중을 외면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한다. 때로는 그림의 형체와 색깔이 평균인의 상상을 한참 벗어나 해독 불가능의 수준으로 치달아서 사람들이 두려워하기도 하고,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너무 비싸 언감생심 구매는 불가능하고 돈 많은 사람들의 재테크 수단이나 검은 거래의 매개 쯤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화가들의 분신 같은 그림의 값은 그들이 그림에 쏟아넣는 눈물과 땀과 열정을 생각한다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다.
최근에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를 관람했다. 세계 각지에서 날라 온 무수한 창조물들,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화가들은 얼마나 많은 캔버스와 물감을 버려야 했을 것이며 머리를 쥐어 짜는 불면의 날을 세웠을 것인가. 이 고통스럽지만 황홀한 잔치에 무임승차한 것이 미안해 나는 다시 언어로 그림을 그린다. 잔치에 봉투를 갖고 참여하지 못한 대신에 방명록에라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 임병걸(1961- ) 고려대 법대, 서강대 대학원 언론학 석사. KBS 기자로 도쿄특파원, 경제부장, 사회부장을 거쳐 현 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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