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규
나는 철물을 디자인하는 사람이지만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디자인을 할 때에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는 것도 나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처음 자물쇠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할 때에만 해도 자물쇠는 가구의 부속품으로서 한낱 쇠붙이에 불과했다. 그러한 쇠붙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다보니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귀중한 유물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내가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던 자물쇠를 수 십 년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직감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수집을 할 때에 가끔은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그리 큰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컬렉터로서 내 자신에게 나름 후한 점수를 준다.
내가 컬렉션을 하며 가장 중요시 여기는 원칙은 골동으로서 가치를 따지기보다는 내가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림을 수집하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원칙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골동을 수집할 때 단순히 작품만 보고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내 직업과 연관시켰고, 언제나 작가가 작품을 어떤 의미로 만들었을지 생각한다. 작품 속에 스며들어있는 작가의 의도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작가와의 인연이 생겨나고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아마도 이건 오래된 수집 습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유봉상의 작품
1995년, 최가철물점은 예맥화랑으로부터 초대전을 제안 받는다. 나는 전시 중 수장고를 볼 기회가 생겼는데, 그 곳에서 유봉상 작가의 못 작품을 보면서 작은 충격을 받는다. 흔히 서양화 하면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루미늄 판에 못으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이야 예술간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이런 부조적 회화를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내겐 새로운 시도로 다가왔다. 물론 못으로 입체적인 작업을 하는 귄터 워커(Günther Uecker)라는 독일작가도 있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평면에 못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는 작가는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봉상 작가의 전화를 받는다. 모 여성잡지에 나온 우리 집 거실에 걸린 동생의 작품을 보고 작가의 누나가 동생에게 알려줘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유봉상 작가에게 작품 4점을 의뢰하면서 그와의 인연은 시작된다. 작품을 보면 작가의 모습이 대충 떠올려지는데 작품과 달리 순수한 작가의 모습은 내게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2001년 뉴욕을 방문하여 소호에 있는 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 아침 일찍 나와 마켓을 가려는데 골목이 온통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블럭에 있는 트윈타워 중간층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화 촬영하는 줄 알았는데 잠시 후 건물이 붕괴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영어도 안 되지 통제 속에 갇혀 있는데 소호에 살고 있던 이상남 선배와 연락이 되서 가까스로 한인 타운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이상남 선배의 작업실은 브룩클린에 있었는데 작업실에 방문했다가 작품 3점을 작가의 권유에 의해 그 난리통에 작품을 들고 귀국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봉투의 메일을 받는데 이상남 작가의 작품 사진과 신문 기사 스크랩이 들어 있는데 작품 한 점을 더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답장을 하지 못 했고 시간은 흘러 서울에서 작가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간 미뤘던 결혼식을 치르는 것과 결혼식이 치러졌던 LIG보험사옥의 로비에 걸린 대형 작품으로 봐서는 경제적으로 많이 좋아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후 이상남 작가로부터 박물관에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받고 조수와 함께 만났다. 그는 내게 작품을 권유하던 시절 자신의 어려웠던 상황을 얘기하면서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 당시 반 강제적으로 작품을 구매했지만,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때는 이때다 싶어 “형, 그때 내게 권했던 그 작품 그 가격으로 내게 줘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같이 있던 조수에게 동의를 구했더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근데 정작 작가는 아직까지도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지금도 노란봉투 메일은 내가 고이 간직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작가와 만남이 있었지만 지면관계상 오늘은 여기서 줄인다. 이제 얼마 후면 양평 강상면에 박물관·미술관 등 복합문화공간을 오픈할 예정이다. 나는 그간 수집하여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는 나의 자식 같은 작품들을 선보일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으로 떨리면서도 설레기도 하다. 10여 년 전 자물쇠를 주제로 쇳대박물관을 오픈하면서 관객들의 반응 살피던 심정으로 나는 또 다른 도전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 최홍규(1957 -) 쇳대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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