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벽
“친구야 대체 이게 웬일…인가…”
인사동 입구에서 노제를 지내던 날, 난생 처음 조사라는 걸 읽다가 시작부터 목이 메었다네. 아닌 게 아니라 대체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자네랑 기타치는 근식이, 예전 세시봉 친구 익균이랑 밤늦게까지 술 마시며 얼마나 깨가 쏟아졌던가? 그러고도 할 말이 남아 또 잡았던 날이 3월 5일. 자네 정년퇴임이나 끝내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뭉치자면서. 아니, 그 사이에 한 번 더 만났었군. 이장희가 콘서트를 앞두고 한방 쏜다며 영남이 형이랑 형주, 세환이, 사진 찍는 김중만이, 전유성이 그리고 자네랑 나... 그렇게 다들 모여서 그날은 주로 와인을 마셨던가? 암튼 마침내 2월 28일 퇴임식을 하루 앞두고 내게 전활 걸어왔지? 날더러 파티 사회를 봐야 한다면서. 그냥 참석만 해도 되는 걸로 알았던 나로선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하필이면 그날 방송 스케줄이 걸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부랴부랴 아나운서하는 우리 딸내미한테 전활 걸었더니 걔마저 생방송이라나 뭐라나. 난감해하는 내게 “그냥 교직원 시킬 테니 걱정 말고 밥벌이나 잘해…” 그러면서 껄껄 웃던 게 우리들 40년 우정의 마지막 대화였네. 나중에 다녀온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네만 그날 손님들이 구름처럼 왔더라며? 왜 안 그랬겠나? 자네가 이 나라 대한민국 화단에 왕초 아니던가? 분명 와준 사람들한테 일일이 술 한 잔씩 다 따라 줬을 것이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사진 찍어주기 바빴을 것이고. 자네 성격에 얼마나 널을 뛰었을까 싶네. 그런 다음날 학교에선 고별 전시회 테이프 커팅이 있었고, 30년 동안 신세졌던 동료교수들이랑 교직원이랑 어쩔 수 없이 또 한바탕 부어라 마셔라. 연이어 고향 영주에서 온 후배들 데리고 2차까지.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파김치가 된 채 집에 도착한 자넨 아들한테 배가 고프니 뭣 좀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며? 그러나 숟가락을 놓고 돌아앉기가 무섭게 먹은 걸 다 토해내고는 이내 침대에 몸을 던진 뒤로 그만….
자네 별명이 ‘고릴라’, 아무리 천하장사라 하더라도 그 바쁜 스케줄을 무슨 수로 감당했겠는가? 누구 말대로 마치 삶의 끝을 예감이나 한 것처럼 주변에 있는 친구, 선후배, 몽땅 불러다 작별인사 거나하게 치르고 덤으로 고별전까지. 자넨 참 대단한 사람일세. 자네 생전에 그려낸 작품이 3천 여점에 그것도 성에 안차 앞으로 3천 점을 더 그리겠노라 큰소리 뻥뻥 쳤던 자네. 자넨 나이도 안 먹는 줄 알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홍대 앞 사우나에서 만났을 때 홀랑 벗고 탕으로 들어오는 자넬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지. 겉으로 보기엔 장군기골인 자네지만, 떠미는 세월을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법. 그땐 그냥 모른 척했지만, 눈에 띄게 비쩍 마른 자넬 보면서 먼저 떠난 자네 마누라의 어둔 그림자를 보았네. 누군가 곁에서 밥도 챙겨 먹이고, 늦게까지 술에 젖어 들어오면 바가지라도 긁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시커먼 아들 녀석만 둘이니 안 봐도 뻔하지. 그렇게 혼자 휘둘린 홀아비 생활이 10년. 모교 학장이네, 협회 이사장이네, 비엔날레 위원장이네, 게다가 외국 드나들기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했으니 그동안 견뎌낸 게 용하네. 우스갯소리로 어떤 땐 마누라 없는 자네가 조금은 부럽기도 했네만, 실제 당사자 입장에선 한없이 외롭고, 불쌍한 노릇이었구먼.
어쨌거나 자네가 떠나고 난 뒤 우린 약속대로 3월 5일 우리 집에서 모두 모였다네. 누구누구 하면 다 알만한 술꾼 10여 명이 꽤 늦게까지 퍼마셨지. 그러면 그럴수록 어딘가 빈듯했던 그날 그 자리. 문득 우리 집 현관 입구에 걸린 자네 그림에나마 술 한 잔을 따르고 나서야 겨우 서운함을 메울 수 있었다네. 2년 전인가, 내 사진전 때 자네가 가필작업을 해준 또 다른 그림 앞에도 한 잔 찔끔. 어찌 보면 아마추어나 다름없는 내 사진전에 감히 합작제안을 했을 때, “우리 아버지가 원래 사진쟁이였거든…” 그러면서 선뜻 받아준 자네가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고마웠었지.
어찌 보면 자네랑 난 별 닮은 데도 없으면서 꽤나 붙어 다녔던 것 같네. 대학시절 자넨 회화과였지만 난 디자인 아니었나. 다만 같은 ROTC라는 것 때문에 같이 훈련복 입고 뛰어다녔을 뿐. 자넨 학창시절부터 솜씨가 출중했던 사람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우리 밴드동아리 홍익캄보 연습실을 자주 들렸고, 공연 때는 아예 무대 앞에 나와 덩실덩실 춤까지 췄을 만큼 은근 딴따라 끼마저 없지 않았지. 학교를 나온 뒤로 자넨 모교 교수로 난 신문쟁이로 제가끔 가는 길이 달랐는데도 우린 이런저런 모임 때마다 늘 곁에 있었던 게지. 내가 세시봉 시절에 장희를 소개했고, 근식이를 알게 됐고, 영남이 형이 연결되고. 그게 대학 3학년 즈음이었으니 꽤 오랜 얘기일세.
자네가 떠나고 열흘쯤 뒤에 장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열었지. 물론 우리 아군들이 다 갔었고, 공연 중에 장희가 노제때 읽었던 조사를 읽기 시작했다네. 그 큰 무대에서 수천 명 사람들을 향해. 스크린 위엔 자네 영정이 떠오르고, 사람들은 일순 숙연한 분위기 속에 한 구절, 한 귀절을 경청했다네. 특별한 이벤트였다네. 그럴 만큼 자넨 대단한 사람이었고, 떠난 뒤에도 대단했다네. 이제 다신 못 볼 친구 이두식. 우린들 별수 있겠나. 다만 자네가 하늘가는 길에 첫 테이프를 끊었을 뿐. 이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부디 잘 쉬게나. 우리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는 그날 장희 노래처럼 마시자, 마셔버리자꾸나. 그때까지 잘 있겠나. 안녕.
- 이상벽(1947- ) 방송인. 현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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