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국
“그 빛은 바로 당신이었어.”
…… 테오도르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그 속삭임은 나무 액자 같은 모니터 속 가상 편지지에 필기체로 옮겨진다. “프린트!” 테오도르가 말한다. 곧바로 옆에 있는 프린터에서 마치 손으로 직접 쓴 듯한 편지가 출력된다. 그는 편지를 훑어본다. 그의 주변에 같은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곳은 ‘아름다운 손글씨 편지 닷컴’.
왼쪽부터 영화 <그녀(her)>, 전시 ‘트로이카: 소리, 빛, 시간-감성을 깨우는 놀라운 상상’, ‘초자연(Super Nature)’, ‘로우테크놀로지:미래로 돌아가다’의 포스터.
2014년에 개봉한 영화 <그녀(her)>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영화는 주인공 테오도르가 ‘사만다’라는 인공 지능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사랑에 빠지는 사건을 다룬 SF 로맨스 영화로,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이 영화의 내용도 흥미롭지만 주인공의 직업과 테크놀로지 제품이 시선을 끈다. 영화에서 그려진 시대는 현재보다 진보된 기술을 가진 미래 시대이다. 주인공은 손편지 대필 회사의 직원이며, 그가 사용하는 테크놀로지 제품들은 첨단 기술을 가졌으나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영화 속의 상황이라지만, 미래의 첨단 기술 시대는 왜 아날로그를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하며 문득 영화가 개봉한 해에 연이어 열렸던 뉴미디어 전시들, '트로이카'와 '초자연', '로우테크놀로지'가 떠올랐다.
테크놀로지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디지털은 0과 1의 이진법으로 인해 이분법적이며 모호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아주 모호하며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충동적이기도 하다. 2014년에 잇따라 열린 이 3개의 전시들은 엄격한 규칙을 가진 테크놀로지를 비합리적인 낭만주의적으로 변용하여 보여 주었다. 18세기 중엽, 낭만주의가 이성적인 인식을 추구했던 계몽주의의 엄격함을 벗어나 감각현상들에서 인간성의 진실을 찾았던 것처럼, 이 전시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첨단 기술의 엄격함을 벗어나려는 낭만주의적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인간과 기계, 과거와 미래, 현실과 환상, 낡음과 새로움, 기술과 예술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재목적화(repurposing)’하거나 ‘재매개(remediation)’하여 재맥락화 했던 이 전시들은, 인간과 기술의 상호 존재를 인정하는 ‘인터(inter; ’사이’라는 의미의 접두사)’에서 인간이 지닌 속성을 찾고 있었다.
뉴미디어에 대한 경직된 동시대적 편견 속에서 이 전시들은 뉴미디어의 새로운 경향이 형성되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최근까지 현대미술에서 뉴미디어 전시는 기계적인 메커니즘 그 자체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 왔다. 또한 관람객에게 뉴미디어가 곧 첨단 기술이 적용된 영상물이라는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전시들은 신기한 테크놀로지 놀이(실험) 보다는 인간성의 진실, 즉 내면에 존재하는 감성과 심리, 감수성을 인식하게끔 이끌었다. 과잉 디지털 문명의 계량화와 수치화를 감성적으로 변이시킨 '트로이카: 소리, 빛, 시간-감성을 깨우는 놀라운 상상'(대림미술관, 2014.4.10.~10.12)은 빛의 수면을 걷는 초자연적인 느낌(<Falling Light>, 2010), 어제의 날씨 정보를 제시하여 상기시켰던 정보의 일회성과 시간에 대한 향수디지털 의존성의 문제(<The Weather Yesterday>, 2012), 빛의 구조물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움과 고결함(<Arcades>, 2012) 등을 감각하게 했다.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게 했던 '초자연(Super Nature)'(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14.9.2.~2015.1.18.)은 레이저 빛의 벽들을 뚫고 지나가면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촉(<더 많은 빛을>, 2014), 낯선 체취와 소곤거리는 소리, 피부에 닿는 공기의 흐름이 가져온 무형의 존재에 대한 인식(<아일랜드 프로젝트: 불안한 숨결>, 2014), 예측 불가능한 유체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초자연적 신비(<캐스케이드(폭포수)>, 2014) 등을 체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첨단 기술 속에서도 끊임없이 소환되는 옛 기술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 '로우테크놀로지:미래로 돌아가다'(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14.12.9.~2015.2.1.)는 수공예적 키네틱 조각이 보여주는 반복성에서 깨닫는 현대인의 생(生)에 대한 피로감(<언제나 피곤은 꿈과 함께>, 2013), 일회용 비닐 봉지가 탄생시킨 새로운 생명체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저열한 소비 욕망(<URBAN CREATURE-칼라파고스>, 2014), 일식(日蝕)이라는 과학적 현상이 갖는 정서적 효과가 말해주는 삶의 만남과 이별(<이클립스>, 2014) 등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다만 인간성의 진실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함으로써 감성적 전시를 형성시켰다.
영화 <그녀>에서 고도화된 기술 시대가 아날로그를 끌어안은 것은, 동시대인들이 경험 중인 건조한 기계적 메커니즘에 대한 환멸감이 인간성의 진실을 소환하려는 바람을 갖게하면서 구현된 영화적 모습이다. 예술의 기술 낭만주의 추구 또한 기술 발전으로 소외되는 인간의 속성을 되찾으려는 예술적 발걸음으로 읽힌다. 이러한 경향은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확대될 것이다. 올해는 '로봇은 진화한다'(GS칼텍스 예울마루, 2015.2.13.~4.5.), '로봇 드림스(가제)'(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4월∼8월) 등 로봇 관련 전시들이 눈에 띈다. 그 전시들은 과연 낭만적일까? 앞으로 낭만적 테크놀로지 예술이 어떻게 나갈지 기대를 가지고 주목해보자.
안진국(1975-) 홍익대 대학원 석사.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양주시립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입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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