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일
창조는 기록과 기억에서 시작된다.
창조가 국가의 화두인 시대이다. 그렇다면 창조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당연히 개인에게는 기억에서부터, 도시에게는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억이 기반이 되어야 뇌는 예측을 한다. 우리의 기억-예측 체계가 더 높은 추상화 단계에서 작동할 때, 보기 드문 예측이 가능하고 자신이 창조적이라고 믿게 된다. 모든 창조 예술들은 예상되는 패턴을 타파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줄때 최상의 작품이 된다. 기억과 기록이 없이 창조가 시작되기는 어렵다. 어느 분야든 속도와 성과 위주의 환경에서는 지나간 기록과 정보를 기초로 긴 시간의 숙고를 통해 발생되는 창조의 결과물이 갑자기 생산되기는 어렵다.
감각의 70%는 시각이 차지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도시는 파티 같은 행사를 좋아한다.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과장하여 상상하게 하는 전시적 행사가 파티처럼 행해진다. 문화예술분야에서조차 기본기가 되는 소프트웨어는 실종된 채 하드웨어 중심의 도시가 된다면, 결국 문화예술 인프라 부족에 직면하게 된다. 먹고 자고 배설만 하는 도시에는 빌딩과 아파트와 자동차만 있으면 족하다. 그러나 2차 대전으로 파괴된 베를린에서 독일이 가장 먼저 음악당과 미술관을 복구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시각, 청각, 촉각 중 감각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시각이다. 그런 면에서 도시에서도 특히 문화예술 중 미술이 차지하는 역할은 우리 몸의 뇌만큼 중요하다.
기록을 소중히 하지 않는 도시는 치매를 앓게 된다.
프랑스의 프레누아 현대미술국립스튜디오 출신으로, 유학시절에 알제리 노인이 운영하는 모텔에서 아르바이트를 오랫동안 했던 미디어아트 작가 강현욱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던 시절에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관공서에 가면 모든 사항을 대부분 말로 허락을 받았으며, 서류에 서명을 하거나 기록을 남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이든 기관이든 국가든 그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식민지를 다스리는 매우 영악한 통치방법이었다. 기록되지 않은 모든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이제 노령화 되어가는 시대에 한 개인에게 닥쳐올 가장 위태로운 상황도 바로 기억력이 사라져가는 혈관성 치매나 알츠하이머 질환이다. 모든 것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인간과 인간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는 100년이 넘은 자료들이 있고, 지금도 매달 기증되는 도서와 도록 자료들이 100여 점에 이른다. 1년이면 입수 자료가 1,200여 점이 넘는다.
한국미술정보센터는 모든 작가들의 개인미술관 역할이다.
도시마다 갤러리와 전시장은 많아졌지만, 기록하고 보관하며 시대를 이어주는 진정한 미술관(Museum)은 태부족인 현실이다. 물론 미술관은 많은 돈이 든다. 이런 현실에서 미술정보센터는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중요한 문화 인프라가 된다. 모든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이나 자료들이 영구히 전시되는 미술관을 꿈꾼다. 이 꿈은 극소수의 화가들에게만 실현된다. 그것도 대부분 사후에나 가능해진다. 권위적이고 유력한 기록만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연약하여 혼자서는 남겨둘 여력이 없는 작은 전시 팜플랫 한 장이라도 소중히 보관되는 것은 문화예술인과 화가들의 꿈이다.
국민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는 시대
젊은 시절 전시회를 하며 만들었던 도록이나 팸플릿, 그리고 작품관련 자료들이 자신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보관되고 열람할 수 있는 한국미술정보센터는 예술가나 화가들에게는 개인미술관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이 예술인과 국민 모두에게 문화적 권리를 지켜주는 작은 실천이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100년 자료들과 미래의 자료들이 지속적으로 보존되며 관리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5월말에 국민 개개인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고, 우리 사회에 문화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기 위한 문화융성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국민의 문화적 권리를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기대가 크다.
- 박성일(1957- ) 경희대 한의과대학, 대학원 졸업. 한의학 박사. 한국 최초의 홍채의학자. 대한홍채의학회 회장. 『내 눈 속의 한의학 혁명』 저자. (사)백북스 대표. (사)대전시립미술관 후원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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