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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홍 / 보통사람들에게 아리랑을 되돌려주다

고충환

일전에 우연한 기회에 수몰지구로 지정된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미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는 마을에 이러저런 이유로 마을을 떠나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남아 이방인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고, 주인 잃은 개들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입자가 된 이방인들은 이 집이며 저 방을 기웃거리고 다녔는데, 그 중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상자들이며 열린 상자 위로 널브러진 사진들이 필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대개 손바닥만 한 사진들에서 심지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흑백사진들이었다. 지금은 화면을 꽉 채운 풀사이즈 사진이 대세지만, 하나같이 가장자리로 하얀 테두리가 둘러쳐진, 더러는 섬세한 레이스 문양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나름으로 멋을 부린 사진들이었다. 보이는 대로 주섬주섬 주워 챙겨 집으로 가져왔던 것 같고, 이후로도 한참동안 시간을 땜질하는 심심풀이가 돼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하나둘 없어졌는데, 아마도 지금 찾아보면 몇 장쯤은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돌이켜보면 좀 엉뚱하다 싶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에 왜 그렇게 애착이 가고 집착했을까. 그 사람들은 이 사진들을 왜 버리고 갔을까. 애착이며 집착이 시들해진 것일까. 먹고 살기도 힘든 판국에 그저 몇 푼 안 되는 보상금이나마 받아 챙겨 부랴부랴 떠나기에 바빴던 것일까. 경황이 없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나는 또 왜 그렇게 시들해진 애착이며 집착을 부렸을까. 모를 일이다.


사진 속 기호는 온통 모를 일 투성이다. 보면 볼수록 오리무중에 빠진다. 사진은 핍진성 곧 영락없는 닮은꼴이 함정이고 매력이다. 닮은꼴이 사람을 홀리고 착각에 빠트린다. 나는 지금 실재를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실재의 닮은꼴일 뿐 실재가 아니다. 실재와 이미지를 동일시하다가도 그것이 착각임을 안다. 실재와 이미지를 동일시하는 것은 나의 욕망이며, 그것이 착각임을 아는 것은 현실인식이다. 욕망도 인식도 나에게서 건너간(사진에 투사된) 것들이고 나에게 속한(나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준) 것들이다. 한 장의 사진을 읽는다는 것, 사진 속 기호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곧 욕망과 인식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욕망도 사진을 읽고 인식도 사진을 읽는다. 그 진위며 경중을 따질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다른 어떤 이미지도 이렇게 욕망과 인식의 경계를 허무는(적어도 눈에 보이게 허무는) 경우는 없다. 단지 사진만이 그렇다. 바로 그것이 사진의 함정이고 매력이다. 사진의 양가성이며 사진 속 기호의 이중성이다. 어디 이중성뿐이랴. 사진 속 기호는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포개져 있다.

 

안창홍과 사진과의 관계는 각별하다. 작가의 그림은 진작부터 사진과 긴밀했고 친근했다. 그저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참조하고 변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사진과는 또 다른 사진을 그린다. 사진은 찍는 것이기 마련인데, 사진을 찍지 않고 그린다는 것에 작가의 그림의 특수성이 있다. 사진을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인 만큼 사진을 변형하지 않고 사진 그대로 그린다. 변형할 필요도 없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사진 속에 이미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이미 다 들어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그 사진 그대로 그리면 될 일이다. 그래서 사진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며 태도는 참조라기보다는 발견에 가깝다. 사진을 찍지 않고 그린다는 것에 덧붙여, 이처럼 사진을 참조하지 않고 발견한다는 것, 그래서 일종의 아카이브의 맥락과 관점에서 읽을 소지가 있다는 것에 작가의 그림의 특성이 있다.


여하튼 이렇게 한쪽에 찍은 사진(혹은 작가가 발견한 사진)이 있고(비록 대개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여하튼) 다른 한쪽에 그린 사진이 있다. 찍은 사진과 그린 사진은 서로 영락없이 닮았다. 다만 크기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하이포를 떠올릴 일은 아니다. 첨단의 디지털 광학기계(화소가 높은 고성능 카메라)를 동원하면 모를까, 사진의 세부는 의외로 하이포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옛날사진일수록, 시간의 풍화에 절은 색 바랜 사진일수록 그 거리는 더 멀다. 시간이 그 거리를 더 멀어지게 한다. 시간이 들어서 사진의 사진다움을 더 오롯이 드러나게 한다. 시간이 매개가 되면서 사진 속 이미지는 하이포 혹은 세부와 멀어지고, 대신 특유의 분위기가 강화된다. 그리고 닮은꼴을 확인시켜주는 계기로 치자면 세부보다는 분위기가 더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세부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 때문에 더 닮아 보인다는 말이다. 바로 감각이며 감수성의 문제로 봐야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분위기를 감지해내고 그 분위기 그대로 고스란히 그림 위로 옮겨놓는 능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심지어 사진을 그린 그림이 아닐 때조차 사진을 그린 그림처럼 보인다.

 

작가의 사진과의 인연은 1979에서 198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그려진 <가족사진> 시리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 특징인 이 시리즈 작업들은 아마도 표정을 잃은 시대에 대한 묵언의 항거 내지 침묵의 저항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이 시기의 초상들엔 하나같이 모델의 눈과 입을 시커멓게 칠해 그 표정을 알 수가 없거나, 그렇게 칠해진 구멍을 통해서 마치 어둠 자체인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거나, 아예 죽은 사람들 곧 사자들의 느닷없는 출현을 보는 것 같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누가 시대로부터 표정이 사라지게 했는가. 알다시피 1980년대는 정치적으로 억압된 시대였다. 표정이 지워진 초상들은 바로 그 억압된 시대의 표상이었다. 다른 작업들도 그렇지만, 작가의 작업은 시대와 연동된다. 그 연동은 직접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이고 암묵적이고 묵시적이란 점에서 다른 현실주의 내지 참여미술작가들과 차별된다.


그리고 주로 1985년에서 2002년 사이,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에 제작된 <기념사진-봄날은 간다>(제목은 약간씩 다르다) 시리즈에서 사진들은 사진 위로 피땀을 흘리고, 자잘한 비정형의 크랙과 흠집이 시간이 만들어준 풍화의 흔적과 함께 그 흔적에 묻힌 삶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사진_그림의 표면 위로 노란 피막이 덮이고 어디선가 날아든 나비 떼가 나풀거린다.
이 연작에서 봄날은 삶을 통해서는 거머쥘 수 없는 비현실적인 시간이며 욕망이 유예된 불구의 시절이다. 그 봄날은 제대로 꽃 피워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일그러져간 청춘들과 함께 무심한 시간의 표면 위를 흘러 지나간다. 그렇게 봄날에 실려 유년이 가고 청춘이 간다. 4.19가 가고 5.18이 간다. 삶이 가고 역사가 간다. 봄날은 간다는, 이 멜랑콜릭한 말 속에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온 삶에 대한 회한이 묻어있고, 과거형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를테면 그땐 그랬었지)에 대한 슬픔이 묻어난다. 과거가 아름다운 것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 죽음을 통해서 삶을 증거 하는 것들은 아름답다. 그리고 때론 나비 대신 파리 떼가 날라 다닌다. 이처럼 <기념사진> 연작에서 나비와 파리는 사진_그림의 표면 위로 날라 다니면서 봄날을 죽이고 그 죽음을 주검으로 사물화 한다. 죽음의 환영을 대리하는 나비와 주검의 실재를 대리하는 파리가 하나로 만나진다.
그리고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익명적인 주체들이 찍힌 명함판 사진 필름을 뭉텅이로 얻는다. 작가의 남다른 감수성이며 감각의 촉수에 존재도 이름도 흔적도 없이 묻힐 뻔 한 기호들이 붙잡힌 것이다. 그 필름을 확대 인화한 일련의 사진들을 소재로 하여 <49인의 명상> 시리즈(2004), <사이보그>와 <사이보그의 눈물>, 그리고 <얼굴>과 < 부서진 얼굴> 시리즈(2006-2007)가 제작된다.
<49인의 명상> 시리즈에서 작가는 사람들의 눈을 감겨 영혼을 가두고, 입술을 붉게 칠해 생기를 불어넣는다. 작가의 사진_그림에서는 이렇듯 영혼(죽음)과 생기(삶)가 만나지는 아이러니와 이율배반이 자연스럽다. 사람들의 목덜미나 이마 언저리에 덧그려진 나비는 그들이 다름 아닌 사자임을 암시한다(영혼의 전령으로서의 나비?). 그리고 투명 에폭시로 정착시키고 철제 프레임 속에 봉함으로써 이중삼중으로 영혼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이렇듯 영혼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봉하는 작가의 행위는 주검을 박제화 하는 박물학자의 생리를 닮았다. 더불어 영혼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는 점에선 주술사의 생리를 닮았다. 영혼을 박제화 하고, 영혼으로부터 시간을 박탈하고, 영혼을 영원한 현재 속에 붙박는다. 영혼의 미학이고 좀비의 미학이고 주검(아님 죽음?)의 미학이다. 주검은 썩고 부패하고 산화하도록, 심지어는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지게 내버려둬야 한다. 작가는 여기에 의도적으로 개입해 순리를 왜곡하고 시간을 정지시킨다. 여기에 잔혹함이 있고 잔인함이 있다. 불경스러움이 있고 그로테스크가 있다. 죽음에 경의를 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죽음과 더불어 노는 것 같기도 한 이 작업은 아마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금기와 터부가 사라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몸을 섞는 어떤 경지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작가는 마치 유리구슬과도 같은 기계적이고 무표정한 눈을 그려 넣고, 목덜미와 얼굴 부위에 기계부속이나 전선줄이 삐져나오게 했다. 바로 <사이보그>와 <사이보그의 눈물> 시리즈다. 그들의 표정은 무표정하고, 그들의 얼굴은 마치 부분적으로 박막이 벗겨진 마네킹처럼 깨지고 균열이 가 있다. 한편으론 주검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로봇을 상기시킨다. 이런 그들이 눈물을 흘린다. 무정한 기계 눈동자로부터 유정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기계인간의 눈물이라는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이 치유 불가능한 상처, 불가항력적인 상처, 피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상처를 환기시킨다. 유정과 무정의 경계를 허물고 주체와 사물을 통합하는 이 휴머노이드 로봇은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이며, 주체 내부로부터 잉태된 타자를 주지시킨다.
그리고 <얼굴>과 <부서진 얼굴> 시리즈에서 작가는 초상사진들을 마구 조각낸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낸 조각들을 오려 붙이거나 찢어 붙이는 방법으로 얼굴을 재구성한다. 얼굴은 이중삼중으로 겹치고 이목구비와 가장자리 선은 서로 어긋난다. 본래의 얼굴이 원형을 잃고 재편집되고 재조립되고 재구성되는 것. 이 시리즈 속 얼굴은 사이보그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이질적이고 복합적이고 중층적이고 다중적인 예기치 못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이로써 작가는 주체에 내장된 무의식을, 미처 발화되지 못한 채 흘려보낸 말들을, 그리고 잠재적인 욕망이며 타자의 얼굴을 끄집어낸다. 비록 사진이지만 사람의 얼굴을 마구 칼질하고 찢고 오려붙여 그 형태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불경스럽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만 유독 작가의 행위가 불경스러운 것은 그 사진들에서 혼이 느껴지기 때문이며, 작가가 그 혼을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금기와 터부의 금을 넘어서고 경계를 위반한다. 얼굴을 칼질하는 작가의 행위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화의식(피의 정화?)에 맞닿아있는 것이며, 삶과 죽음과의 단절된 연속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며, 불경스러움을 넘어 인간 존재의 신성함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작가는 <아리랑>이란 민족대서사시를 연상시킬 만큼 그 품이 넓고 깊은 주제 아래 다시금 이런 익명적인 주체들이며 이름 없는 사람들 그리고 보통사람들의 초상을 불러 모은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 계급론에서 문화에도 계급이 있다고 했다. 그런 계급으로 치자면 아리랑은 이런 이름 없는 사람들이며 보통사람들의 노래다. 그 노래의 한쪽에는 한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흥이 있다. 한이 크면 흥이 되고 흥은 한 속으로 잦아든다. 슬픔이 비통해지면 기쁨으로 차고 넘쳐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슬픔이 터져 나와 카타르시스가 된다. 그렇게 한은 흥을 부르고 흥은 한을 견인한다. 한과 흥이 슬픔과 기쁨이 경계를 허물고 몸을 섞는 경지가 아리랑의 노랫가락이며 장단 속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보통사람들이 그네들의 삶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그 삶의 근성이며 지혜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 경지를 보통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알랴. 아리랑이 보통사람들의 노래이듯 작가의 <아리랑>은 보통사람들에게 바치는 오마주이다.

그렇게 색 바랜 사진 위로 보통사람들의 초상이 작가에 의해 불려나온다. 이를테면 치마저고리를 곱게 갖춰 입은 요조숙녀들이 평생의 반려를 다짐하며 사진을 찍었다. 기모노를 갖춰 입은, 털목도리로 치장한, 특히 파머로 웨이브를 준 머리 스타일로 봐서 아마도 당시 소위 첨단의 모드며 신여성을 대변했을 기녀들도 보인다. 교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이 붕우지간을 기념해 사진을 찍었는데, 지금처럼 꽃다발이 아니라 꽃 항아리를 흰 장갑까지 낀 손으로 받아 쥐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속으로야 불량한 끼를 억제하고 있었을지는 모르나, 순진하고 순수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코 찔찔이 동생이 형의 입학을 축하해주기 위해 곁에 섰는가 하면, 아버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가족초상사진에서는 가부장적 가치체계와 함께 아버지의 권위와 가족애가 묻어난다. 그리고 선남선녀들의 결혼식 사진과 누군지 모를 묘령의 여인이며 야유회 사진에 이르기까지 해묵은 시절의 장면 장면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안창홍은 이 사진들을 보고 그대로 그리기도 하고, 더러는 캔버스에 사진 이미지를 전사하거나 붙여 고정시킨 연후에 그 위에 덧그리거나 한다. 그렇게 그리거나 덧그린 그림들 위로 마치 색 바랜 사진과도 같은 시간의 지층과도 같은 노란 피막이 내려앉는다. 노란 피막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감행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이며 감각적 장치이다. 투명하고 노란 피막이 덮이는 순간 현실은 불현듯 과거 속으로 밀어 넣어지고 과거는 현실 위로 호출된다. 그렇게 현재 위에 과거가 포개진다. 이렇듯 색 바랜 흑백사진 속의 소풍장면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까. 그 실재감을 도대체 어떻게 손에 쥘 수가 있을 것인가. 노란 필터는 사진 속 장면으로부터 현실감을 앗아가고, 그렇게 영원한 과거로 박제화 한다. 그러므로 사진 속에서 현실과 연결될 만한 어떤 단서라도 찾으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투명한 피막은 비록 한갓 종이 위에 그리고 캔버스 위에 덧입혀진 박막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은 모든 존재를 흩어버리고 산화시키며 종래에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지게 할 만큼 강력하다. 그렇게 배반당한 시간의 표면 위로 유령처럼 환영처럼 노랑나비 떼가 날아오른다. 노랑나비는 기억을 망각 속으로, 존재를 부재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소풍에 어울리는 봄날에마저 실재감을 더해주지 못한다. 나비는 봄날의 전령인데도 말이다.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꽃처럼 화면을 온통 가릴 만큼 화면 위에서 나풀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을 보고 있으면 몽롱해지고 아득해지고 흐릿해지고 절실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고 있다. 사실은 사진을 그림으로 그리는 과정에서 작가가 감긴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사람들의 눈을 감겼을까. 원래 뜬 눈을 감김으로써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속된 말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그 혹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 혹은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눈과 마음을 동일시한 것인데, 눈은 비록 몸의 일부이지만 신체 부위 중 정신을 가장 많이 닮아 있어서 그 속성이 정작 몸보다는 정신에 가깝다. 관점이나 관념으로 나타난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며 입장을 이런 눈에 빗댄 표현도 같은 이치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렇듯 마음을 상징하고 정신을 대리하는 눈을 왜 감긴 것일까. 마음을 지우고 정신을 지움으로써 주체를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주체를 더 오롯이 하고 싶어서이다. 니체는 쥐가 궁지에 몰리면 자기 내면으로 숨는다고 했다. 내면 말고는 달리 숨을 데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이처럼 자기 내면으로 숨는 행위를 궁여지책이 아니라 자기변혁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논리로서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궁지로 내몰아라. 그러면 내면이 열릴 것이다. 육안이 닫히면 심안이 열린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시대로부터 눈을 감으면서 사실은 더 잘 보고 더 또렷하게 본다.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되 직접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이고 암묵적이고 묵시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차별된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엔 더 깊고 넓게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작가는 닳고 닳은 역사의 주체란 말을 심각하게 재고하게끔 한다. 아마도 보통사람들을 사진_그림 속에 영원히 봉함으로써 그들을 진정한 역사의 주체로서 재설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더불어 아리랑이 보통사람들의 노래이듯 <아리랑>이란 주제 아래 마치 산맥처럼 전 국토 구석구석에 스며든 보통사람들의 혼이며 신을 낱낱이 아울러 정립(혹은 재정립)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원래 주인이었던 보통사람들에게 아리랑이란 잊힌 노래를 되돌려주고 싶고, 그렇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을 것이다.

 

안창홍의 사진_그림은 그 미학적 당위성이 인식론보다는 존재론에서 찾아진다. 매체적인 특수성과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보다는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있는 정서적인 환기력에서 찾아진다. 그리고 그 정서는 거시적으로 볼 때 죽음에 맞닿아 있고 부재에 잇대어져 있다. 여기서 죽음은 죽음이 아닌 삶을 증명하고, 부재 또한 부재가 아닌 존재를 증거 한다. 그런 점에서 모순율과 아이러니가 작가의 창작 방법론을 지지한다.

한 장의 흑백사진을 매개로 현실은 과거 속으로 밀어 넣어지고, 과거는 현재 위로 호출된다. 그리고 노란 필터를 통해 그렇게 포개진 과거_현재를 박제화 한다. 그렇게 현재는 과거가 밀어올린 것임을, 현재 위엔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그 과거_현재 위로 마치 보통사람들의 혼령과도 같은 노랑나비 떼가 나풀거리며 날라 오른다. 그 과정에서의 불경스러움은 오히려 존재의 신성함으로 다가오고, 존재에 대한 훼손은 정화며 갱신을 위한 의식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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