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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형 / 육체의 유체역학

이선영

 이준형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반듯하지 못하고, 대부분 이런저런 방식으로 엉클어져 있다. 그들은 정상보다는 비정상이,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강조되어 있다. 모노톤으로 처리된 중성적인 바탕 한가운데 한자리 씩 차지하는 인간은 추락과 해체, 뭉개기와 터트리기라는 수난극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인터넷 등에서 수집한 인물들의 익명성은 개성적이어야 할 주인공의 요건에 들어맞지 않는다. 인물의 실제성이나 실재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그의 작품에서 인터넷에서 떠도는 사진들은 인간이라는 최소한의 요건만을 충족시킬 뿐,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되지 않는다. 그들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즉 운동이 발생하는 바탕이 될 뿐이다.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액션이 취해진 형상들은 개체를 개체이게끔 하는 응집성을 원천 봉쇄당한다. 대상의 정확한 외곽선과 고유색은 변질되며, 얼룩지고 흘러내린다. 얼굴이나 인체의 조직화된 기관 속에 있어야할 체액들은 참조대상으로부터 탈주를 꾀하는 물감과 한데 엉켜 범벅이 된다.

 

경계를 가로지르며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물감인지는 불확실하다. 이 모호한 선과 색채들은 어떤 극한의 감정 상태에 있는 인간의 객관적 재현이면서, 응축 또는 발산된 감정과 공감을 유도하는 주관적 표현이고, 동시에 칠해진 또는 흘려진 물감의 흔적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서는 결정불가능성만이 결정적이다. 모호함 속의 강렬함이라는 특징은 그의 작품을 그로테스크, 언캐니, 앱젝션, 위반, 낭비, 오염, 전염, 엔트로피, 카오스모스 등과 같은 우리 시대의 키워드들과 근접시킨다. 그러한 키워드들의 기원은 미학, 심리학, 인류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온 것들이지만, 공통적으로 경계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관계된다. 이 과도기의 시공간에서는 무엇인가 생겨나거나 사라질 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이준형의 작품은 그 중에서 가장 민감한 경계를 이루는 몸과 얼굴을 대상으로 했다. 몸과 얼굴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다가오기에, 어떤 작은 경계의 위반도 두드러질 수 있다.

 

문명의 억압 속에서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여진 것들이 확 풀어헤쳐지는 듯한 인간상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도 죽음이란 삶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쇠락과 퇴폐의 기운이 역력한 죽음의 기호들은, 인간의 생사고락이라는 역동적인 과정보다는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있기를 종용하는 문명을 낯설게 한다. 전시장으로 개조된 청담동의 주택 3개의 공간에는 다이빙하는 사람들과 얼굴들의 형상이 있는 작품들, 그리고 그것들과 짝을 이루곤 하는 추상적 작품들이 걸려있다. 여러 감정으로 격앙되어 있는 몸과 나란히 배열된 추상적인 형태는 다소 들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가라앉혀 준다. 그것은  짧은 시간동안 휘두른 붓질에서 우연히 생성된 절묘한 부분들을 확대하는 장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라는 무의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것도 알려준다.

 

미색 바탕에 아래로 떨어지는 다이빙 선수들을 포착한 시리즈의 <chapter 11>이라는 특이한 작품 제목은 경제 위기 때 기업을 구제할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미국의 법령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추락이라는 수동적 상황을 다이빙이라는 능동적 상황으로 반전시킨다. 이러한 국면 전환은, 위기는 기회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다이빙을 위한 여러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물의 배경은 어떠한 구체적 좌표도 설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위기와 기회는 추락과 비상만큼이나 비슷하다. 이러난 애매함은 혼란과 해방이라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다이버들의 자세와 표정 또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훈련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난도의 자세인데다가, 육안으로는 관찰하기 힘든 순간 포착이다. 전후관계가 생략된 사진의 성질은 수수께끼 같은 단편으로 다가온다. ‘다이빙하는 사람’이라는 관객의 판단은 미디어화 된 환경에서 눈이 그렇게 길들여져 왔기에 그렇게 인지될 수 있다. 사진이란 그림만큼이나 관습적이다.




동시에 사진은 길들여진 시선을 배반하는 독특한 지점들 또한 내포한다. 작가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평범한 인물 사진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그는 실제를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사진을 보고 변형시켰다. 육안보다 더 정확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사진적 시점의 모호성을 더욱 강조한다. 온 힘을 집중해야 하는 스포츠의 한 동작은 일상 속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미시적인 힘의 역학관계가 드러날 수 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아래의 수면으로 떨어지는 다이버들의 얼굴에서 공포나 희열, 집중과 스릴 같은 것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표정이 대부분이다. 같은 크기의 화면에 여러 표정과 동작들이 하나씩 구현되어 있어 기이한 단편들은 일련의 맥락이 형성되어 연속 동작 같은 환영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간성을 전제하는 변형은 화면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화면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다이버들은 빠른 속도감으로 몸통 위아래로 선이 삐져나온 채 공중에 붕 떠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그림에서 추락은 날개는커녕, 보이지 않는 밑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중의 가속도 붙은 고깃덩어리 같은 사물만을 마주하게 할 뿐이다. 100호 크기의, 거의 아무런 특징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일률적 캔버스에 그려진, 대부분 등신대의 다이버들은, 시작과 끝을 가진 유한한 시간 속에 마찬가지로 몸을 싣고 있는 그림과 마주한 이를 거울처럼 비춘다. 작가는 인생의 과정을 한 시공간 속에서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탄생은 에너지의 집중에 의한 것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는 그 반대이며, 그 과정은 비가역적이라는 점에서 인생은 비극으로, 역사는 종말론적 파국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이버 그림 옆에 녹색계열의 물감을 수직으로 흘려 만든 몇 줄기 선들은 중력의 힘을 받아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을 추상적 어법으로 부연 설명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그림이나 다이빙 같은, 인간의 목적지향적인 행동에 내재한 자연적 힘을 강조한다. 그것이 자연적 힘인 한 인간으로서는 제어할 수도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캔버스를 흘러내리는 물감 줄기는 그 옆의 인간과 같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의 법칙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는 숙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규칙을 상대화시키는 자유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사진의 기계적 시점이나 중력은 그자체로 비극도 희극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 장면의 느낌을 달라질 것이다. 이준형의 그림에는 이처럼 열어둠의 장치가 많다. 막 태어난 아이의 모습에서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창백한 시체의 기운을 포착하는 그림이나,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그린 이전의 작품들이 인간의 비극적 실존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는 감정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다. 가령 이전작품에서 겹겹이 포개진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의 자세에서 보이는 풍자적 희극성을 이 전시의 다이버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얼굴만 포착된 작은 초상들은 어른/아이, 여성/남성, 동양/서양, 실물/사진이 골고루 섞여 있으며, 대부분 어떤 극적인 감정의 상태 속에 포착되어 있다. 다이빙 선수나 포르노 여배우들처럼 인터넷에서 수집된 사진들은 자유분방한 붓질과 튀는 색채로 변형되어 있으며, 혀를 빼물고, 고함치고, 찡그리고 파안대소하면서 적나라하게 그들의 감정을 배출한다. 심리적이고도 육체적인 배설은 비천함(abjection)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낳는다. 초상과 나란히 배치된 추상적 화면들은 초상의 색, 터치, 세부 등과 연관성이 있다. 작은 인물 옆 화면은 인물의 인상이나 성격을 암시하고, 포르노여배우 옆의 화면은 고조된 긴장이 이완되는 생체 리듬이, 다이버 옆의 화면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고도의 집중이 느껴진다. 다이버와 포르노 여배우 옆 화면의 녹색 계열의 색은 살색의 보색이라는 조형적 상보관계를 이룬다. 그것은 난무하는 인간의 체액과 달리, 이물감을 주는 색이다.

 

동시에 녹색 계열에 내포된 평온한 분위기는 긴장감 가득한 옆의 행위들을 소격시킨다. 인물들은 축적된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으며, 옆 화면의 위에 찍힌 물감은 아래로 흐른다. 또는, 단지 흘러내린다기보다, 적극적으로 공간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 화면 모두에서 투입/방출된 심리적, 육체적, 물리적 에너지가 작품 또한 완성시킨다. 지시대상은 사라져 있고 조형적 언어만 남아있는 이 추상적 화면은 ‘구상’을 ‘추상’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애초의 지시대상 자체가 추상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들은 대부분 조형의 재료로 선택된 무명씨들이다. 상반된다기 보다는 동족 관계에 있는 두 화면은 언어가 그자체로 단독으로 서 있기는 힘들다는 점 또한 암시한다. 형상을 고수하는 이준형의 그림에서 대상, 특히 인간은 언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가능하게 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원천이 된다. 무의식적 충동의 원천이 되는 인간은 기존의 언어를 변형시키는 동인이다.

 

우선 인간이라는 원형은 기이한 형태와 다채로운 색을 인지 가능하게 해주는 경계를 분명히 한다. 물론 이 경계는 위반을 준비하고 예견하지만 말이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가 시작하고,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발전시킨 개념에 의하면, 인간과 문명이 질서 잡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순수와 오염간의 경계 설정이다. 인간의 몸은 가장 원초적인 경계를 이룬다. 이 경계 위에 각종 금기가 생겨난다. 삶과, 죽음 특히 인류탄생의 비밀이 내재된 성적 금기는 엄격하다. 그러나 금기는 지켜지는 것만큼이나 위반된다. 위반의 순간, 감추어져 있던 에너지가 폭발 한다. 축제, 재난, 또는 파국 속에서 에너지의 교환이 일어난다. 몸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방출된 에너지는 오물로 범람한다. 바타이유가 에로티즘의 본질에 대해 논했듯이, 인간은 오물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성적인 절정의 상태인지 출산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상태인지 알 수 없는 여성의 초상은 어떤 단계에서 희열과 고통은 구별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다이빙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섹스 오브제로서의 포르노 여배우들은 인간인지 기계인지도 알 수 없다. 얼굴과 몸의 구멍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질척한 체액/물감들은 이러한 와해를 보여준다. 그는 젖은 재료로 젖은 인간을 그림으로서 소재와 방법 면에서 모두 경계의 해체를 꾀한다. 작업에 대한 이준형의 성향과 태도가 잘 드러난 이 전시는 고정된 주체가 아닌, 과정 중의 주체에 대한/의한 작품을 보여준다.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소재와 재료 선택 외에 빨리 그릴 것이 요구된다. 다이버가 나오는 그림은 2-4시간, 작은 얼굴은 15-30분, 길어야 한 시간이 소요 된다고 한다.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위험한 또는 위대한 순간을 마냥 길게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에 그림에서 빠져 나와 거리를 두고 이성적으로 관찰하는 시간을 길게 갖는다. 그리기 역시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방출되는 순간과 같다. 순간적인 방출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야 한다. 이준형의 작품은 대상을 바라보는 냉혹함과 그리기에 대한 열정적 태도가 결합되어 있다.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부터 최대한 탈주를 꾀하는 그의 얼굴은 환상적인 변형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즉물적인 관찰의 결과이다. 이러한 즉물성은 격렬하게 움직이는 대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사진적 시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친숙한 인간의 얼굴을 시공간적 간격을 두고 확장해서 보면 비인간적인 영역이 드러난다. 그 영역을 확장시킨 것은 어둠에 감싸여있던 몸을 투명한 가시성의 대상으로 정복해온 과학이다. 양수로 가득한 모태 속에서 개체가 발생할 때 인간은 계통발생을 반복하는데, 5주 정도에 어류의 아가미 같은 형태를 거친다. 존 리겟은 [얼굴문화, 그 예술적 위장]에서 얼굴의 기원을 어류의 아가미로 본다. 존 리겟에 의하면 활처럼 생긴 아가미의 뼈가 서서히 턱뼈로 바뀌었다. 그리고나서 원래 물을 펌프질하는데 쓰였던 아가미 근육은 두개골 전면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근육 막으로 천천히 변형되었고, 이 근육막이 마침내 인간의 얼굴이 되었다.

 

얼굴 표면 바로 밑에는 백 개가 넘는 근육이 깔려있다. 이 근육들은 수천가지 방법으로 서로 가로지르며 여러 방향으로 깔려 있어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미묘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 얼굴 표정 대부분이 여러 근육의 동시작용으로 생긴다. 화가의 붓은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근육의 동시적인 작용에서 일상에서 친숙한 몇몇의 코드를 뽑아낸 둔탁한 도상으로서는 불가능한 미세함을 뽑아낸다. 이준형의 작품에서 그것은 극한의 감정 중에 포착된다. 그것은 결코 일상에서 친숙한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그 무엇으로 보이든 작품 속 형상 자체는 생성 중에 있는 모호한 대상이다. 초상화의 대가들은 이미 그런 모호함을 알고 있었다. 니콜 아브릴은 [얼굴의 역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웃음과 고통이 얼굴에서 아주 유사한 선으로 그려지므로 화가는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고 인용한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얼굴에서 다른 표정, 심지어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간주되지만, 전래된 신학의 변형에 불과한 인간주의의 선입견을 배제한 냉정한 관찰은 보다 변화무쌍한 인간의 형상을 펼칠 수 있게 한다. 손바닥만한 얼굴은 광대한 풍경이 될 수 있다. 이준형의 작품에서 인간은 어떤 심오한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핵심과 주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핵심이자 모든 것이 주변이다. 거칠게 그어진 선과 튄 얼룩, 그리고 무언가 들고나는 구멍들로 이루어진 인간은 깊이가 아니라 표면들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표면들마저도 서로 부딪히고 깨져나가며 녹아내리는 중이다. 그의 얼굴들에는 하얀 바탕 면이 그대로 방치된 부분도 발견된다. 아무 의미도 없는 공백 또한 얼굴이라는 가장 긴밀한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이다. 빈 공백은 제자리를 잃은 선과 색채가 운동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상반될 수도 있는 극한의 감정이 하나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몸 자체가 ‘뫼비우스 띠같이’(엘리자베스 그로츠) 연결된 하나의 표면이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요동치는 ‘리비도적인 표면’(리오타르)들은 고체적인 명료함이 아니라 액체, 또는 기체적인 유동성으로 가득하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유동성 자체가 인간의 열망과 갈망을 표현한다. 유기적인 조직화를 벗어나 어떤 힘이 관철되는 유동적인 표면들과 구멍들에서 흘러내리는 액체는 어떤 특정한 개인을 초월한다. 새로운 초상들은 인간주의의 협소한 전망에 한정되지 않은 삶의 경이를 창조하기를 바라는 이들에 의해 시도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성이 자유를 낳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억압이 주체성의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억압을 넘어서 관리의 시대에 진입한 주체성은 사회의 지배적 코드에 의해 구조화된다. 가타리가 [기계적 무의식]에 말하듯이, 보편적인 자유의지를 설교하는 주체성 대신에, 새로운 주체성을 창안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 믿어온 바와 같은 인간적인 것보다 비인간적인 것에서 찾아질 수 있다. 다양한 타자를 억압하며 도처에서 부작용을 빚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는 해체되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얼굴 이전의 비인간성, 얼굴 너머에 완전히 다른 비인간성을 강조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탈영토화의 선들이 절대적으로 긍정적이 되는 비인간성이다. 얼굴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저자들에게 얼굴은 결코 선행하는 기표나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화된 공간적 구성, 또는 강력한 조직체로서의 얼굴이라는 기표의 벽을 관통하여 생성 또는 해체 중인 얼굴은 기성의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미지의 것으로 되기를 말한다. 되기는 시간성을 깊이 개입시킨다. 이준형의 작품 속 인간들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떨어지거나 깨지는 등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변화의 와중에 있으며, 작품을 제작하는 빠른 속도 또한 변형을 생성과 중첩시키기 위한 것이다. 재현이란 기원적 모델의 모방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준형의 작품은 엄밀히 모델이 없는 모방이다. 인터넷에서 익명적인 사람들을 수집하는 그의 방식은 재현적 패러다임을 전복한 시뮬레이션을 끌어들인다.

 

핼 포스터는 시뮬레이션이 재현의 밑에 있던 실재를 뽑아내버림으로서 재현을 기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모방은 원형에서 정점에 달하는 항들의 유사성(계열)이나 상징적 질서를 구성하는 관계들의 일치(구조)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되기는 이들 중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생성들은 퇴행이 아니라 창조적인 역행이며, 신체 안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된 비인간성 그 자체를 증언한다. 생성들은 지각할 수 없는 것-되기를 향해 돌진한다. 재현하는 업무에서 빠져 나온 돌연변이적인 선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에서 그린다. 이준형의 그림에서 종은 변종으로, 기억은 망각으로, 그리기는 지우기로, 구성은 해체로, 해석은 실험으로 대체된다. 상이한 배치를 통해 경계 위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이행의 과정에 몰두하는 이준형의 작품에서, 체액과 물감을 구별 지을 수 없는 장은 ‘힘의 무상 유출이자 대가없는 지출’이 행해지는 ‘육체의 유체역학’(알폰소 링기스)이 작동되는 장이다.

 

출전; 2012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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