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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4)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편집부


당당하고 정결한 姿態 … 바람 불면 흔들릴 듯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국보 107호, 높이 53.5cm 입지름 19.4cm 밑지름 18.6cm 배지름 43.3cm, 18세기, 이화여대박물관. ©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청색백자는 고려 초부터 청자와 함께 간간이 만들어지다가 조선 초기에 활발해져 조선 후기에 절정을 이뤘다. 세종 때부터는 중국 왕실에서 요구할 정도로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후 곧 일반 백성도 생활용기로 사용하면서 앞서 발달했던 분청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 중 전문가들은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와 ‘달항아리’ 등을 가장 아름다운 백자로 꼽았는데, 이번 호에서는 먼저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의 아름다움을 꼼꼼히 짚어보고, 다음호에 ‘달항아리’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 편집자주
조선후기 왕실관요의 결정체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형태와 문양, 쓰임이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 祭禮, 宴會, 供養 등 특수한 경우에 술을 담거나 꽃을 꽂아 장식하는 용도였다. 현전하는 유물 가운데 형태와 질이 좋고 문양이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조선의 官窯였던 分院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분원 백자 항아리 가운데는 순백자이거나 코발트(回靑, 回回靑) 안료로 문양을 그린 청화백자가 많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酸化鐵을 안료로 사용한 鐵畵로 施紋한 예는 드문 편인데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포도문 항아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일체의 장식 문양을 자제한 채 기면 전체를 화폭 삼아 그린 넓은 이파리들과 그 사이로 뻗어 내린 포도넝쿨은 붓놀림이 자유자재하다. 문양은 화면 앞뒤가 같지만 오른쪽 위쪽에서 사선으로 내려 뻗은 줄기는 마치 나선으로 덩굴져 흘러 끝없이 이어질 듯하다. 그 끝에는 주렁 낭창하게 포도송이가 달렸는데 철사 안료로 농담을 부려가며 그린 품이 한 폭의 빼어난 墨葡萄圖이다.
예로부터 포도는 受胎와 건강·장수·풍요,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으니 이 항아리의 충만한 생명력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충만한 걸작은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무르익은 성숙한 시대라야만 가능한 것이니, 좋은 원료와 능숙한 제작기술, 최적의 번조가 가능했던 조선후기 왕실 관요의 결정체인 셈이다.
곧게 솟은 입으로부터 곡면을 그리며 풍만하게 부풀어져 내려간 어깨는 좁은 굽에서 대담하게 벌어지며 팽창하듯 올라선 하체와 항아리의 중심부에서 만나 용량을 극대화시켰다. 50cm가 넘는 키에 곡선의 가파른 변화는 당당하면서도 긴장감을 준다. 그러나 어깨에서 몸체 중간까지 자연스럽게 드리운 가지의 힘찬 선과 적절한 여백처리는 보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그 빈 공간 사이로 바람이 불면 흔들림조차 그대로 전해져 올 것처럼 사실적이다.
조선의 왕실 관요였던 경기도 광주의 분원 가마터의 상황을 살펴보면, 17세기에 조업했던 몇몇 窯場에서 철화로 포도문을 그린 백자파편들이 수습된다. 그 가운데 광주시 초월읍 선동리 요지에서는 문양의 격은 다르지만 철화로 포도문을 그린 편병이나 의궤의 화본에 충실한 雲龍紋 등이 그려진 백자파편이 수습돼 관요에서 철화자기를 구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문양표현의 능숙함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해마다 사옹원 관리가 그림 그리는 사람을 인솔하고 궁중에서 쓸 그릇을 감독하여 만든다(每歲司饔院官率畵員監造御用之器)”고 한 것처럼 전문직 화원의 개입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일반적으로 충실하게 당대 화풍 내지 공예장식 문양을 재현하는데 능숙했다면, 이 항아리의 문양은 보다 더 회화적이고 文氣가 넘친다. 따라서 포도그림의 구도와 세부 표현 등에서 심정주(1678~1750)나 권경(?), 혹은 이인문(1745~1821) 같은 18세기의 화가들의 포도화풍에 비견되기도 한다.
문양은 초벌구이 한 위에 그려졌다. 초벌 구운 도자기는 표면에 수분이 전혀 없어 건조하고 거친 질감을 갖는다. 따라서 그 위에 시문하는 작업은 종이나 비단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어렵다. 뿐만 아니라 철사 안료는 특성상 융해될 때 위쪽으로 떠오르는 성질이 있다. 즉,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구우면 안료가 유층을 뚫고 상승하려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아무리 문양을 잘 그려도 성공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항아리는 발색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번짐을 제외하면 도자기 표면 위에 자유롭고 완벽하게 문양을 구사해 내었다.
‘승정원일기’ 현종 14년(1673)의 기록을 보면, 산화철이 본래 붉은 색이고 구워지면 색이 검게 되는데 간혹 누렇게 되기도 한다고 하였다. 철화백자의 색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항아리의 문양도 어두운 갈색에서부터 연한 황록색에 이르기까지 변화 있게 발색되었는데 도공은 어쩌면 안료의 까다로운 특성을 역전시킨 것이다. 잘 익은 포도알과 크고 짙푸른 이파리에는 안료를 많이 두어 어두운 색으로, 작은 포도알과 여린 잎은 안료를 적게 사용하여 옅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저 농담의 차이지만 음영과 강약을 적절히 활용하여 포도의 사실적 표현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항아리를 진정 ‘백자’이게 하는 것은 ‘공예’로서 도자기의 본연을 충실히 구현했다는데 있다. 백자의 공예적 미덕은 단단한 質과 정결한 태토, 투명한 유약 같은 ‘그릇’이 지녀야 할 기본요소에 있을 것이다. 단단한 질은 흙을 잘 녹여 완전히 磁化시킬 수 있는 번조기술을 전제로 하며 태토와 유약의 희고 맑음은 재료의 선별과 제작공정의 정밀도를 말해준다.
이 항아리의 成形은 중국 明의 宋應星(1587~1664)이 지은 ‘天工開物(1637)’에 보이는 항아리 제작과 같은 방법으로 이뤄졌다. 즉 몸체를 아래 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만든 후 중간부를 맞붙여 접합하는 방식이다. 포도문 항아리도 일부 접합 흔적과 유약이 벗겨져 태토가 드러난 곳이 있지만 기물 전체에 빠짐없이 일정한 농도로 유약이 고르게 입혀졌고 식은 테(氷裂)도 거의 없다. 특히나 몸체는 精製가 잘 된 고운 白土로 만들어져 표면을 쓰다듬어 보면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찰지다.
이 항아리와 비교되는 백자항아리 가운데 ‘달항아리’(18세기 전반)가 있다. 넉넉한 볼륨과 둥글면서도 둥글지만은 않은 不定의 형태는 편안함과 더불어 무한한 상상력을 일깨운다. 나아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형태적 특징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백자로 거론되곤 한다. 달항아리가 만들어지던 시기는 포도문 항아리와 비슷하여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가 중심을 이루며, 경기도 광주의 신대리 요지 등 분원요장에서 제작되고 있어 왕실용 의례기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추측된다. 문양이 없는 순백의 달항아리가 상찬되고 있지만 때로 철화나 청화로 용문을 그린 경우가 있다. 그러나 형태와 문양이 혼연일체 되어 이루어 낸 격조와 완성도 높은 백자 질을 가진 포도문 항아리를 능가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국보 93호로 지정된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가 한 점 전하지만 포도문의 철화 발색이 너무 짙어 뭉그러졌고 구연부에 철사안료로 도안 장식문을 둘러 시원한 맛이 덜하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항아리를 보게 되었던 날, 주위의 사물과 사람이 사라지며 마치 聖像의 후광처럼 하얗게 빛나 보이는 전율을 느꼈었다. 오랜 시간을 견딘 무생물은 그 스스로가 생명체 이상의 강한 에너지를 지니게 되는 모양이다. 실제로 이 항아리는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삶의 쓰라린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시기 시미즈 고지(淸水幸次)라는 애호가의 소장품이었던 이 항아리는 일본의 패전으로 그 주인이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항아리의 재화적 가치는 조형적 가치를 넘어 치졸한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경찰청장 이었던 장택상 씨(1893~1969)의 소장이 되었으나 결국 1965년 이화여대박물관에 안착하게 되었다. 이듬해 바로 국보 제107호로 지정되었으니 그 후로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많은 사람들의 눈과 가슴에 깊이 남게 되었다.
/ 장남원 (이화여대ㆍ미술사)

※ 필자는 이화여대에서 ‘고려중기 청자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등의 저서와 ‘조선시대 백자공방의 종류와 성격’ 등의 논문이 있다.
※ 출처-교수신문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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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 철화백자와의 비교 中, 활달한 黑花 문양 발달 … 日, 질박한 느낌의 ‘에가라츠’

▲ 흰바탕에 검은 꽃무늬의 뚜껑항아리, 높이 40cm, 16세기. ©
▲ 에가라츠 감나무무늬 세귀달린 항아리, 높이 17cm, 모모야마시대, 東京 出光美術館. ©
※ 이미지는 첨부파일참조
중국에서는 명대 중반까지만 해도 청화백자가 가장 고급이었으므로 황실 관요였던 강서성의 景德鎭 御器廠에서는 청화백자가 중심이었고, 흑화자기는 지역수요품이었다. 따라서 관요제품에 비해 문양의 밀도나 제작기술, 도자기의 재질에서 저급한 수준을 드러낸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러 흑화자기의 생산은 하북성은 물론 河南, 山西, 陝西까지 확대되어, 과거에 청자로 이름이 높았던 耀州窯系나 鈞窯系 요장도 흑화자기 제작으로 방향을 바꾼다.
따라서 현전하는 흑화자기는 청화를 모방한 세밀한 것부터 지방색이 두드러지는 활달한 문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명대에는 단순화된 화훼문이나, 새, 인물, 물고기 문양 등이 즐겨 그려졌다.
그 가운데 16세기의 長冶軸承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白地黑花花卉紋 뚜껑항아리는 명대 자주요 흑화장식의 특징이 잘 살아있다. 아래가 좁고 어깨가 단단한 항아리는 여러 단으로 나누고 문양대에 각각 풀꽃을 그렸는데 치밀함은 떨어지지만 활달하고 속도감 있는 문양은 흑백의 대비를 고조시킨다.
도자기의 철화문이 갖는 공예적 위상은 나라와 시대마다 다르다. 중국에서는 이미 唐代에 호남성 長沙窯 등지에서 철사안료가 문양으로 사용되었지만, 백색의 도자기에 검은색의 문양을 그리는 것은 송대에서 명대 사이 하북성 磁州窯를 중심으로, 이른바 자주요系 가마들에서 유행했다.
자주요 지역은 좋은 백토를 구하기 어려워 어두운 색의 태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태토 위에 백토로 분장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이 가마에서는 분장한 후 깎아 내거나 새기거나 또는 그리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자주요의 觀台가마터 발굴에서 보면 조선의 철화와 비슷한 그리기 기법은 고고학적 퇴적층위상 주로 元代 이후 층위에 집중되어 있다. 문양의 주성분은 철분이지만 나타나는 결과가 검은색이므로 ‘黑花’라 부른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 철화문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사가현과 나가사키현 일대의 히젠(肥前) 마츠우라(松浦) 지방을 아우르는 가라츠(唐津) 지역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와비차(茶)의 유행으로 간소하고 소박함을 즐기는 풍조가 유행했고 그 결과 조선풍의 다완이나 세토(瀨戶)등지에서 제작된 거친 도기가 애호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철화 문양을 시문한 것들은 에가라츠(繪唐津)라고 했는데 철화를 시문한 위에 나뭇재를 잿물유약(灰釉)이나 長石釉를 입혀 굽곤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들의 활약에 힘입어 가라츠 야키의 유통량은 급증하였다. 철화로 시문한 가라츠 자기들은 일본 대도시의 유적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는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口緣 바로 아래 3개의 귀가 달린 항아리는 茶道에서 물을 담아 두는 항아리(水指)이다. 다른 장식이 없이 동체 중심에 커다랗게 둥근 감이 달린 감나무를 대담하게 그려 넣었다.
釉色은 회색을 띠며 태토도 거친 느낌을 주는데 과감하게 종속문을 생략하고 주문양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가라츠 철화문 도자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나름대로 분위기 있고 질박하지만 조선의 관요가 정성껏 차려낸 철화포도문 항아리와 비교하기엔 격이 다르다.

/ 장남원 (이화여대ㆍ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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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조사:한국 최고의 백자
청화매죽문, 明나라 영향 속에 조선다움 구현

▲백자청화매죽문항아리 ©
한국의 대표적인 백자로 전문가들은 이화여대박물관의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를 꼽았다. 강경숙 동아대 교수 등은 “조선후기 화원들의 회화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일 뿐 아니라, “철분의 농담으로 명암을 표현해 포도를 잘 묘사했다”며 미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달항아리’와 ‘백자청화매죽문항아리’도 秀作으로 추천됐다. 그 중 청화매죽문항아리는 초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것에서 벗어나 점차 조선적인 특징을 갖춰나간 “전형적인 초기 청화 백자”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청화백자에는 매죽·송죽·송매·매화절지문이나 죽절지문 등이 등장하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됐는데, 이 항아리 전면에 그려진 매죽문 역시 한 폭의 회화처럼 아름답다. 매화와 대나무는 줄기가 ×자로 교차됐으며 鉤勒法(선을 강조하는 기법으로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과 대조됨)으로 그려졌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대나무는 매우 가는 것이 화법상 15세기 조선묵죽화의 것과 유사하다. 항아리의 어깨와 아랫부분의 화려한 장식은 명나라 영향을 받았다.
항아리의 동체는 어깨에서 불룩해지다가 아래쪽에서 잘록하게 들어가고 바닥에서는 다시 반전되어 밖으로 벌어져 S자형 굴곡을 이룬다. 입구부분은 안으로 약간 기울어져 立式으로 처리됐는데, 이는 중국 元·明 자기가 동체가 구형인 달항아리만 입식 구부로 처리된 것과 구별된다.
‘백자청화매죽문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도 하나 더 있다. 하지만 “매죽문과 여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와 아랫부분에 둘러진 연판문대 때문에 구도면에서 답답함을 느낀다”는 평에서 알 수 있듯 리움미술관의 것이 지닌 매력이 뛰어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 추천해주신 분들: 강경숙 동아대, 김영원 국립중앙박물관, 방병선 고려대, 윤용이 명지대, 이종민 충북대, 장남원 이화여대,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 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이상 총 8명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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