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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영 / 동일자 속의 타자

이선영


동일자 속의 타자
김승영 전 (5.4--6.3, 사비나 미술관)



이선영 (미술평론가)



김승영은 ‘작업은 내가 타자와 만나는 방법이고, 사회와 만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며,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는 작가가 타자를 위해 작업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자기만을 위해 살아도 힘든 세상에 타자를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담! 더구나 작가만큼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때로는 지독한 이기주의까지 발동하지 않으면 작품이라는 초유의 것을 세상에 내놓기 힘든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타자와의 소통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 생산회로에 작품을 순환시키는 유통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작가라는 존재는 쉽지도 않고 그 필연적 이유도 확실치 않은 타자와의 소통에 매달리곤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타자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상적 의미의 소통이란 상상과 상징을 매개로 자신과 타자가 서로를 개방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불변하는 대상에 대한 관념인 동일성(sameness)을 벗어나 변화하는 것, 가변적인 것, 즉 다른 것을 추구한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조장하는 바와 달리, 동일자와 타자는 대립되지 않는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자기성과 타자성이 서로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타자가 동일성 안에서 나를 결집시키고 나를 확고히 하며, 나를 유지하도록 도와준다고 본다. 나이면서도 타자인 자기는 유아(唯我)론적 주체와는 다르다. 주체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서양의 해체주의나 동양의 노장사상에서 공유된다고 말해진다.

어떤 조건에서 이 타자는 나의 복제,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진정한 타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리쾨르는 결여의 매개를 통해 타자의 자리가 주어진다고 대답한다. 김승영은 이 전시에서 이러한 자리를 많이 마련했다. 관객이 앉을 수 있는 따뜻한 쇠 의자, 주변을 비추는 물웅덩이들이 그것이다. 그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부재의 흔적을 보여 주지만, 타자에 의해 곧 채워진다. 그의 작품에서 타자는 명확한 현상이 아니라, 돌연한 현현이다.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여 경계가 소멸된 푸른 방에 홀로 떠 있다가 불현 듯 사라지는 작품 [구름]은 생성과 소멸의 와중에 놓인 존재의 모습이다. 솜사탕 같은 부드러운 구름 이미지에서 폭풍우 소리가 들려온다.

오윤석이 담당한 이 사운드는 실제로 구름 지나가는 소리를 담은 것이다. 이러한 충돌은 뜬구름 같은 인생에 대한 다소 초월적인 비전을 완화시켜준다. 소리는 잠시 뭉글거리다가 휙 사라지는 형상과 마찬가지로, ‘존재와 실체를 같은 것으로 보는 오래된 동일화’, 그리고 그것이 의존하는 ‘시각적 표상에 부여된 배타적 특권’(리꾀르)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좌표체계의 기원이 되는 지점은 결코 그 경계를 확정지을 수 없는 구름처럼 아무것이나 될 수 있다. 수집된 스피커 186개를 무려 7미터 높이로 쌓은 작품 [타워]는 8개의 채널을 통과한 입체적 사운드로, 그 안에 들어선 관객을 즐거운 혼돈에 빠트린다.

그것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올린 바벨탑을 연상시키지만, 현대의 작가에게 다양한 언어는 분열보다는 차이를 통한 새로운 창조를 향해 있다. [타워]에서는 뭔가의 시작을 알리는 고음, 박동소리, 푸드득거리는 새 날개 짓 소리가 들려온다. 전시부제 ‘walk’에 나타난 바처럼, 작품들은 정처 없이 걸으며 만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생성과 소멸의 드라마가 있다. 죽은 새와 무너진 담과 벽돌 사이의 이끼와 새싹들이 나오는 작품 [strasbourg]에는 삶과 죽음이 하나의 원을 그리며 순환한다. 김승영의 작품에서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 역시 하나의 원환을 그린다. 동일자(또는 타자)를 삶으로 보는지, 죽음으로 보는지는 작가의 세계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긴밀하게 섞여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작품 [기억]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들을 한지 위에 새겼다. 이름들은 이리저리 중첩되면서 I 자를 형성한다. 물방울이 떨어져 생기는 파동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 [파문] 역시 i 자 형상이다. 여기에서 나는 찰라 속에서만 분명해지는 존재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빚어진 파문들에 불과하다. 영상작품 [기억 1963-2011]은 그가 기억하는 사람 825명이 영화처럼 흘러간다. 이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인 존재들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리한다. 그 앞에 죽거나 살아있는 식물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그를 구성(또는 해체)하는 타자들의 강도는 균질하지 않다. 타자들은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책임감을 낳게 하기도 한다. 입자들처럼 부유하는 기호들은 다름 아닌 자신을 구성하는 원소이다.

출전; 퍼블릭 아트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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